글꼴에서부터 언니, 누나라는 말에는 엄마를 흉내 낸 넉넉함이 깃들어 있다. 편안한 의자를 닮은 글자 ㄴ이 중심에 놓여 새되거나 거칠지 않고 부드럽고 안락하다. 엄마라는 말만큼 묵직하지 않게 가볍고 발랄하여 동기간의 즐거움까지 느껴진다. 엄마, 어머니에 등장하는 ㅁ이 좀더 타협 없이 안전한 네모 요람인 것과 비교된달까.
--- p.14, 「언니의자」 중에서
나도 밥을 삼켜 밥의 길을 낸다. 내 밥이 가야 할 길, 밥으로 해야 할 일을 다짐한다. 글로써 밥을 벌지는 못하더라도 밥 먹는 이유는 되고자 한다. 누군가의 허기진 가슴으로 흘러 들어가 흐드러진 꽃무리 남길 수 있도록, 오늘도 글 지어 따뜻할 때 내어 올린다. 내가 당신의 고민을 잠시 안고 있을 테니 식기 전에 어서 한술 뜨시길.
--- p.24, 「밥과 똥」 중에서
“자유는, 은행잎이 바람 때문에 떨어지지 않는 거야. 자기가 떨어지고 싶을 때 스스로 내려오는 거.”
--- p.28, 「자유 낙하」 중에서
첫사랑은 나에게 국밥 그릇을 기울여주며 다가왔습니다. 아직 남은 밥을 잘 떠먹을 수 있도록 그는 뚝배기를 받침대 한쪽에 걸쳐 올려 국밥이 내 앞에 오목하니 오기에 해주었지요. (중략) 순간 단 한 번도 국밥 한 그릇을 천천히 끝까지 먹어보지 못한 사람처럼 허기가 밀려오더군요. 그 참을 수 없는 조바심을 사랑이라 부른다는 것을,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 p.40, 「그 사랑 다시 하고 있습니다」 중에서
그러나 가족은 재미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가족은, 가족애는 온갖 책무와 양보가 약간의 억울함과 버무려진 상태로 운영된다. 그 안에서는 사랑한다는 말보단 고맙다는 말이, 그보다 미안하다는 말이 가장 거룩한 고백일지 모른다. 모세의 석판에는 가족에게 미안해하라는 계명이 새겨져 있어야 했는지도 말이다.
--- p.79, 「엄마 없이는」 중에서
절대로, 다시는, 영영. 죽음은 산 자들이 쓰지 않는 단어로 쓰여진다. 우리는 그 생경함이 무서워 다들 낯 가리는 돌쟁이처럼 우는가 보다.
--- p.97, 「예삐할머니」 중에서
수평으로 흐르던 시간이 덜컹, 수직으로 움직일 때가 있다. 전속력으로 달리던 비행기가 창밖 풍경을 비스듬히 가르며 중력을 떨쳐내는 이륙의 시간처럼.
--- p.113, 「이음」 중에서
모르는 것 많은 나에게 아이들과 할머니는 눈에 보이는 인과다. 영리하고 열심인 처음과 홀가분하게 지혜로운 노년. 나의 귀한 시작과 명료한 끝이 저 안에 있을 것이다. 나도 저렇게 영롱하게 영글었고 저처럼 후덕하게 흐드러질 것이라 믿으면 세상 두려울 게 없어진다.
--- p.128, 「마리데레사」 중에서
오목한 삼각 웅덩이. 두 개의 나팔관과 질을 꼭지점으로 한 자궁처럼 생겼다. 그 가운데 평생 마르지 않는다는 샘물. 내 눈에는 황금빛 싱글몰트로 보인다.
--- p.138, 「할매 펜트하우스」 중에서
어느 날 문득 어른이 되고 엄마가 된 딸들이 질끈 용기 내보게 하는 글을 쓰고 싶다. 포기하고 싶을 때 꺼내 보라고 주신 사부님의 비법 주머니까지는 아니더라도 시행착오를 고해하는 오답노트 정도는 되고 싶다. 식은 도시락통 안에 든 작은 쪽지이기를, 나도 너처럼 이곳에 왔다 갔다는 낙서라도 되고 싶다. 할머니와 어머니로 이어진 어미라는 종의 역사가 나를 통해 너에게도 전해졌음을 일러주는 문장이 되고 싶다.
--- p.150, 「엄마와 딸과 그 딸」 중에서
게다가 거기에 가면 동족의 생장과 노화를 관찰할 수 있다. 내 주름을 미리 만져볼 수 있는 곳. 천천히 걷고 느리게 말하는 곳. 알몸과 서러움을 벌겋게 드러내 보여도 해치지 않는 곳. 가만히 나를 닦아내는 곳. 약간의 호의만 가지고도 남까지 어루만질 수 있는 곳. 우리에게는 여탕이 있다.
--- p.157, 「여탕보고서」 중에서
작아진 엄마의 등을 바라봅니다. 엄마의 슬픔이 완전히 불려지기를 언니와 나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조금은 아플 테지만 더 개운해진 마음으로 우리의 작고 뜨거운 여행이 다시 시작되기를요.
--- p.161, 「책 속 갤러리 〈혼자하는 목욕〉 작품노트」 중에서
작은 봄들은 우렁차다. 보도블럭 사이 손톱만 한 땅에 핀 민들레 새싹도 그 땅에선 자기가 제일 크고 위대하다는 사실을 안다. (중략) 하찮은 생은 없다.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은 매 순간 클라이맥스다.
--- p.177, 「봄갯벌」 중에서
처음 꼭 맞던 자리에 그렇게 잘려나간 공간이 생기면서 그 구멍으로 따스함이 고이지 못하고 훌훌 빠져나가 버린 게 아닌가
--- p.190, 「칼」 중에서
말 그대로 지금은 그렇지 못하니까, 가끔씩 찰나로 맛보는 그 경지가 몹시 감질나서, 마치 집안 곳곳 금연하겠다는 각서를 써 붙인 골초마냥 그 말을 수시로 적어보는 것이다.
--- p.202, 「그렇지 못해서 그렇다고 하는 말」 중에서
만져지고 씹히고 걸터앉기 좋고 어딘가 괼 수 있는 글 말이야. 삐뚜름하게 기운 일상에 끼워 넣을 수 있는, 역시나 삐뚜름하고 투박한 굄돌처럼 말이지.
--- p.216, 「잘 지내니」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