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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집의 봄가을

낡은 집의 봄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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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3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292쪽 | 312g | 128*188*15mm
ISBN13 9791160870947
ISBN10 116087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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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렴풋하게나마 막 깨닫게 된 거야. 내가 지금까지 따르려고 힘써 왔던 선이 전부 가짜였다는 사실을. 기쁨을 동반하지 않는 선은 있을 수 없어. 그건 의태야. 악이야. 일본은 패배한 거야. 이렇게 좁은 땅에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야 하지. 배낭 속 바지락이야. 만원 전차야. 일본인의 행복의 총량은 극한에 치달았어. 한 사람이 행복해지려면 그 양만큼 다른 누군가가 불행해져야 해. 마침 아저씨가 떨어졌기 때문에 남은 우리에게 여유가 생긴 것처럼. 우리는 스스로의 행복을 바라기보다 타인의 불행을 기도해야 해. 존재할 수조차 없는 행복을 찾기보다 내 근처에 있는 사람을 불행에 빠뜨려야 하는 거야.
--- 「바지락」 중에서

한 시가 되면 우리는 다시 일어나 걷기 시작한다. 붉은띠를 선두로 열을 지어 얼음 위를 바라보며 걷는 것이다. 여섯 시 경 작업을 멈추고 수용소 방향으로 돌아간다. 수용소 앞까지 오면 이미 일대가 어두워져 붉은띠는 입구 초소 소련병에게 우리를 넘기고 홀로 감시병 막사 쪽으로 걸어간다. 감시병 막사는 수용소에서 백 미터 정도 떨어진 지점에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서 우리들 빙상청소반은 페치카가 타오르는 사옥으로 들어가 묽은 카샤를 훌쩍이고서 그 뒤 잠들 뿐이었다. 저녁 식사 후 작업 얘기나 음식 얘기를 할 때가 있었지만 고향 이야기는 서로 의식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보다 돌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도 그 당시 우리에겐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에.
--- 「붉은띠 이야기」 중에서

“이봐 돌팔이 고양이 양반. 뭔가 말을 해보게. 대왕님은 아주 괜찮으시겠지? 그래. 아주 건강하시다고 말해주게나.”
돌팔이 고양이는 아부 고양이에게 힐끗 차가운 일별을 던지고는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그 거만한 태도가 아부 고양이의 비위를 울컥 건드린 모양입니다.
“뭐야. 대왕님께서 건강하지 않으실 리가 있나. 건강 그 자체이신 분이야. 내가 잘 알아. 내 쪽이 훨씬 허약할 정도라고. 그래서 나는 밤낮으로 대왕님을 근처에서 모시며 은택을 옹망하는…….”
“뭐라고. 노망이라고!”
대왕 고양이가 듣다가 발끈 화를 내며 고개를 번쩍 쳐들었습니다.
--- 「대왕 고양이의 병」 중에서

?가니에와 사루사와의 토요일 모임은 최근 대개 이런 식입니다. 이러한 상황이라 가니에가 사루사와의 등을 보는 것은 정확히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가니에는 사루사와의 등을 보지 않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사루사와의 등에 반점이 있어도 가니에는 불행해지고, 없다면 더욱더 불행해질 게 틀림없습니다. 떠올려보거나 공상하거나 하기만 하고 실제론 보지 않는 편이 나을 법한 무언가가 이 세상엔 분명 존재할 겁니다. ‘S의 등’도 이젠 그중 하나겠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 「S의 등」 중에서

“맞아. 맞아. 나도 그 목이버섯 같은 귀에 완전히 속아 넘어갔어.”
하고 노로가 열을 내며 동조합니다. 끝내 그런 사기꾼 같은 놈이 득을 보고 우리 같은 정직한 자들이 손해를 본다, 신도 부처도 없는 건가 하고 노로가 사내답지 못하게 울음을 터뜨리는 형국이라 그 대단한 저조차도 도무지 감당하기 힘들었습니다. 어르고 달래 간신히 울음을 그치게 하고서 앞으로 당분간 동거하게 되었으니 서로 이상적인 동거인이 되도록 노력하자고 맹세를 나눈 뒤 동서로 갈라져 겨우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날 밤 저는 제 손이 온통 사마귀투성이가 되는 꿈을 꿨습니다
--- 「낡은 집의 봄가을」 중에서

그런 식으로 이 지주가 근처 어느 집에서 얘기한 적이 있는 듯, 그곳 부인분께서 언젠가 저를 향해 빨리 보강공사를 하지 않으면 손해예요, 라는 의미의 말로 멀리 에둘러 충고해주었습니다. 저도 그러는 편이 좋다고는 생각하나 어쨌든 상대가 노로니 말이죠. 수호(修好)를 회복하고 단결하여 작업에 임하지 않겠나 등은 지금까지의 관계의 흐름상 저도 말을 꺼낼 수 없고 말을 꺼낸다 해도 노로는 그 제안을 비웃으며 일축할 게 분명합니다. 우리의 서로를 향한 증오, 서로를 향한 괴롭힘은 이미 업의 영역에 들어 다른 사람의 말이 귀에 들어오는 단계를 아득히 지나 온 상태입니다. 정말 불행한 일이지만 이제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나아가는 자로 하여금 나아가게 하고 스러지는 자로 하여금 스러지게 하라. 이런 비장한 심경으로 이 일상의 날카로운 긴장 속에서 저희는 매일같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디 가여워하며 웃어 주십시오
--- 「낡은 집의 봄가을」 중에서

“저런 꽃게 같은 남자랑 바람피울 정도로 내가 추락하진 않았어, 착각도 유분수가 있지 적당히 좀 해 제발.”
저는 오쿠보에게 물었습니다.
“그 꽃게 같은 남자란 게 날 말하는 건가?”
“그래. 하지만 내가 말한 게 아니라 후쿠 씨야. 너무 신경쓰지 않는 편이 나아.”
“신경 쓰진 않지만 어째서 자네가 의심받지 않고 내가 의심받는 거지? 자네나 엄청 끼어들었지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아무 짓도 하지 않아서 의심받는 거 아닐까.”
오쿠보는 눈을 부릅뜨고 저를 노려보았습니다. 그 눈엔 옅은 증오의 빛이 있었던 듯합니다. 저는 덜컥 등 뒤로 피로감을 느끼며 중얼거렸습니다.
“그런가. 무슨 뜻인진 모르겠지만 그렇단 건가.”
--- 「범인범어」 중에서

그러자 양자의 언쟁은 점점 무의미한 논쟁이 되기 시작했다. 가령 갯지렁이가 도주하여 미끼통에서 몇 자 떨어져야 그 갯지렁이의 소유권이 사라지는가 하는 식이다. 이딴 걸로 아무리 논의해봤자 결론이 나지 않을 게 뻔하다.
누구도 바라보기만 할 뿐 말리러 나오지 않아 끝내 일장기 아저씨가 허세를 부리며 뭐가 어째 하고 벌떡 일어서버렸다. 나미 씨도 그 기세에 휘말린 듯 덩달아 일어섰지만 그 순간 두 사람 모두 투지를 완전히 잃어버린 듯했다. 이젠 벌떡 일어선 그 허세를 어떻게 하여야 부자연스럽지 않게 수습할 수 있을지, 그것만이 문제인 양 보였다. 그런데 아직 그 누구도 중재하기 위해 개입하지 않는다. 구경하고 있다.
--- 「돌제에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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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언어를 생각하며 이렇게 미묘한 감수성을 지닌 이가 반대로 오늘날까지 얼마나 사람들과 사회로부터 상처를 받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 엔도 슈사쿠 (遠藤周作, 소설가)
시가 나오야, 기쿠치 간, 가사이 젠조, 가무라 이소타, 가지이 모토지로, 가와바타 야스나리, 그러한 정통파의 필력의 능솔적 집성자.
- 이토 세이 (伊藤整, 비평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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