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적인 태도가 좋은 거야. 회의주의자들이 오래 간다구. 너무 쉽게 확신에 이른 사람은 잘나가다가도 어느 한순간에 홱 바뀌기 쉽지. 그것도 180도. 너, 극우파 인사들 가운데 왕년에 극좌파였던 인물이 많다는 거 아냐?”
허용만은 홍상철의 표정을 한번 힐끗 살피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자신의 청춘을 다 받쳐 떠받들었던 이데올로기가 추악한 소수 권력자 집단의 지배 수단으로 전락해있다는 걸 알았을 때의 그 배신감과 분노! 이것을 전투적인 증오로 표출하는 다혈질적인 사람들이 극우파가 되는 거구, 안으로 삼키면서 좌절하는 사람들이 나 같은 허무주의자가 되는 거야.”
허용만의 뜻밖의 고백에 홍상철은 갑자기 할 말을 잃었다. 허용만의 말소리가 쿵쿵거리며 계속 귓전에 울려왔다.
“난 관념적인 휴머니즘적 정열과 소영웅심으로 운동을 해왔어. 많은 지식인이 그렇지만 말이야. 그런데 운동은 가혹한 현실이야. 휴머니즘의 꽃향기가 그윽한 감동의 대서사극이 아니란 말이야. 시체 썩는 냄새와 고문에 견디지 못해 내지르는 비명이 가득 찬 싸움터에서 치루는 생존 투쟁이자 권력투쟁이란 말이야. 밑바닥에 있는 놈들에게는 생존 투쟁이고, 윗대가리에 있는 놈들에게는 권력투쟁이지. 난 적과의 투쟁보다 내부의 권력투쟁이 더 견디기 힘들었어…”
허용만은 회한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난 비전향 장기수들 못지않게 전향한 사람들도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전향은 쉬운 일인지 아냐. 그것도 용기가 있어야 한다구. 자신이 걸어온 익숙한 길을 부정하고 새롭고 낯선 길로 떨쳐나설 수 있는 용기 말이야.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고서 벌거벗었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이성의 쇠망치를 들고 자기 안의 우상을 때려 부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구. 나 같은 허무주의자들은 그런 용기도 부족한 거야.”
--- 「하얀 요트」 중에서
순간, 아이고, 사고다, 사람을 치었구나, 하는 자책감이 가슴을 아프게 짓눌려왔다. 동시에 빌어먹을, 없는 살림에 몇백만 원 깨지게 생겼구나, 하는 냉정한 계산도 스파크처럼 머릿속을 스쳐 갔다. 심호흡을 가다듬고, 이럴 땐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를 생각해보았다. 먼저 차 트렁크에서 스프레이를 꺼내 사고 위치를 정확히 표시해두고, 피해자를 병원으로 이송한 다음, 경찰과 보험회사에 신고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고 다시 한번 마음을 추스른 다음, 차에서 내려 할머니 쪽으로 다가갔다.
몸빼 바지에 꾀죄죄한 방한 조끼를 입은 할머니 한 분이 차 뒷바퀴 옆에 벼락 맞은 고목처럼 쓰러져 무릎을 감싸고 아프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장통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난한 행상 할머니 같았다.
“할머니, 많이 다치셨어요?”
떨리는 목소리로 형식적인 안부를 묻고 나서
“병원에 가셔야 하니깐 우선 차에 타세요. 자, 일어날 수 있겠어요?”
하며, 할머니를 부축하여 차 뒷좌석에 태웠다. 상태를 보니 큰 사고는 아닌 것 같아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였다.
그때 교차로의 신호등이 바뀌더니 건널목을 사이에 두고 내 차 뒤에 서 있던 흰색 그랜저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스르르 운전석 차창이 열리더니 한 중년 여성이 머뭇거리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아저씨, 저 할머니 수상해요. 가만히 서 있다가, 갑자기 뛰어들어 부딪힌 거 같았어요.”
휴, 자책감에서 해방될 때 느낄 수 있는 안도감과 함께 덜컥, 자해 공갈범일 줄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란히 손을 잡고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어둠 속에 빛을 비춰준 구세주와도 같은 이 아줌마를 목격자로 확보해두어야 한다는 이성적 판단도 들었다. 그러나 처음 당하는 상황이라 민첩하게 행동하진 못했다.
“아주머니, 전화번호 좀…”
핸드폰을 꺼내 입력하려고 우물쭈물하는 사이
“전, 바빠서 그만…”
전화번호도, 차량 넘버도 입력할 틈도 안 주고, 목격자를 태운 차량은 황망히 시야에서 사라졌다. 닭 쫓던 개, 지붕만 바라보는 꼴이 되었다.
--- 「의혹」 중에서
그녀로부터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이메일이 왔다. 헤어진 지 24년 만의 연락이었다. 이 순간이 오길 얼마나 간절히 기다려왔던가. 사무치는 그리움과 회한으로 얼룩진 세월, 단 한 순간도 잊어본 적이 없는 여인이었다. 그녀를 떠나보내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방황했던가. 비 내리는 저녁이나 눈 내리는 밤이면 자기도 모르게 그녀와의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을 찾아 정처 없이 발길을 옮기기도 하고, 바람 부는 골목 공중전화 부스에서 수없이 망설임의 다이얼을 돌리기도 했다.
딴 여자를 안 만나본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어떤 여자도 사랑할 수 없었다. 그의 영혼은 오르페우스처럼 그녀를 찾아 지옥을 떠돌고 있었다. 결혼 같은 건 하지 않고 평생 그녀를 기다리며 살겠다고 마음먹기도 했다. 17년을 그렇게 보냈다. 그러다가 마흔이 다 되어서야 현실에 투항하여 그녀와는 전혀 다른 족속에 속하는 한 여인을 만나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그런 그에게 그녀로부터 연락이 온 것이다.
--- 「불혹의 강」 중에서
하늘과 땅 위의 모든 짐승이 두려워하는 것
그것을 가질 수만 있다면
독수리의 날개도, 사자의 이빨도 부럽지 않은 것
맹수들의 기습을 따돌릴 수도 있고
언 손발을 녹일 수도 있으며
날것을 익혀 먹을 수도 있고
어두운 밤도 대낮처럼 밝힐 수 있는 것
불!
그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
프로메테우스의 위험한 선물
불과 함께한 따뜻한 세월
어머니 자연의 품을 떠나온 인간은
마침내 숲을 태워 밭을 만들고
진흙을 구워 도시의 성벽을 쌓아 올리고
쇠를 녹여 쟁기와 칼을 만들었다
불길이 활활 타오를수록
문명의 밤은 더욱 깊어갔다
생산은 늘어나도 굶주림은 줄어들지 않고
생활이 편리해진 만큼 고된 노동은 늘어났다
야수의 습격은 물리쳤지만
그보다 더 잔혹한 인간의 습격이 일상화되었다
아득한 저 옛날 프로메테우스는
자연의 그늘에 낮잠 자고 있던 인간에게
달콤한 꿈을 선물했다
빛과 어둠을 구별하는 능력과
빛을 동경하는 욕망과
빛을 지배할 수 있다는 오만을
그러나 그는
빛이 만드는 그늘에 대한 경고를 빼먹었다
프로메테우스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간을 쪼아대는 독수리만이 아니다
정녕 견디기 어려운 것은
인간의 어리석은 불장난을 볼 때마다 느끼는
자신의 경솔함에 대한 뼈저린 후회일 거다
--- 「불[火] ― 만물의 세계사 1」 중에서
그해 봄 진달래는 유난히 붉었다
오월의 맑은 하늘에 마른번개가 치자
서울역 광장의 시민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금남로에 붉은 꽃비가 내렸다는 소문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검은 군홧발에 짓밟힌 캠퍼스엔
살아남은 자의 우수만 낙엽처럼 쌓였다
신문지에 둘둘 말린 워키토키의 잡음
고문실의 신음 마냥 떠돌고
곳곳에 번득이는 눈초리
우린 낮은 목소리로 헤엄쳐 다녔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을 슬퍼하고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토론했다
황홀했던 첫사랑의 낭만은 사치로 여겨져
피어나지도 못한 채 병든 장미처럼 버려졌다
우리들의 청춘은 한겨울 연탄불 꺼진 자취방에서 싹터
화염병의 검은 연기와 함께 날아가 버렸다
멀리서 북소리가 울려왔다
죽은 영혼들이 새 떼처럼 날아올랐다
모두들 거리로 뛰쳐나가 신명 나게 외쳤다
화들짝 놀란 군홧발이 퇴각 나팔을 불었다
하얀 테이블 밑으로 누런 봉투가 오가고
죽은 자의 몫은 산 자가 챙겨갔다
귓전을 울리던 북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외신은 우상의 붕괴를 타전하였고
우린 축하케이크를 엎질러버린 아이처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렇게 우리들의 휴거는 지나갔다
신념이 남긴 상처 위로 세월이 흘러갔다
상갓집 술상에 돌아다니는 얘기 속에서나
다시 만나는 그 시절의 친구들
누구는 사업한답시고 돈 떼어먹고 사라지고
누구는 암으로 저세상 사람이 되고
누구는 이번 선거에 어디서 공천을 받고…
소시민적 일상에 억척스럽게 뿌리내린
한 시대의 느낌표들!
--- 「북소리 9 ― 그 시절의 청춘」 중에서
나의 사랑은
불꽃처럼 찬란하지도
뜨겁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마른 장작을 태우듯
서로를 소모하지도 않고
재만 남기고 사라지듯
허무하지도 않습니다
나의 사랑은 기다림입니다
마른 나뭇가지 적시는 봄비처럼
아낌없이 나눠주고
꽃망울 터질 때까지
기다릴 줄 안답니다
나눠주고 물러서기에
꽃향기로 남을 수 있고
기다릴 줄 알기에 오래 간답니다
나의 사랑은 앞서가지 않습니다
당신이 자리를 잡은 다음
난 거기에 맞출 뿐입니다
당신이 큰 그릇이면
나도 크게 담길 것이고
당신이 작은 그릇이면
나도 작게 담길 것입니다
앞서가지 않기에
다툴 일도 없고
낮은 곳에 임하기에
미움받을 일도 없답니다
사람들은
불꽃 같은 사랑에
데어본 연후에야
나의 사랑법을 알게 되겠죠
이 늙은이의 사랑법을
--- 「물의 노래 1 ― 사랑법」 중에서
볼가강의 검푸른 물결이 넘실대는 밤이다
낡은 레코드판에서 백만 송이 장미가 피어난다
난 빛바랜 보드카 잔을 넘기며
한 여인의 조각난 삶을 맞춰본다
한겨울의 자작나무처럼 늠름한 스물한 겹의 청춘을
낮에는 대학 강의실에서 푸시킨을 읽는 청순한 따찌야나
밤에는 호텔 로비에서 욕망을 흥정하는 요염한 나타샤
TV 화면에 비친 자본주의의 신기루를 좇아
벤저민 프랭클린의 초상화와 우윳빛 살결을 교환하는 도플갱어
삼 분의 일은 눈감아준 자에게
삼 분의 일은 울타리 친 자에게
나머지 삼 분의 일로 달러 숍을 기웃거리는 허기진 눈동자
언젠가 내게 말했었지, 이 나라에선
모두가 봉급을 받지만 일하는 사람은 없다고
일하는 사람은 없어도 생산량은 초과 달성이고
생산량은 초과 달성이어도 상점에 물건이 없다고
…….
그녀의 푸념이 귓전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모스크바엔 때아닌 폭설이 몰아쳤다
수많은 영웅 동상들이 눈에 파묻혀 동사하였다
붉은 광장엔 삼색기가 교수대의 밧줄처럼 내걸리고
프라우다 신문은 소비에트연방의 자살을 보도하였다
자본주의는 나타샤의 치마 밑에서 번식해갔지만
따찌야나의 꿈은 콘돔에 갇힌 정액처럼 버려졌다
노동은 사회주의적으로, 소비는 자본주의적으로
하고 싶다는 철부지의 꿈은 시궁창으로 흘러갔다
계절은 낡은 레코드판처럼 잘도 돌아가는데
그 사이사이로 수백만 송이 장미가 피었다 지고
다시 피어나고 있는데, 푸른 종소리로 푸시킨을 낭송하던
따찌야나는 어디에…
모래알처럼 흘러내린 시간 더미 위엔
나타샤만 홀로 앉아 있는데,
한겨울의 자작나무처럼 늠름하던 따찌야나는 어디에…
--- 「따찌야나」 중에서
구름도 쉬어가는 와운(臥雲)마을 푸른 하늘 아래서
난 추억하네, 겁 없이 태양을 향해 비상하던
이카로스의 시절을
그때 난 가진 게 없어도 행복하고
두려운 것도 없었지
허기진 짐승처럼 앎을 찾아
깨알 같은 글 속에서 헤매고
불의와 마주치면 사자처럼 포효하고
연민 앞에선 사슴처럼 눈물 흘렸지
내일은 안개에 싸인 미지의 숲이었지만
확신에 찬 이념의 사냥꾼에게
모든 것은 명료했다네
세월이 흐르고, 세상은 변하고
내 인식의 창에 드리워진 우상의 커튼이 걷히자
황금빛 방패와 창처럼 빛나던 이념은
해빙기 오후의 잔설처럼 녹아내리고
갈 길 잃은 사냥꾼은
욕망이 꿈틀거리는 도시의 바다로 떠났다네
일상의 바다에 닻을 내리고
성공의 꿈을 낚아 올리던 어느 날
알 수 없는 운명의 파도에 휩쓸려
육신은 산산조각이 나고
영혼은 새가 되어 자유를 얻었다네
그제야 난 알았네
초월의 고상함도, 밥벌이의 지겨움도
기실 동전의 양면이라는 걸
벼랑 끝에서 잡은 삶의 끈을 놓아버릴 때
자신을 옭아매었던 모든 포승줄이 풀리고
바람처럼 자유롭게 비상할 수 있다는 걸
난 감사한다네
지루하지 않은 인생을 살도록 도와준 운명에 대해
그리고 스쳐 지나간 모든 인연에 대해
--- 「자화상」 중에서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목마른 손짓
두 사람 밀고 당기며
정열을 불사르지만
하나 되지 못하는 어긋남의 박자
어긋나기에 애절한 두 사람
화려한 리듬에 맞춰 허공을 그리는
정열의 슬픈 몸짓
사랑한 것일까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대를 사랑하는 것일까
사랑을 사랑하는 것일까
탱고,
다가가면 멀어져가고
돌아서면 다가오는 유혹
혹은
놓았다 다시 잡는
인연의 아스라함
우리, 탱고를 춰요
유혹받고
버림받은
저 기만의 세월을
지그시 밟으며
--- 「탱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