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의료 발전상의 특징은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의료 기술의 발전은 그동안 치료할 수 없었던 여러 질병을 종식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으며 실제로 소아마비와 두창의 근절을 이끌어냈다. 둘째, 의료의 상업화가 심화되면서 의사와 환자의 관계뿐만 아니라 제약회사, 보험회사, 대중매체 등이 현대 의료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셋째, 현대 의료의 발전은 상업화를 넘어 국제화로 이어졌다. 기술 발전에 따른 교통의 편이는 과거와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빨리, 그리고 멀리 질병의 전파와 이동을 가능케 했다. 국경을 닫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인 일이고, 국가가 개별적으로 질병을 통제하는 것도 불가능하므로 국제기구와 단체의 개입이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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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초부터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 지식이 유입되면서 신체에 대한 관념도 변화하게 되는데, 몸과 마음이 하나가 아니라 분리된 것이라는 심신이원론이 등장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아담 샬의 『주제군징(主制群徵)』에서는 혈액·호흡·뇌척수신경 등 서양 의학의 개념을 소개하였는데, 특히 뇌를 운동과 감각을 주관하는 기관으로 제시하는 ‘뇌주설(腦主說)’을 담고 있었다.
그 영향을 받아 18세기 실학자인 이익(李瀷)은 「서국의(西國醫)」에서 전통적 이해와 달리 뇌가 신체를 움직이고 감각하는 중요 기관이라고 서술하였는데, (중략) 자료인 19세기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는 이규경(李圭景)이 ‘뇌주설(腦主說)’을 받아들이고, 이를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하여 설명하면서 뇌가 동각의 주체임을 변증하는 시도를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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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유독 정신질환에 대해서만큼은 의료 ‘바깥’에서 이해하고 대응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예컨대 조현병에 대해서도 그 발병 원인이나 치료법에 대한 관심보다는 조현병을 앓는 환자가 보일 수 있는 특수한 이상행동이나 그로 인한 (악)영향에 초점을 맞추곤 한다. (중략)
유독 정신질환만큼은 자신의 발병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환자로서의 타자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 그러하기에 정신질환에 대한 이해는 종종 타자화의 시선으로 연결되고는 한다. 감염 혹은 발병의 위험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다는 점 때문에, 정신질환 혹은 정신질환자에 대한 접근은 공감이나 이해보다는 불가해한 외부적 존재에 대한 배타적 태도로 귀결되거나, 혹은 대상화된 연민과 동정의 태도로 형상화되기도 한다. 이런 시선들은 정신질환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되는 한편, 이러한 편견이나 오해를 더욱 강화시키는 악순환을 낳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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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성감염병은 세균과 바이러스로 인해 급속히 감염되는 질병으로 천연두, 페스트, 장티푸스, 콜레라, 인플루엔자 등이 이에 속한다. 빠른 시간 안에 많은 사람들이 전염되었고, 치사율도 높았기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급성감염병으로 인한 피해가 컸다. 한반도를 여러 차례 습격했던 천연두의 경우 그 증상을 살펴보면 피부 발진은 물론이고 갑작스런 고열, 허약감, 오한과 두통, 허리통증과 함께 나타나며 때때로 심한 복통과 섬망(?妄)까지 겪을 수 있어 갑작스럽게 인간을 습격하여 큰 고통을 주는 급성감염병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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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성질환이 일으키는 신체적인 변화에 못지않게, 그것으로 인한 사회적 관계에서의 변화 역시 만성질환자의 정체성과 삶의 질을 좌우한다. 예컨대, 우리나라에서 AIDS를 앓고 있는 환자의 경험은 심지어 신체적 차원의 증상이나 차이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도 만성질환이 사회적 삶과 환자의 정체성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현재 한국에는 진단 이후 효과적인 항레트로바이러스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다… (중략)
그러나 사회적 차원에서는 ‘죽음’이라 불려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들 HIV 감염인들은 신체적으로 위협을 가하는 존재이자 도덕적으로 타락한 공공의 적으로 여겨진다. AIDS라는 질병에 가해지는 차별과 혐오, 낙인이 지속되는 한, HIV 감염인은 신체적으로 건강할지라도 사회적으로 배제, 고립되며 정상적이고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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