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진 한강교에서
그날,
나는 기억에도 없는 괴기한 환상에 잠기며
무너진 한강교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이미 모든 것 위에는 낙일(落日)이 오고 있는데
그래도 무엇인가 기다려지는 심정을 위해
회한과 절망이 교차되는 도시
그 어느 주점에 들어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의 비극의 편력은 지금부터 시작된다.
취기에 이즈러진 눈을 들고 바라보면
불행은 검은 하늘에 차고,
나의 청춘의 고독을 싣고
강물은 흘러간다.
폐허의 도시 〈서울〉
아, 항구가 있는 〈부산〉
내가 갈 곳은 사실은
아무 데도 없었다.
죽어간 사람들의 음성으로 강은 흘러가고
강물은 흘러가고,
먼 강 저쪽을 바라보며
나는 돌아갈 수 없는 옛날을 우는 것이다.
옛날.
오, 그것은 나의 생애 위에 점 찍힌
치욕의 일월(日月)
아니면 허무의 지표, 그 위에
검은 망각의 꽃은 피리라.
영원히 구원받을 수 없는 나의 고뇌를 싣고
영원한 불멸의 그늘 그 피안으로
조용히 흘러가는 강.
(1958. 10. 자유문학)
*1956년 동국시집 제5집에 발표될 당시는 ‘인천’으로 되어있었으며, 작품 제목 또한 〈한강교에서〉였다.
--- p.10
------------------------------------------------------------------------------
기다림
끝내 이 자리에
화석하고 말 나의 자세였다.
그 날, 그토록
격리된 거리에서 너를 부르며
초롱초롱 안타까운 눈을 뜨고 있는 나
기다림은
동결된 슬픔이 스스로 풀려나는 것은 아니다.
일모(日暮) ――
그러한 시기였다.
어디메 홍수와 같이
해일(海溢)과 같이 다가오는
절박한 시간이었다.
(1953. 12. 동국시집 제2집)
--- p.23
------------------------------------------------------------------------------
깃발도 없이
저마다 허물어져
소리 없는 뭇 형상 위에
오늘도 나는 살아가야만 했다.
하늘 높이 나부껴 오르는
깃발도 없이
바람과 더불어 어디론지
떠나갈 수 없는 나의 운명은
권태에 굳어진 채
화석(化石)이 되는데……
눈물도 이미 메마른
안타까움이 있어
하늘 높이
소리 높이
나부껴 오르는
깃발도 없이
오늘도 나는
쓰러진 양 살아간다.
(1953. 12. 동국시집 제2집)
--- p.25
------------------------------------------------------------------------------
죽음을 위하여
언젠가 너의 청춘의 낙일(落日)은 오고
싸늘한 죽음은
조용히 이마 위에 나릴 것이다.
그 날, 너는 행복으로 위장된
너의 고독의 나날을 돌아보며
뉘우칠 수 없는 아픈 회한에 잠길 것이다.
죽음의 장막은 서서히 나려오고
너의 비극의 막은 오르는데
어둔 세계 위에는 먼 회상의 가랑비가 뿌릴 것이다.
돌아갈 수 없는 감상(感傷)의 나날과
오, 살아 있는 현재를 위하여
기는 높이 오르고
다가오는 죽음 앞에
너의 짧은 생애를 뒤돌아보며,
어쩔 수 없는 고별의 손을 흔들 것이다.
아, 너는 다시 생각할 것이다.
행복하던 시절에의 비굴한 미련(未練)과
반쯤 가리어진 속눈썹, 그 환한 눈매를,
어느 한 사람의 머리칼에 빛나는
그 황금빛의 의미를.
(1956. 11. 동국시집 제5집)
--- p.38
------------------------------------------------------------------------------
다시 한강교에서
강은 차라리 흘러가지 않는다.
흘러가지 않는 강을 바라보며
나는 울고 있고,
언제부턴가,
나의 불행한 젊음은
폐허의 하늘 아래 잠들고,
그리하여
나는 시를 쓰고, 술을 마시고,
또 인생이 무엇인가를
열심히 생각해 왔다.
지금
나의 시야에 비치는 강은
먼 옛날로 흐르고 있다.
강을 굽어보며 울고 간
서러운 사람을
나는 생각해야 한다.
오! 기욤 아폴리네르.
그의 기구한 생애와
굴욕의 편력을 거듭한
나의 죽어간 나날을 생각해야 한다.
시일은 흘러가고
우리들 사랑은 죽어가도
언젠가
내 곁에서 울고 간 그 사람,
그 황금빛 머리카락을 기억해야 한다.
아, 나는 다시 망각해야 한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무너진 한강교에서
실로 내가 느끼는 이 회한, 이 고뇌를,
서울의 하늘 아래
회한 없이 묻혀 간
나의 기묘한 생활,
이 부질없는 시편(詩篇)들을.
(1957. 10. 동국시집 제6집)
--- p.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