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가지 문제는 1970년대에야 대두했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위협적이다. 인문학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젊은이들이 교사로서 일자리를 찾기가 갑자기 거의 불가능해진 것이다. 여기에는 주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1940년대의 출생률 급증이(즉 베이비 붐이) 지속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1960년대 내내 이루어진 단과 대학과 종합 대학의 급속한 성장이 갑작스레 중단되고 말았다. 한때는 교사가 부족했기 때문에 훌륭한 대학원생이라면 박사 학위 과정을 다 마치지도 않은 상태에서 높은 봉급을 주겠다는 초빙 제안을 받았지만, 그 시기가 지나자 새로운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둘째로 지난 사반세기 동안 워낙 많은 자리가 (종신 재직권을 부여하는 교수 직위도 포함해서) 젊은 사람들로 채워졌기 때문에, 은퇴로 생기는 빈자리가 드물어졌기 때문이다.
--- p.11
이른바 지식이란 그 자체로 보상이라는 둥, 그리고 진리가 이끄는 곳 어디든지 따라간다는 둥 상투적 표현은 자칫 우선순위라는 중대한 질문을 무시해버리고 만다. 지식이라고 해서 항상 동등한 보상을 내놓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미국 부통령 후보로 나섰다가 낙선한 사람의 비서의 아버지에 관한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 몇 년을 허비하라며 학생과 교수를 독려하지 않는다.(이제는 일부 학자가 실제로 연구하고 있지 않을 법한 주제의 사례를 생각해내는 것도 더 이상 쉽지 않은 지경이다.)
--- p.16
1930년대에 독일 대학은 순수 전문가주의의 도덕적 파산의 완벽한 패러다임이 되었다. 당시의 주도적인 독일 현학자 상당수는 사회의 믿음과 도덕과 정치에 대해 질문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어쨌거나 그것은 그들의 직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봉급을 받는 이유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국제적으로 유명한 현학자들인 그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학생들은 교육을 덜 받은 동료 시민들보다 오히려 더 무비판적으로 나치 국가의 새로운 믿음과 도덕과 정치에 열광했다.
--- p.60
미국에서 그 전환점은 2차 대전 이후 매카시 시대와 겹쳤는데, 그 시기에는 합의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위험하게 되었다. 따라서 점점 더 학술적이 되는 편이 오히려 더 안전해졌다. 슬픈 이야기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소심한 타협주의자였다. 그중 상당수는 학교가 다른 곳보다 더 많은 안전과 아울러 보호된 환경을 제공해주기 때문에 굳이 가르치는 일을 택했다. 공부를 마치고 나서도 학교를 떠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 p.72
대부분의 학교들은 자기네 학생을 ‘선별하려’ 했고 이를 위해 경쟁시험을 이용했다. 그리하여 신속하게 전체 교육 시스템이 변화했다. 새로운 교사가 다수 필요해졌으며, 교직원의 채용과 승진에 어느 때보다도 훨씬 많은 사람이 갑자기 관여되었다. 수많은 사람에 대한 신속한 가치 평가를 돕기 위해 모든 층위에서 정량 측정이 필요해졌다. 따라서 시험과 간행이 어느 때보다도 더 중요해졌다.
--- p.255~256
미국에서는 국립과학재단의 설립과 아울러 교수들에게 연구 보조금을 지급한다는 국방부의 결정이 이런 경향에 추진력을 더해주었다. 보조금을 받은 과학자들은 더 많은 수입과 위신을 얻었으며, 심지어 인문학 교수들도(특히 철학에서) 인문학적이기보다는 오히려 과학적으로 보이는 프로젝트를 제안할 경우에는 국립과학재단이나 국방부의 보조금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금세 발견하게 되었다. 그 결과 젊은 학자들 가운데 명석하고 진취적인 이들이 인문학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 p.260
선견자는 외톨이다. 자기 시대의 상식으로부터 소외된 상태에서 이들은 세계를 다르게 바라보고, 자신의 선견을 상술하려고 지속적으로 시도한다. 이들은 대개 기존 언어가 부적절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종종 심각한 의사소통의 문제를 직면한다. 반면 현학자는 여러 학교를 돌아다니고, 자기네 엄밀성과 전문가주의에 자부심을 가지며, 자기네 합의나 공통적인 ‘요령’에 크게 의존한다. 이들은 보통 동시대의 선견자에게 적대적이며, 특히 자기 분야의 선견자를 그렇게 대하는 반면 과거의 일부 선견자를 오히려 신봉한다.
--- p.25
인문학 분야의 수많은 교수와 학생들은 ‘과학’을 모범으로 받아들이는 한편, 누적적 진보에 대한 실증주의적 믿음을 여전히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괴테는 자신의 과학적 발견이 시인으로서 자신의 작품과 완전히 다르지는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양쪽 모두 선견과 관계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괴테가 고안했던 과학사란 과학을 인간의 맥락에 놓았기 때문이었다.
--- p.32
현학자 간의 합의는 학파마다 현저히 다르지만 대개는 불관용적이게 마련이다. 규칙이 지속적으로 의문시되면 게임에 집중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현학자가 들어가서 다양한 퍼즐을 풀기 위해 노력하는 전체 틀을 의문시하는 사람이 바로 선견자다. 또는 아인슈타인의 비유를 좀 더 발전시켜 설명하자면, 덩굴 식물이 기어올라 번성하는 나무를 베어 넘어트리기 위해서 미리 표시하는 사람이 바로 선견자다.
--- p.38
소크라테스는 현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외톨이였고, 당대의 상식에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자신의 선견을 상술하려 하지는 않았다. 그는 선견자가 되지 않는 것을, 그리고 사실상 반(反)현학자가 되는 것을 핵심으로 삼았다. 그는 당대의 믿음과 도덕을 검토했고, 합의에 대한 무비판적인 의존에 근거한 지식의 주장을 조롱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심지어 가장 유명한 교사들, 정치인들, 대중적 예언자들도 포함해서) 얼마나 무지하고 혼미하고 잘 속는지를 보여주려 애썼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세 번째 유형을 체화한다.’
--- p.43
‘언론인을 네 번째 유형으로’ 정의하는 것은 유용할 수도 있다. 문자적 의미대로 이해할 경우 언론인은 당일치기로, 즉 즉각적 소비를 위해 글을 쓴다. 자신의 상품은 내일이면 김이 빠져버릴 것이기 때문에, 지금 팔리지 않으면 결코 팔리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언론인에게는 방대한 연구를 위한 시간이 없고, 현학자의 엄밀함 선호 취향이 없다.
--- p.44
힐튼 호텔에 머물면서 단지 창밖을 내다보기만 하는, 또는 공항에서 그곳까지 오는 도중에 충분히 구경했다고 자처하는 여행자라면, 실제로는 이렇게 멀리까지 여행을 무릅쓸 만한 가치까지는 없었다고 서슴없이 장담할 것이다. 그는 항상 전적으로 잘못된 뭔가를 발견할 것이며, 종종 어느 정도 설득력 있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우리의 우월한 기술을 보유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문화 충격을 회피하는 훌륭한 방법이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에서 끝나버린다면 이국적인 장소를 찾아가고 진정으로 다른 문화를 방문하는 여행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런 태도로 플라톤을 읽어보았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p.104
우리가 읽는 저자를 향한 또 다른 태도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하고, 저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는 약간의 지력을 갖고 있고, 저자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우리는 공통의 추구에 참여함으로써, 그리하여 너로서의 텍스트의 목소리에 직면함으로써, 몇몇 오류를 초월하려 시도할 것이다.’ 앞서 말한 주해적, 독단적, 불가지론적 접근법과 비교해서 이 네 번째 접근법을 지칭하는 한 마디가 있다면 유용할 듯하다. 약간의 불안도 없지는 않지만, 나는 이를 ‘변증법적(dialectical)’ 접근법이라고 부를 것이다.
--- p.107~108
우리는 반드시 텍스트가 우리에게 말을 걸도록 허락해야 하며, 텍스트의 남다른 목소리를 경청해야 하고, 그 목소리가 다른 목소리와 어떻게 다른지 구분하려 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텍스트가 우리에게 도전을 제기하도록, 충격을 주도록, 거스르도록 허락해야 한다.
--- p.113
저자와 독자와는 별개로, 서평에는 두 가지 핵심 인물이 관여한다. 바로 편집자와 서평가다. 편집자의 역할은 중대하다. 편집자는 자기네 지면에 어떤 책 서평을 할 것인지, 누가 할 것인지, 얼마나 걸릴 것인지, 언제 게재할 것인지, 얼마나 두드러지게 게재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 p.145
학생들이 사용할 목적으로 제작된 번역은 원래 작품에 관한 논의의 토대로서 기능하도록 설계되어야 마땅하다. 즉 저자의 어조와 의미, 남다른 목소리를 포착하려 노력해야 한다. 번역자의 주된 임무는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저자의 목소리가 들리게 만드는 것이다. 만약 번역자가 화려한 문체를 무디고 지루한 표현으로 바꿔놓는다거나 저자가 말하지 않은 내용을 말하도록 만든다면, 번역자는 저자에게 제대로 봉사하지 못하는 셈이다. 예를 들어 포크너 같은 어려운 저자라든지, 또는 『피네건의 경야』 같은 수수께끼 같은 작품을 마치 신문처럼 읽을 수 있는 손쉽고도 진부하고도 언론인다운 산문으로 바꿔놓을 경우, 번역자는 독자를 오도하는 셈이다.
--- p.157
『톰 소여의 모험』은 분명히 고전이지만, 만약 윌슨의 말이 사실이라면 편집자들이 작업한 것 대부분이야말로 사소하고도 불필요한 것임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윌슨에 따르면, 편집 과정에서 열두 명 이상이 동원되어 『톰 소여의 모험』을 뒤에서부터 읽어나갔는데, 그래야만 그 책의 의미나 문체에 의해 정신이 산란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폴리 이모(Aunt Polly)’가 어디서는 대문자 A로 시작되고 어디서는 소문자 a로 시작되는지 그리고 의성어 ‘슈욱(ssst)’의 s가 어디서는 세 개이고 어디서는 네 개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 p.172~173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런 일을 시작하기 전에 목적이 무엇인지를 물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작품이 워낙 중요하거나 여러 판본의 차이가 워낙 중요하므로 학생들이 상이점을 고려하지 않고 텍스트를 공부해서는 안 된다고 느낄 만한 이유가 있을 때, 결과물이 가독성이 떨어지거나 터무니없이 비싸다면 그 판본의 목적은 실패한 셈이다.
--- p.175
학제 간의 접근은 위험하지만, 사랑을 비롯해서 우리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모든 것이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 p.235
단어 하나, 문장 하나, 페이지 하나, 이야기 하나, 책 한 권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승리다. 글을 쓰고, 편지를 보내고,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고, 외국어를 하는 사람의 말을 이해하는 것. 이런 것들 역시 승리다. 물론 편지를 쓰는 것, 그리하여 멀리 떨어진 누군가와 의사소통할 수 있는 것도 전화의 시대에 와서는 과거보다 훨씬 덜 짜릿하며, 글쓰기의 기술도 저하되고 있다. 그러나 학교는 오로지 배움으로써 구출될 수 있고, 배움은 규율과 분리될 수 없으며, 배움은 승리의 짜릿함과 분리되어서도 안 된다.
--- p.243
몇 달이 아니라 몇 년 안에 학생 대부분이 세부 사항 대부분을 잊어버리게 될 것이 분명하다. 교수는 이들에게 여생 동안 남아 있었으면 하는 내용이(만약 그런 게 있다면) 무엇인지를 스스로 질문해야 한다. 만약 한 친구가 몇 분 안에 물구나무서는 법을 가르쳐준 덕분에 우리가 그때 이후로 물구나무설 때마다 그 친구를 생각할 수 있다면, 한 학기 동안 최소한 몇몇 학생들에게는 그들이 기꺼이 잊지 않을 법한 뭔가를 가르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 p.295~296
모든 텍스트는 맥락이 있다. 위대한 희곡이나 소설의 맥락은 순수하게 문학적이지 않다. 철학 고전의 맥락은 전적으로 철학적이지 않다. 종교 경전의 맥락은 단지 종교적인 것만이 아니다.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의 맥락은 단지 다른 그림들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문학이 상호 침투한다고 말하는 것은 자칫 오도하는 셈이 될 것이다. 차라리 이를 학과로 나누려는 모든 시도가 인위적 경계선을 낳을 가능성이 있음을 깨닫는 것이 오히려 핵심에 더 가까울 것이다.
--- p.297
자국의 박식한 시민을 자랑하며, 투표와 배심 제도에 근거해 구축된 여러 국가에서, 학생이 재판을 방청해보거나 교도소를 방문한 적도 없는 상태에서 온갖 종류의 학위를 얻을 수 있고, 교육받은 사람으로서만이 아니라 교사로서의 자격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심지어 하룻밤을 교도소에서 보내는 경험조차 하지 않은 채 법관이 되어서 징역형을 선고할 수도 있다.
--- p.303
이렇다 보니, 현대의 도시 병원에서 유일한 만능인은 환자뿐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현대 대학에서 유일한 만능인은 학부생뿐이다. 이는 반드시 변해야 하며, 인문학은 이런 변화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 p.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