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하르트는 하이데거가 “민족사회주의(Nationalsozialismus) 시기에 자신이 겪은 정치적 좌절을 뒤로하고, (새롭게 상정되는 독자들의) 행선지를 의도적으로 바꾸기로 결심했다”고 보았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이데거는 자신의 작품을 자기 손으로 직접 ‘후세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이다. 즉 자신의 사상을 독자들에게 직접 마케팅하는 일을 자신의 중심 활동으로 삼게 된 것이다. _ 5쪽
사상사 연구에서 차지하는 편집자의 위치나 의미의 인식도 중요하지만, 한편으론 현대와 같이 ‘사상의 상품화’가 운명처럼 되어버린 사회에서, 편집자나 출판사가 사상가 및 저자와 대치(對峙)하는 것만이 아니라 시장(市場)과도 대치하도록 해야 한다. 즉, 시장에서 바라는 저작과 사상을 시장에 내보내는 것이 ‘출판사의 경영’이라는 점에서 중요해진다. _ 47~48쪽
이러한 모든 지적 동향과 유행은, 디더리히스와 그의 출판사 그리고 디더리히스가 발견한 새로운 지성의 창조자들이 만들어갔다. 반대로 말해, 이러한 배경을 이해하지 않으면 그 당시에 화제가 되었던 ‘키르케고르 르네상스’나 ‘톨스토이 유행’, ‘니체 신드롬’ 심지어 ‘동양 종교의 붐’ 등이 왜,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빌헬름 제정기를 관통한 디더리히스의 생애와 그의 출판사의 역사를 통해, 새로운 지성을 싹틔우고 또 그 시대의 사상을 형성했던 편집자의 역할을 발견할 수 있다._ 99쪽
사상으로서의 텍스트를 낳는 배경에는 그 텍스트를 낳는 사회사적인 콘텍스트가 있으며, 동시에 그 사회사적인 콘텍스트를 창출하는 사상의 텍스트가 있다. 이 순환을 성립시키고 있는 것은 저자 한 사람만의 힘일까? 그렇지 않다면 거기에 편집자가 어떤 위치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_ 125쪽
해석자로서의 ‘독자(讀者)’는 ‘저자의 사상’과 ‘편집자의 사상’이라는 두 사상체계를 ‘하나의 세트(a set)’로 전달받게 되지만, 이것을 식별하기 위한 노력이 분명히 무의식 속에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을 것이다. 바로 그것이 한 권의 책이 특정 출판사를 통해 나왔다는 사실이 갖는 의미이다. _ 129쪽
그(뮌첸베르크)는 확실히 출판을 정치적인 수단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때 대중을 향한 ‘정치적 계몽’의 추구라는 벡터(Vektor)와 더불어 다른 한편의 ‘정치적 투쟁’이라는 벡터는, 오히려 자신의 정치적 투쟁의 뿌리이자 주체이기도 했던 공산주의운동 자체를 향해서도 과녁을 겨눌 수 있었던 것이다. 즉, 그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사회를 비판했지만, 그 사회를 비판하는 공산주의 활동가도 더불어 비판하였다는 말이다. 이것이 선전(宣傳, propaganda)과 편집(編輯, editing)을 식별할 수 있는 하나의 포인트가 아닐까? _ 148쪽
발신자인 편집자가 저자의 사상이나 의견을 수신자에게 물어보고 호소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수신의 형태까지 강제하게 될 때, 편집자는 ‘정치의 수단’이 되었다. 괴벨스의 시대에는 그것이 나치스라고 하는 전체주의에 의해서 이용되었다. 하지만 책을 읽는 방법까지도 IT기업이나 단말기 회사가 소개하고, 그것을 시장에서 직접 판매하고, 심지어는 독서의 스타일까지도 결정해버리고 있는 최근 현대의 움직임 속에서도 그와 같은 원리를 발견하게 되지는 않을까? _ 162쪽
‘제3차 로볼트 출판사’가 붙잡은 것은 어떤 ‘새로운 노선’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그 어떤 정치적 입장도 붙잡지 않는다는 의미로서 ‘무정치성’을 선언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로볼트가 일관되게 지켜온 정치적 신조(信條)였다. 즉, 모든 정치적인 입장을 대중들 앞에 적나라하게 소개하여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이 로볼트가 생각한 ‘편집자의 정치적 책임’이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로볼트가 ‘편집자로서 지닌 정치적 입장’이었다. _ 176~177쪽
1900년 전후의 ‘세기말 독일’에서 신학자와 출판사가 열정을 쏟아 부으며 관여했던 여러 정치적 분쟁과 사전 편찬을 둘러싼 수많은 사건들 속에서, 당시의 출판사는 저마다 입장을 가지고 주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러한 출판사의 입장이 그 당시만큼 의미를 갖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각각의 출판사는 저마다의 입장과 의식을 가진 채 활동하고 있겠지만, 현대의 신학자들은 시장원리와 성과주의라는 압박 앞에서 더 이상 교파(종파) 분쟁이나 신학 분쟁에 휩쓸리려 하지 않게 된 만큼, 이러한 과거의 ‘출판사 정치’로부터도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다. _ 195쪽
그 시대의 정치나 경제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것을 능숙하게 분석하여 사상적 유행을 놓치지 않는 것이 편집자의 가장 중요한 과제일까? 오늘날 출판사의 모습들처럼, 단편적이며 그 즉시 도움이 되어, 점수화하고 계량화하는 것을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게 시장의 동향에 즉각 대응하며 지식과 교양을 ‘잘라 팔기 식’으로 접근해야 하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출판사’가 단순 작업의 ‘인쇄소’와 같지 않은 것은 거기에 편집자가 있기 때문이다. _228쪽
시장이라는 것은 하나의 역사적인 산물이며, 사상은 시장에서 소비되긴 하지만 시장을 상대화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상이 반드시 시장 안에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상이 시장에서 선택받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반대표를 던질 수밖에 없게 된다. _245쪽
이 책은 ‘사상으로서의 편집자’라는 관점을 통해 근대사상사 연구에서 편집자가 서 있는 위치에 주목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들 편집자가 시장원리에 삼켜져버림으로써 그 위상을 상실해갔기에, 그렇다면 과연 ‘누가 편집자인가?’라는 물음이 생겨났다는 가설을 설정해 논의를 진행시켜왔다. _ 253쪽
이것은 편집자나 출판사가 전통적으로 고민해온, ‘독자와 사상가(작가)’ 사이의 중개 역할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제3의 대상이며 출판사의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즉 ‘단순 소비자로서의 피동적인 독자들’이 아니라, 어느새 출판언론의 편집에 능동적으로 관여(간섭)하고 있는 ‘이름 없는 편집자로서의 독자들’에 대해서 고민해볼 시점이 온 것이다. _ 287쪽
현대의 출판사 문제를 생각해볼 경우에도, 신문이나 잡지 그리고 기업으로서의 출판사의 편집을 좌우하는 커다란 요소는 광고를 포함한 대중의 흐름과 동향이다. 그것은 사상이 대중에게 말을 걸었던 옛 방식의 ‘역전 현상’이다. 즉 편집자가 사상가를 발굴하며, 대중에게 소개하고 싶은 사상을 시장에 공급하는 순서가 아니라, 마케팅이 먼저 존재하여 얼굴이나 실체도 보이지 않는 ‘익명의 대중’에게서 받은 요구가, 공급할 사상을 미리 제약하고 결정해버리는 역전(逆轉)이 나타나게 된다. _ 287~288쪽
‘시장원리에 맡긴다’는 출판사나 편집자의 태도는 실제로는 사상 활동에 자유를 안겨주는 것이 아니라, ‘사상의 시장’이라고 하는 ‘눈에 안 보이는 공간’을 영향력 있게 지배하고 있는 익명의 편집자들에게 강력한 통제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현대 출판계의 상황에서야말로 ‘사상을 가진 편집자’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바야흐로 ‘사상으로서의 편집자’를 확보한 출판사가 필요한 시대를 맞게 된 것이다. _ 298쪽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