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혹은 1905년) 평양 남쪽, 강서에서 태어난 허버트 김은 그의 가족을 따라 1916년에 중국으로 망명했는데, 이는 그의 부친 김홍서(1886~1959)가 감리교 지도자였으며, 교육자였고, 평양의 주요 신문사의 편집인으로서 일제의 한국 점령에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부친은 1919년 상해에 세워진 망명정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중국 시민권을 얻은 허버트 김은 상해의 YMCA에서 활동했고, 결국 미국 유학을 결정했으며, 그의 부친도 이 결정을 지원했다.
1923년 허버트 김은 미국으로 들어와서 사우스다코타에 있는 휴론대학에서 수학했다. 그가 중국, 일본 등지에서 활약한 사회주의적 기독교 선교사인 조지 셔우드 에디(George Sherwood Eddy, 1871~1963)에게 보낸 서신에 따르면, 그는 “젊은 한국인으로서 나는 무엇보다도 실용적인 분야에 진출해야 한다고 느꼈고 (…) 그래서 광산학의 미래 실용성에 주목했다”고 하였다.
휴론대학에서 수학한 이후 1924년에 그는 콜로라도의 광산대학(CSM)으로 옮겨갔고, 여름방학마다 사우스다코타 리드에 있는 홈스테이크 금광산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1928년 CSM에서 광산학 학위를 받은 후, 뉴욕의 컬럼비아대학 대학원에 진학하여 2년 동안 수학하였고, 광산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30년 그는 미국인, 폴린 립만(Pauline Liebman)과 결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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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상세한 기억은 이 책(III. 시베리아의 유형수, 게르베르트 김의 악몽 참조)에 재현되어 있으며, 스탈린 테러와 소련 강제수용소에 관한 가장 감동적이고 강력한, 그리고 방대한 개인적 기록의 하나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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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11월 1일 월요일 밤, 11시쯤 이미 잠자리에 누워 있는데, 몇 사람이 호텔로 들어와 허버트 김을 찾는 소리가 들렸다. 스텝니약(Stepniak) NKVD의 장이었던, 적어도 3년 전부터 나를 알고 함께 일해왔던 소로킨 대위가 중위를 대동하고 내 방으로 들어와, 내게 소위 체포영장을 보여주었다. 난 그들에게 뭔가 큰 오해가 있을 거라고 말했고, 나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다. 난 기꺼이 가서 뭐든 설명할 작정이었고, 그날 밤 그들이 날 다시 보내줄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옷을 입고 소지품을 챙겨 기다리고 있던 NKVD 차량에 태워졌다. 나는 야밤에 은밀하게 붙잡혀간 수백만 명 중 하나였다. 아무도 언제, 무엇을 위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20세기 소련의 잔인하고, 부당하고, 합법화된 불법의 피해자가 되었다. 그들은 이러한 행위를 공산주의의 이름 아래, 공산주의자들의 수뇌부에게서 지시받은 대로 공산주의자들의 손으로 실행했다. 여전히 그들은 세상 곳곳에서 “우리는 정의의 승리자, 평화의 전사다.”라고 나팔을 불어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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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얀 마르에서 하선하며 다른 죄수가 떨어뜨리고 간 낡고 더러운 셔츠를 집어 들었다. 지저분한 데다가 맨발에 북극 밤의 찬바람에 덜덜 떨고 있던 나의 그때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다시금 나는 어떻게 소련의 수용소에서 살아 나올 수 있었는지 놀라울 뿐이다. 추위에 이가 덜덜 떨리고 발은 쑤셨는데, 무장한 경비병들에 둘러싸인 채로 야외에서 밤을 지냈기 때문에 밤 내내 영하의 추위에 직면했다. 높은 위도로 인하여, 7월도 밤에는 따스함을 갖다 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맑고 차가운 하늘 아래, 북극성이 바로 우리 머리 위에 있는 드넓은 극지방의 벌판에서 5, 6천 명의 영혼들이 서로 온기를 간직하여 이미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한데 뭉쳐 있었다. 북극지방에서 무엇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생각이나 해보았을까? 그들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확실이 나는 모른다. 나의 경우 내 마음은 텅 비어 있었다. 배고프고, 헐벗었고, 춥다는 느낌이 모두 다였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할 것이 없었다! 추위에 잠 못 이루는 밤이 마침내 끝나고 하늘 높이 태양이 떠오르자 얼어붙었던 몸이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지난밤은 이미 잊혀졌고, 오직 그날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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