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는 우리의 치부인 불평등과 차별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교훈적이다. 방금 한 말을 오해하지 않기 바란다. 『페스트』에 그런 불평등을 고발하는 묘사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소설에서 알제리인들을 아예 제외한 것이 알제리인들에 대한 불평등한 차별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는 뜻이다. 그래도 미국에서 만들어진 베트남 영화에는 베트남 사람들의 모습이 엑스트라로 나오긴 한다. 주연이나 조연은커녕 미국의 폭격에 죽어가는 희생자로 잠깐 등장하는 처지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페스트』에는 알제리인들이 아예 나오지 않는다. 시체조차 없다. 그래서 오랑은 마치 프랑스의 도시 같다. 거기에는 백인들만 사는 듯 『페스트』에 묘사된다. (……)
불과 몇 주 만에, 코로나19의 대유행은 인종과 민족, 성별, 계급, 직업 간의 심각한 불평등과 각 사회 안에 내재한 많은 다른 분열을 폭로했다. 이러한 분열에 대한 전 세계적 인식은 이제 갈수록 높아지고 있으며, 어떤 곳에서는 불평등 문제가 대중 토론에서조차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저임금과 저임금 노동자들을 가치 있게 하고, 더 나은 의료서비스를 보장하며, 취약한 사람들을 더 잘 보호하고, 위험한 기후 변화를 바로잡고,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무시해온 많은 잘못들을 바로잡는 ‘새로운 정상(new normal)’을 건설해야 한다는 요구가 강해지고 있다.
---「알제리의 카뮈」중에서
지금 마르티니크는 인구가 40만 명도 안 되나 인구 밀도는 300명 정도로 매우 높다. 갈 데 올 데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밀집하여 살고 있는 것이다. 본래 빈곤한 곳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크게 부유하지 못하다. 그러나 근대를 상징하는 설탕은 한때 매우 중요한 산업이었다. 사탕수수 재배와 제당 가공업이 산업의 주를 이루고, 설탕과 바나나가 수출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 서양이 침략하기 전, 마르티니크에는 여러 민족이 파도처럼 넘나들었다. 당연히 끝없는 인구 이동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다양한 문화가 혼재된 사회, 곧 복수문화의 사회가 형성되었다. 처음에는 대체로 우리와 비슷하게 생긴 아메리카 인디언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이어 백인이 찾아왔다. 그것도 영국·프랑스·스페인 등등 이른바 제국을 형성했던 모든 나라에서 다녀갔다. 마지막에는 백인에 의해 노예로 끌려온 흑인이 주류를 이루었다. 파농은 생김새로는 흑인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사실 그 조상의 피도 복잡했다. 곧 겉모양은 흑인이었으나 그의 몸과 마음에는 그 수천 년에 형성된 복잡한 역사와 문화가 혼재했다는 점에서 혼혈아였다.
---「파농의 고향 마르티니크」중에서
카뮈는 1936년 봄에 이미 공산주의에 회의를 표명했다. 스승인 그르니에가 공산주의의 교조성에 회의를 표명한 것과 같이 카뮈도 정의를 위한다는 미명하에 저질러지는 어리석은 일은 거부해야 마땅하다는 각오를 보여준다. 특히 아랍인들이 비합법 활동으로 구속되었음에도 공산당이 침묵하자 카뮈는 공산당을 비판하고 아랍인들, 특히 메사리 하지가 이끈 ‘북아프리카의 별’이라는 단체에 관심을 둔다. 그러나 카뮈는 아랍 민족의 독립이라고 하는 측면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계층으로서의 아랍 민중의 해방이라는 측면에 관심을 가진 터였다. 카뮈가 아랍 민족의 독립문제에 집중한 것은 1950년대 아랍 민족해방전쟁이 시작된 뒤였는데, 그 후로도 독립에는 반대했다. 카뮈는 1937년 여름, 공산당에서 제명된다. 사상을 고치라는 당 간부의 요청을 거부한 탓이었다. (……) 그러나 알제리에 사는 아랍인들처럼 ‘부조리’를 매일매일 느끼고 경험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백인이 주류인 미국에서 흑인만큼 ‘부조리’를 느끼는 사람들이 또 있을까?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느끼는 부조리보다 이유도 없이 죽어간 무명의 아랍인만큼 부조리한 삶을 산 사람이 또 있을까?
---「카뮈의 성장」중에서
파농이 10살 되던 1935년, 마르티니크에서 프랑스 귀속 3백 주년을 기념하는 잔치가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대량학살과 강제이주의 결과 유럽계, 아프리카계, 인도계, 아시아계, 레바논계의 사람들이 크레올로 형성된 3세기. 백인을 정점으로, 흑인을 저변으로, 혼혈 물라토를 중간에 두고, 인도인과 중국인이 주변에, 시리아인을 산재시킨 거대한 인종의 나선형이 형성된 3세기. 그동안 마르티니크는 단 한 번도 프랑스로부터 떨어지지 않았다. 수많은 마르티니크 사람들이 그 ‘위대한 조국’ 프랑스를 사랑하여 조국을 위해 아낌없이 목숨을 바쳤다. 마르티니크 사람들은 언제나 조국의 점호에 “예”라고만 답했다. 그들은 프랑스인이라는 권리에 우쭐하여 무엇이나 바쳤고 그것을 자랑했다. 그들은 프랑스 식민지 역사에서 가장 우수한, 가장 철저히 복종한 학생이었다. 귀속 3백 주년을 기념하는 문학작품집이 출간되었고 식민지의 시인이나 소설가들은 조국을 예찬하는 글을 기고했다. 누구는 설탕과 바닐라 향기를 고답적으로, 누구는 낭만주의식으로, 누구는 상징주의풍으로, 누구는 고전주의 형식을 빌려 조국에 대한 충성을 노래했다. 그 30년대에 마르티니크는 검은색에 치욕의 낙인을 찍었고, 혼혈 물라토의 이데올로기에 복속했다. 이것이 바로 그 20년 뒤에 파농이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서 ‘유색화(乳色化)’라는 이름으로 고발한, ‘탈색’의 이데올로기다.
검은 피부를 없애라, 곱슬머리를 없애라, 야만의 아프리카나 인디언의 비참을 생각하게 하는 모든 것을 버려라. 자기보다 흰 피부의 사람과 결혼하여 인종을 구원하라. 그러면 논리적으로 진화를 희망하는 사회 속에서 문화적으로도, 인종적으로도 희지 않은 모든 흔적을 없앨 수 있으리라. 팔다리를 모두 잘라버려라. 그러나 언제 어디서나 반항은 있다.
---「파농의 성장」중에서
이처럼 무한한 권력의 타락을 비판한 카뮈는, 만인 평등주의에 의한 정당한 반항을 옹호한다. 그리고 그 보기로 고대인, 파리 코뮌과 아나키즘 노동조합, 그리고 예술가와 지중해인들의 삶을 든다. 즉 북유럽 대신 지중해를, 마르크스주의에 의해 타락한 헤겔과 마르크스 대신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를 옹호한다.
카뮈는 먼저 화가들(들라크루아, 반 고흐)이나 소설가들(라 파예트 부인, 프루스트)과 같은 예술가들은 현실에 반항하면서 현실을 피하지 않았다고 본다. 예술은 현실의 일부인 아름다움과 현세적이고 감지할 수 있는 초월성을 고양한다. 예술은 자연과 역사를 접합시켜 개별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의 화해를 실현한다. 그러나 이는 순수한 형식주의와 전적인 리얼리즘이라는 두 개의 함정을 피해야만 가능하다. 정의를 무시한 예술은 니힐리즘이고, 완전한 리얼리즘은 선전으로 타락할 여지가 있다. 참된 창조는 반항이다.
또한 카뮈는 아나키즘 노동조합운동인 생디칼리즘을 옹호했다. 생디칼리즘은 코뮌과 마찬가지로, 관료적이며 추상적인 중앙집권주의에 대한 부정, 그것도 현실을 위한 부정이다. 반항은 무엇보다 가장 구체적인 현실, 즉 사물들과 인간들의 살아 있는 심성과 존재가 투명하게 드러나 보이는 직업이나 마을 등에 기반을 둔다. 이는 밑으로부터 위로 완성되고자 했다. 그러나 위로부터 밑으로 완성되고자 하는 20세기 혁명은 정치이자 이데올로기로서 공포정치 및 현실에 가해지는 폭력을 피할 수 없다. (……)
1952년 11월, 카뮈는 프랑코 지배하의 스페인을 회원국으로 받아들였다는 이유에서 유네스코를 탈퇴한다. 이어 1953년 6월의 동베를린의 노동자 시위를 지지하는 연설을 한다. 또한 1956년의 포즈난 6월 반소봉기, 헝가리 혁명을 지지하고 유럽 작가들이 유엔에 도움을 호소하도록 촉구한다. 이어 1957년에는 쾨슬러와 함께 사형 반대 공개장을 발표한다. 당시 유럽의 좌익지식인으로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1956년 헝가리 폭동이 터지자 카뮈는 더욱 날카롭게 좌익지식인들을 비판했다. 그러나 1954년, 카뮈는 지중해로 돌아간다. 알제리가 아닌 지중해로 돌아간 것이다. 당시 알제리는 민족해방전쟁이 터지기 직전이었으나, 카뮈가 본 것은 여전히 그 붉은 태양이었다.
---「카뮈의 반항」중에서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의 제1장 ‘흑인과 언어’는 앙티유의 흑인들이 식민국의 언어인 프랑스어와 토착어인 크레올어를 어떻게 보느냐를 분석하여 그들의 콤플렉스를 밝힌다. 파농은 언어가 문화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주장한다. 즉 그것은 문화를 구조화하고 사회관계를 조정한다. 그러한 언어의 획득은 바로 문화의 획득을 뜻한다. 식민지 상황에서 식민지 언어를 완벽하게 익히는 것은, 문화적으로 박탈된 식민지 선주민이 백인 사이에서 명예로운 시민권을 얻는 입장권으로 간주되며, 식민지 언어를 익히면 익힐수록 더욱더 식민지 지배민인 백인처럼 되고, 반대로 선주민성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언어는 사상 표현의 도구이므로 데카르트식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은 ‘나는 말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변용된다.
파농이 언어현상을 중요하게 보는 이유는 “말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타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어떤 문화를 떠맡고, 어떤 문명의 무게를 받치는 것이”(17)기 때문이다. 식민지화된 사람은 모두―지역 문화의 독창성이 무너지는 바람에 속으로 열등 콤플렉스가 생긴 모든 사람― 문명화된 나라의 언어, 즉 식민 본국의 문화와 대면하게 된다. 식민지인은 본국의 문화적 가치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면 만들수록 식민지의 가시덤불에서 벗어난다.(18) 그 보기로서 파농은 선주민 출신 장교가 통역관으로 봉사하는 것을 든다. 이는 미군정 시대나 6·25전쟁 때도 나타난 현상이다. “그들은 주인의 명령을 자기 동향인들에게 옮기는 데 종사하면서 스스로도 일정한 명예를 누린다.”(19) 상당 기간 프랑스에서 생활한 흑인은 완전히 변하여 금의환향한다. 프랑스에서 그는 필사적으로 프랑스식 발음법을 익히는 등, 유럽식 방식을 모방한다. 이런 경향은 지식인의 경우 더욱 심하다.
---「파농의 반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