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노자 『도덕경』의 5000자를 한 글자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도(道)’가 될 것이다. 이 ‘도’는 당연히 하늘의 도인 천도(天道), 땅의 도인 지도(地道), 사람의 도인 인도(人道)를 포함한다. 그중 인도에는 ‘소박함을 드러내고 질박함을 품는’ 사람됨의 도, ‘부드러움으로 강건함을 이기는’ 처사의 도, ‘갓난아기로 돌아가는’ 양생의 도, ‘무위로 다스리는’ 관리의 도가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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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살면서 어떻게 해야만 자신의 ‘길’을 완주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어떻게 하면 자신의 ‘도’를 완성할 수 있을까? 세상 사람들은 ‘많음(多)’을 추구하지만, 노자는 ‘적음(少)’을 좇으라고 한다. 세상 사람들은 위로 올라가려고만 하지만 노자는 아래로 내려가라고 한다. 세상 사람들은 강인함을 추구하지만 노자는 오히려 부드럽고 약함을 강조한다. ‘적게’ 가질수록 기뻐하고, ‘아래로’ 갈수록 높고 귀해지며, ‘부드러워질수록’ 강대해질 수 있다. 노자는 우리에게 반대 방향으로 생각하고 반대 방향으로 행동하라고 한다. 그래야만 이 어수선하고 경박한 세상에서 평안과 고요함을 얻고 자신의 본성을 회복하여, 담담하고 넉넉한 심령의 낙원에 들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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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도’가 지나치게 심오하고 분명하지 않아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노자는 친절하게도 후대인들이 어려워할 것을 염려한 나머지 ‘도’를 두 가지 사물에 빗대어 설명하였다. 하나는 자연계의 ‘물’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 세상의 ‘아기’이다. 그래서 『노자』 제8장에서는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않고, 뭇사람이 싫어하는 곳에 머무르므로 도에 가깝다.’고 하였다.
--- p.38~39
도는 구체적인 사람이나 물건이 아닌, 세계의 본질이며 자연의 법칙이다. 이러한 도는 모든 것을 아울러 통섭하면서 천지(天地)나 인생(人生)의 각 방면에서 운행하는데, 이 때문에 도의 외연은 하늘의 도, 땅의 도, 인간의 도를 포괄할 만큼 광대하다. ‘천지의 도’는 우주 근원의 도와 변화 법칙의 도, 인식 방법의 도 등을 포함한다. ‘인생의 도’에는 ‘소박함을 드러내고 질박함을 품는’ 사람됨의 도, 그리고 ‘갓난아기로 돌아가는’ 양생의 도, ‘무위로 다스리는’ 관리의 도 등을 포함한다. 그러나 어떠한 도로 불리든 결국에는 하나의 도로 귀결된다.
--- p.39
사람들은 공자가 사회 참여적이었던 반면 노자는 세상을 떠나 은둔했고, 공자는 적극적이었던 반면 노자는 소극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대단한 오해다. 실제로는 노자야말로 누구보다도 세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대표적 인물이다. 역사적으로도 『노자』는 제왕에게 통치 방법을 제시한 책이라는 의미에서 ‘군왕남면지술(君王南面之術)’로 불렸기 때문이다. 『노자』가 제왕에게 나라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지 가르쳤다는 말이다. 이보다 더 세상일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이가 어디 있겠는가? 다만 노자는 세상을 달관한 뒤 속세를 떠난 채 세상을 대했고 언뜻 소극적으로 보이는 방법을 써서 가장 적극적인 목적에 이루려 했을 뿐이다.
--- p.51
‘도를 도라고 말한다면 영원한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이 두 구절에 대한 해석은 무척이나 다양하다. 간단히 구분해 보면 주로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첫 번째 해석은 도가 만일 도로 불린다면 항상한 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두 번째 해석은 도는 말로 표현될 수 있지만 일종의 평범하지 않은 도라는 것이다. 어법 면에서 보면 둘 다 옳은 풀이다.
‘도가도(道可道)’에서 앞의 ‘도’를 명사로 여기고 뒤의 ‘도’를 동사로 보는 것은 누가 봐도 당연한 일이다. ‘가(可)’라는 글자가 조동사이므로 그 뒤에 오는 것이 동사가 됨은 고대 중국어를 연구한 학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뒤에 나오는 ‘도’를 동사로 해석하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고 어법적으로도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도가도’의 뜻은 바로 ‘도(최고 범주의 도)가 만일 도라고 불린다면’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뒤의 ‘도’는 무슨 뜻일까? ‘말하다’ ‘말로 분명히 하다’라고 해석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가다’로 풀이되기도 한다. 왜냐면 ‘도’의 본래 뜻이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사로 사용된다면 뜻은 ‘길을 가다’가 되고 ‘실천하다’라는 의미까지 확장된다.
--- p.69
기업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이 기업을 창업했다고 해서 소유하려 들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직원들에게 최대의 이익을 돌려주고자 노력해야 한다. 언뜻 손해 보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직원들이 기업의 최대 이익을 위해 노력한다면 이로써 얻는 최종의 결실은 다 경영자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음의 본성으로 시작하였지만 실제로는 양의 본성 최고봉에 도달하게 되는 원리다. 그래서 음성적 사유가 무조건 소극적이라는 사고방식은 버려야 한다. 음성적 사유는 일종의 전략일 뿐이다. 물론 전략이라고 해서 무슨 고의적 계략이나 기교의 의미는 아니며 대도(大道)와 자연(自然)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 p.102
이 세상의 거의 모든 베풂은 보상과 소유를 목적으로 하지만 오직 자녀를 향한 부모의 베풂만이 사심 없이 순수한 것이다. 어떤 것을 사랑하면 소유하고 싶어지지만 오직 한 가지 사랑만은 이별을 목적으로 한다. 그것은 바로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이다. 어떤 부모도 자식을 소유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녀가 세상으로 나아가 일을 성취하기를 바란다. 도가 만물을 낳음은 마치 부모가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과도 같다.
도는 만물을 향해 거대한 창조력을 발휘하면서도 오히려 네 가지 ‘불(不)’을 행하니 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누군가 기업을 창립했다면 그 기업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뽐내도 되는 것일까? 당연히 이것은 도에 부합하지 않는다. 성인, 즉 도를 가진 사람이라면 무언가를 창조하고 일을 이룰 수는 있어도 그것을 소유하거나 지배하려 들지 않는다.
--- p.102~103
노자가 말한 득도자는 흐릿하고 아른하며 순수하고도 질박한 것이 마치 늙은이와도 같지만, 장자가 말한 득도자는 유유자적하고 대범하며 구애됨 없이 자유롭게 거니는 것이 마치 미남자와도 같다. 루쉰은 장자를 가리켜 “거대한 물줄기처럼 대범하여 구애됨이 없는 모습이 하나하나 아름답다.”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노자는 늙은이이고 장자는 미남자이니 내가 보기에는 늙은이가 한 수 위인 듯하다.
--- p.201
그래서 나는 종종 기업가들을 향해 이런 농담을 던지곤 한다. “사장님께서 하실 일은 그냥 저와 함께 산에 올라가 차 한잔하시는 겁니다.” 만일 경영자가 자리를 비워도 여전히 직원들이 스스로 즐겁게 일하며 자신의 잠재능력을 충분히 발휘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사람들이 ‘그가 있는지 알지 못하는’ 참된 지도자의 경지이자 진정한 무위이치(無爲以治), 자연무위의 경지이다. 여기서 자연은 대자연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본연의 그러한’ 모습을 의미한다. 무위이치는 사물의 본질, 사람의 본성에 근거해서 관리하는 것이다.
--- p.212~213
‘이런 까닭에 군자는 종일 다녀도 치중(輜重)을 떠나지 않는다.(是以君子終日行不離輜重)’ ‘치(輜)’는 ‘수레 거(車)’ 변을 가지고 있어서 말이 끄는 물건을 싣는 수레를 뜻한다. 고대에는 군자가 길을 나서면 하나같이 마차를 타고 갔다. 이것이 암시하는 것은 군자는 무슨 일을 하든지 가장 중요한 부분을 붙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마치 마오쩌둥이 말한 것처럼 문제를 해결할 때는 주요 쟁점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고문(古文)의 ‘치중(輜重)’은 아마도 ‘경중(輕重)’을 잘못 적은 것으로 보인다. 물건을 싣는 수레라는 의미의 ‘치중’으로 해석할 경우 지나치게 어색한 느낌이 있지만 ‘경중’으로 해석하면 뜻이 잘 통한다. 군자의 모든 행위는 ‘경중’이라는 두 글자를 벗어날 수 없다. ‘경중’을 벗어나지 말라는 것은 음양을 떠나지 말라는 뜻이다. 무슨 일을 하든 경중과 음양을 파악하는 것은 일의 대강을 붙드는 것이다.
--- p.277
멈출 줄 안다는 것은 우리 각 사람에게 있어서 무척 중요한 일이다. 기업(企業)의 ‘기(企)’라는 글자는 위에는 ‘사람 인(人)’이 있고 아래에는 ‘그칠지(止)’가 있다. 그 본래 뜻은 무엇일까? 앞서 ‘발꿈치를 들고 서는 자는 제대로 서지 못한다.(企者不立, 跨者不行)’고 했듯이 이 ‘기(企)’는 발꿈치를 들고 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기업가(企業家)는 글자만 놓고 보면 발꿈치를 들고 서서 사업하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보다 분명 더 높고 큰 목표가 있어서 발꿈치를 들고 섰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일수록 반드시 멈출 줄 알아야 한다.
--- p.326~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