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마음은 어디에 위치해 있나요?
--- 「마음의 뒷문」 중에서
‘글을 쓰는 행위’는 누구나 할 수 있다. 너무나 손쉽게. 컴퓨터 메모장을 열어서 마구 휘갈길 수도 있고, SNS나 글쓰기 플랫폼을 통해서 기록할 수도 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쓰지 않는, 자기 자신을 성찰하기 위한 도구로써 글을 쓰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글을 쓰는 사람들도 매우 멋진 작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유명하든, 유명하지 않든, 어찌 됐든 첫 책을 출간하고 소중한 노동의 대가를 지급하여 책을 구매해준 독자가 단 한 명이라도 존재하는 나로서는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서만큼은 민감하고 진지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이 순간, 글을 쓰는 이유에서만큼은 다시 한번 솔직하게 답하련다.
--- 「왜 글을 쓰시나요?」 중에서
묻고 싶다.
누군가와 관계를 만들어나갈 때, 상대를 재지 않고 오롯이 순수하게, 마치 유치원의 놀이터에서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어린아이들처럼 ‘서로’를 궁금해하는 대화를 하고 있는지. 친구 관계든, 이성 관계든, 아마도 그건 참 쉽지 않을 거다. 압박감과 조급함에 허덕이는 현대사회 속, 과정보다는 이득이 전부인 결과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시간 속, 우리는 누군가와 관계를 처음 맺을 때조차도 끊임없이 무게를 재는 저울이 되어버리고 만다. 외모, 학벌, 경제력, 학연, 지연, 혈연 등등, 아마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더 많이 나오겠지. 물론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재는 것이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니다. 만약 평생을 함께하는 관계라면 어느 정도 재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고도 순수한 ‘욕구’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 선상 위에 ‘올바른 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 「당신은 ‘ ’을 좋아하세요?」 중에서
후회는 해야 한다. 아니, 사실 ‘해야 한다.’라는 문장이 어긋날 정도로 누구나 삶에서 후회할 수밖에 없게끔 인간이란 동물은 설계된 것 같다. 그러나 마치 그 사실을 모른 척하듯, 후회라는 단어를 주변에서 혹은 누군가 꺼낼 때마다 금세 후회 자체를 부정하는 격언들이 뒤따라온다. 그 수많은 명언(?) 혹은 격언들은 대부분 비슷한 자세로 후회를 대하는데, 보통 “후회는 절대 하면 안 된다.” 혹은 “삶에서 후회는 가장 쓸데없는 것”이라며 찌푸리는 표정으로 마주한다.
--- 「후회는 마음껏 해야지」 중에서
천성이 착하지 않은 내 눈으로 세상을 본다면 이 세상은 불공평할 따름인데 (원래 세상은 불공평한 거라지만) 그저 한없이 착하게 사는 이들을 볼 때마다 이 세상에 정말 천사가 있구나, 하는 마음에 때론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와 동시에 스스로가 부끄러워지는 것은 마음의 덤이자 짐이지만. 그 부끄러움에 숙연해지는 마음이 쌓이는데도 불구하고, 이번 생 속에서 여전히, 나는 완벽하게 착한 이로 살거나 혹은 그런 척을 꾸준히 하며 사는 것이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 「착하거나 척하거나」 중에서
만약 전생이 사물로도 존재할 수 있다면 나는 영혼을 서리는 도구이지 않았을까.
위대한 작가의 펜이라던지
위대한 화가의 붓이라던지
위대한 음악가의 악기라던지 하는.
--- 「연혼이 서려질 때」 중에서
저처럼 관계에 지쳐 쉬고 싶은 이들이 가지는 혼자만의 시간을 세상 모든 이들이 조금이나마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그득한 생각을 합니다. 노력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라는 것에 지쳐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쉬고 싶은 사람들도 존재한다는 것을. 그 지쳤다는 사실을 알아주고 기다려 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평생 보답하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함과 동시에 마음 한편이 처연해지니 아직은 갑보다는 을이 편한 사람인가, 하며 혼자만의 밤을 보내 봅니다.
--- 「관태기」 중에서
다 내려놔.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편해.
마음속의 절대 채워지지 않는 텅 빈 한 공간은 살면서 내내 허할 거야.
그 공간 사이로 살면서 삶의 상처들이 왔다 갔다 하는 거고.
돈, 명예, 이성, 타인의 시선들에 담금질한 것들 말고
네가 원하는 것들로 남은 나머지 공간 채우면서 살자.
그냥 다 내려놔. 정말 다 내려놔. 그럼 돼.
--- 「●」 중에서
나는 외로울 때면
중경삼림을 늘 껴안았다.
내 삶 속
채워지지 않는 공간을 채워주는 건
영화 ‘중경삼림’이었다.
--- 「중경상림 part 1」 중에서
드라마 ‘연애시대’가 떠오른다. 극 중에서 슬픔으로 가득 찬 여주인공이 피클 통의 뚜껑이 열리지 않자, 낑낑거리다 이내 던져버리곤 오열하는 장면. 사실 별거 아닌 피클 통 뚜껑을 연다는 행위가 자신이 참아왔던 슬픔의 한에 촉매제로 묻히고 쌓여 한순간에 터져버린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의 슬픔이 생각지도 못한 장소와 행동에서 터져 나오는 순간을 때때로 보게 되거나 직접 겪게 된다. 특히 스스로, 나 자신도 모르게 그런 감정을 표출할 때, 꽤 당황스러움을 느끼며 나에 대해 그동안 무지했음을 깨닫는다. 내가 이토록 내 마음을 달래주지 않고 살아왔나, 하면서. 그러니 살아가는 내내 내 마음속 슬픔의 양을 자주 확인해야 할 듯하다. 슬픔의 양이 넘쳐나 내 마음의 그릇을 깨지 않도록.
--- 「울음에 관한 강렬한 첫 기억」 중에서
이러한 시스템을 만든 창의력과 자본력에 감탄을 자아내다가 문득 나 말고도 별다방 기프티콘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한 사람이 있지 않을까 곰곰이 생각한다. 애매하고도 모호한 관계. 이 문장이 혀 속에서 자꾸 맴도는 걸 보면 분명 나 말고도 많으리라. 그런데도 왜 수많은 사람은 별다방 기프티콘을 선택하는 것일까. 단순하게 그 브랜드가 가진 장점과 메뉴의 특성 때문에 구매하는 이도 있겠지만, 분명 애매한 관계에 하는 최소한의 성의 표현이 저 그럴듯한 기프티콘을 선택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 「별다방 기프티콘을 준다는 것은」 중에서
내가 느끼는 이러한 목 넘김을 나 혼자만 느끼는 것일까. 아마 아닐 거다. 현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든지 기댈 곳과 것을 찾고 있으니까. 묵묵하게 세상과 어울리는 척을 하며, 잠시의 망각을 도와주는 것으로 자신을 외면하며 슬픔을 억지로 짓이겨 삼켜낸다. 누구나, 하루하루, 마치 햇볕에 바짝 말린 고구마 덩어리를 목에 억지로 쑤셔 넣듯.
문제는 그렇게 한참을 살아가다가 정말 나도 모르게 사소한 것으로, 뽁 혹은 딸깍, 혹은 찔끔, 하는 약간의 건드림과 시발점으로 인해 모든 것이 터지는 날이 가끔 존재한다는 것. 그럴 때면 온몸의 세포들이 비상사태에 접어든다. 마치 혈관 하나하나가 칼에 난도질당한 것처럼.
--- 「슬픔을 삼키는」 중에서
이 부족한 영혼을 지닌 나의 글을 봐주시는 당신의 영혼은 참 아름답다는 말.
그저 아름다운 영혼으로 보아주셔서 감사하다는 말.
--- 「마음의 정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