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문장: 나는 동물을 사랑하지 않는다.
모든 동물이 인간과 똑같다고 선언하자는 게 아니다. 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인간과 다른 동물 종과의 차이로 인해 동물들에게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것은 더 이상 정당화될 수 없다. 어떤 권리인가? 앞으로 논의해 나가야 할 것이다. 내 생각에는 네 가지 기본 권리가 필요하다. 인간은 더 이상 동물을 먹거나, 가두거나, 고문하거나, 상업화해서는 안 된다.
--- p.9
첫째, 감각 능력을 지닌 살아 있는 존재를 단순히 〈자원〉으로 여길 권리가 여전히 인간에게 있는가? 둘째, 인간이 특정 동물의 운명에 대해 다른 동물보다 더 격앙하는 것이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소, 돼지 심지어 닭, 토끼, 양 그리고 수많은 동물은 인간이 그들에게 가하는 대로 고통당해야 하는가?
--- p.29
즉, 당신은 종차별주의자이거나 반종차별주의자다. 여기에는 중립항이 없다. 둘 중 어디에 속할지는 우리의 행동에 달렸다. 서구 사회는 대부분 종차별주의적이지만, 그 안에서도 종차별주의의 도그마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적지만 점차 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스스로를 〈반종차별주의자〉라 칭한다. 이 책의 제목 또한 조금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나는 반종차별주의자다.
스페시즘, 즉 종차별주의는 자신이 어떤 종에 속한다는 이유로 다른 동물에게 차별을 가하는 일체의 행위를 가리킨다. 종차별주의는 두 가지 차원으로 나타난다. 첫째, 종차별주의자는 인간이 아닌 동물의 고통은 인간의 고통보다 덜 중요하다고 단정한다. 둘째, 종차별주의자는 근거 없는 범주를 만들어 반려동물, 식육 동물, 취미 동물, 야생동물, 해로운 동물, 보호 동물, 혐오 동물 등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이러한 지위의 차이에 따라 동물 종을 스스럼없이 차별적으로 대한다. 모두가 똑같이 인식 능력, 생리적 욕구, 고통과 기쁨을 느끼는 능력을 지니는데도 말이다.
--- p.29~30
아무리 절세미인이라도, 자신의 미모에 대해 결코 자만해서는 안 된다. 그녀가 공들여 자신의 몸을 가꾼다고 해도, 아름다운 외모는 자신의 공으로 얻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동물을 어리석거나 못생겼다고 평가하며 무시하고 학대할 때,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없는 약한 존재에 대해 최대한의 관대함을 지녀야 한다.
--- p.82
고기 광고는 동물 사육에 대한 가공된 이미지를 담고 있다. 보통 광고 속 닭, 돼지, 소 들은 마음껏 자연을 누비는 믿기 힘들 정도로 행복한 존재다. 이들은 오직 우리의 접시에 얼른 놓이기만을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 p.91
고기 소비를 촉진하려는 정부의 입장은 정치적?경제적 이유로 설명된다. 농업 종사자들을 달램으로써 가장 중요한 경제 영역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는 것이다. 프랑스는 유럽 내 소 생산 1위, 유제품 생산은 독일에 이어 2위를 차지하는 농업 강국이다.
--- p.101
그런데 오늘날 서양에서 가장 선호하는 반려동물인 개와 고양이도 역사적으로 항상 사랑받는 대상이었던 것은 아니다. 프랑스와 독일에 지난 세기까지도 개고기를 파는 정육점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 p.127
동물 윤리학은 요약하면 개별적 비인간 동물에 대한 인간의 도덕적 책임에 관한 연구다. 정확히 말해서, 동물 윤리학은 종이 아니라 개체로서의 동물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강조한다.
--- p.146
동물 윤리학은 이미 정해진 정답지를 제시하는 독단적인 학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제 막 펼쳐진 성찰의 장이다. 따라서 반종차별주의자들이 서로 동의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인간에게 감수성을 가진 모든 동물에 대한 의무가 있다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하지만, 의무의 성격을 두고 입장이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바로 복지론과 폐지론이다.
--- p.148
한편, 싱어는 동물에게 고통을 가하지 않는 것이 확실하다면 사육과 도살도 용납하기에 생명 그 자체를 신성하게 보지는 않는다. 싱어는 절대적으로 동물권에 기여했고, 그의 책 『동물 해방』은 40년 전에 이미 동물권 보호 운동의 논거를 마련했다. 그의 의견은 반드시 참조해야 할 기준이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치가 있다. 하지만 싱어가 보인 두 가지 입장은 내게 의문의 여지를 남긴다. 나는 다른 생명보다 더 가치 있는 생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생명은 특정 조건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그 자체로 신성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 p.160~161
또 다른 이유인 먹는 즐거움, 〈고기는 정말 맛있어, 난 고기를 사랑해〉. 하지만 이 또한 도덕적 관점에서는 성립될 수 없는 근거다. 어떤 행동도 즐거움이라는 이유만으로 정당화될 수는 없다. 연쇄 살인범은 사람들을 죽이면서 희열을 느낀다. 강간범은 강간을 쾌락으로 삼는다. 하지만 법정에서는 이들 모두 용서받지 못한다. 극단적인 폭력 상황과 비교할 것도 없이, 일상에서도 개인적 즐거움만으로는 정당화될 수 없는 수많은 상황이 있다.
--- p.179
먹는 순간은 즐거워야 한다. 간디는 성적 금욕 또한 필요하다고 했으나, 그리 적절한 것 같지는 않다. 비거니즘은 자기 조절이 필요한 이념이지만, 금욕주의는 아니다. 오히려 채식 요리법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놀라움으로 가득한 감각의 향연이다. 우유와 달걀조차도 과자를 음미하는 데 전혀 손색없는 식물성 재료로 대체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달걀흰자 거품은 병아리콩즙으로 대체할 수 있다. 정말 그렇다! 내가 직접 만들고, 맛을 보고 만든 머랭 쿠키는 완벽했다. 맛을 보여 준 유명 파티시에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채식 요리법은 끊임없이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하고 발견하며 눈부시게 성장하고 있다.
--- p.182
오늘날 동물법은 이와 같은 모순과 오해 속에 놓여 있다. 동물법은 동물을 위하는 취지 같지만, 실제로는 동물에 대한 인간의 이익에 유리하게 제정됐다. 논리적으로는 동물의 감각 능력만을 고려하여 동물의 권리를 강조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동물에게 부여하는 유용성만이 고려된다. 어떤 개나 고양이의 생명은 우리가 그 동물과 애정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가치가 있다. 반려동물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다는 유용성 때문에 보호받는 혜택을 누린다. 유럽 문서들에 정의된 사육동물 복지 기준은 구금 상태가 고통을 초래하여 생산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는 범위 내로 한계를 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 기준들은 종종 무시된다.
--- p.193
나는 비인간 동물을 인간 사회에서 떼어 놓으려는 생각에는 반대한다. 모든 종을 하나로 연결하는 생물학적 연계성에도 맞지 않고, 자연에서 서로 다른 종들 사이에 분명히 존재하는 협력과 공생 관계에도 어긋나는 생각이다. 모든 동물을 자유롭게 풀어 보자. 그들 가운데 몇몇은 금방 다시 인간에게로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이는 대단히 반가운 소식이다. 인간이 다른 종들보다 우월한 종이 아니라는 증거 중 하나일 테니 말이다.
--- p.201
어느 누구도 완벽하지 않다. 다만 우리는 언제나 지금보다 더 잘할 수 있다. 그러나 진영에서 벗어난 이들을 단두대로 보내고, 자신들은 순결의 증표를 얻으려는 동물 권리 운동가들은 잘못된 길을 택한 것이다. 동물 착취에 맞서 싸우는 모든 사람은, 그 사람의 말과 행동에 대놓고 모순이 있지 않는 한, 모두 인정받을 가치가 있다. 채식주의자나 플렉시테리언*의 약점을 지적하기 전에, 무관심한 육식주의자들에 비해 그들이 기울이는 노력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또한 오랫동안 혀에 각인된 미각을 하루아침에 버리기가 쉽지 않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 p.205
더 나아가 순결한 비건이 아니라고 다른 이들을 공격해대는 극단적인 행동가들은 사실은 종차별주의적이다. 동물 권리 보호 운동에는 실제로 온건한 이들부터 가장 급진적인 이들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그런데 관용이 없는 일부 급진주의자는, 자신들이 남들보다 더 지적이고 더 감수성이 있는 우월한 존재처럼 행세하며 다른 사람을 무시한다. 이런 태도야말로 뭔가 생각나게 하지 않는가? 반종차별주의자는 차이를 무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차이를 인정한다. 물론 그 출발은 인간에서부터다.
--- p.207
동물권 투쟁은 약하고 힘없는 자들을 보호하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일이다. 여기에는 경계가 없다. 부당함과 폭력이 지배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저항하고 맞서는 것은 당연하다.
--- p.221
오늘날 언론에 등장하는 지식인 중에 누가 동물 윤리, 자연 또는 전쟁이나 노동에 대해 진지하고 혁신적인 성찰을 보여 주는가? 우리 시대에 맞는 새로운 모델을 제안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은? 없다. 텔레비전과 라디오가 마이크를 건네는 이들은 대부분 이에 대해 언급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자기 자신을 알리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그들은 단순하고, 단순화시키며, 우리 감각 촉수를 자극하는 담론의 효과를 알고 이를 이용한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가져다주기 위해 전쟁에 나서야 한다! 우리에게는 이민자 문제가 있다! 우리는 프랑스의 가치를 잊어버렸다!〉 이런 진부하고 또 사실에 반하는 주장들도 진지한 태도로 아는 척하며, 종종 왜곡된 문학적 인용과 교훈이 될 만한 역사적 사건의 연대를 인용해서 부드럽게 포장하기만 하면 충분하다!
--- p.237
알렉시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의 분석에 따르면, 부러움은 이론적으로 모두의 사회적 진보를 가능하게 하는 민주적 제도에 의해 고취되는 감정이다. 이제 개인들은 자신을 남과 비교하고, 자신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고 여긴다. 즉, 우리는 상사의 배려 부족, 너무 낮은 임금, 주어지지 않는 기회 등을 아쉬워한다. 모두는 일반적으로 자신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고, 옆 사람보다 더 대우받기를 바라며 다른 사람과 동등해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게다가 소비주의 이념은 소수 기득권 집단과 동일시하는 재화를 소유함으로써 대중과 구별되도록 자극한다. 우리는 암암리에 불평등한 시스템을 지지한다. 시스템에서 이득을 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가장 단적인 사례는 학교 교육에서 나타난다. 평등한 구조를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들의 자녀를 최고 명문 학교에 진학시키기 위해 학군을 변경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많은 사람은 말로는 사회적 다양성을 인정하지만 실제로 현실에서는 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 p.272
인간이 자신에게 유익하도록 자연을 이용한다는 사실 그 자체를 비난할 순 없다. 이는 생명을 누리는 모든 존재에게 부여되는 원칙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자연을 이용하는 과정이 극단적 파괴 수준까지 치달을 만한 인지 능력이 있다는 것이 문제다. 이는 이용을 넘어선 착취다. 어쨌든 이런 이유로 미루어 기술은 우리를 자연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고, 자연의 구속 아래 머물도록 한다.
--- p.3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