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장점 중 하나는 기술과 사회의 관계에 관한 철학적 지향성을 탐구하고 이를 유익하게 분석하는 비판적 과정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이전의 편견과 전제를 이해하고 극복하려고 할 때, 우리가 갖춰야 할 비판적 자기반성은 항상 좋은 출발점이 된다. 20~21세기 과학기술의 놀라운 발전으로 인해 우리는 자칫 낭만주의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간과하기 쉽다. 이런 점을 놓치지 않고 일별한 『뉴 로맨틱 사이보그』는 탄탄한 균형감 있게 저술되었다.
---「옮긴이의 글」중에서
이제 누구든 예술가가 되어 세상을 바꿀 수단이 생긴 것 같다. “당신은 혁명을 원했는가? 사랑을 원했는가? 당신 앞에 기술이 있다.” 계몽운동 합리주의자로서 우리는 기계를 사랑한다. 낭만주의자로서 우리는 삶, 사랑, 인간, 경이, 신비를 원한다. 우리는 이제 이들 모두를 가질 수 있을 듯하다. 즉, 우리의 기계는 우리를 새장에 가두거나 노예로 만드는 게 아니라 우호적이고 친절하게 우리와 함께 살고, 심지어 우리에게 스며들고 있다. 로봇은 더 친근해지고, 사이보그는 인간과 기계의 결합을 경축한다. 열정, 관계, 아름다움, 숭고함은 기술 바깥에서는 찾을 수 없다. 스마트한 기술과 미디어는 이 모두를 제공한다. 기술은 인간적으로, 미디어는 사회적으로 된다. 게다가 새로운 낭만적 기계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마법처럼 된다. 차가운 과학과 따뜻한 활용의 결합으로 맛보는 경이에 대한 새로운 경험은 탈주술화의 유령을 쫓아낸다. 우리는 인터넷에 매료되고 인간 마음의 경이로움을 탐구한다. 귀신에 홀린 낭만적 상상력의 성은 새로운 고딕 괴물들과 새로운 천재 예술가-과학자들을 위한 공간을 갖춘 거대하고 겉보기에 무한한 새로운 우주로 변했다.
--- p.54
나는 이번 세기의 처음 20년 동안 새로운 기술이 기계의 종말을 불렀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이런 장치에는 기계적인 것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무엇보다 낭만주의와 기술이 (낭만적) 이분법 생명 vs. 기계가 구식이 될 정도로 융합되었다는 의미이다. 더욱이, 나는 사이버낭만주의 이야기가 실제/가상과 디지털/아날로그 구분에 의존하지만, 이런 구분이 아주 쓸모없다고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나는 “가상”의 1990년대 이후, “가상”과 “디지털”이라는 용어가 더이상 뜻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기술이 어떻게 우리의 일상생활과 훨씬 더 통합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예컨대, 스마트폰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스마트한 사물과 소셜 미디어,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그런 것을 사용하는 방식, 즉 가상과 실제, 아날로그와 디지털, 온라인과 오프라인 혼합을 한번 생각해 보라. 비록 초월적 사고가 업로딩과 디지털 불멸을 꿈꾸는 현대의 트랜스휴머니즘에서는 지금도 팔팔하게 살아있지만, 이것은 물활론(애미니즘) 같은 사고와 종교의 (초월적이 아닌) 내재(內在)적 형태로 가는 길을 열었다. (중략) 사이보그는 기술과 낭만주의의 새롭고도 성공적인 결합의 기호이자 신체화이며, 실제로는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의 성공적인 결합처럼 보인다. 이런 점에서 “기계”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 p.253~254
소셜 미디어 사이트는 새로운 낭만적 정체성 일터(identity workshop)가 된다. 1990년대 “인터넷”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기술과 미디어는 우리가 누구인지, 특히나 우리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표현하고 구성하는 거울이다. 1990년대 “인터넷”처럼,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스마트폰과 태블릿은 우리로 하여금 꿈 자체를 창조할 수 있도록 해 준다. 낭만적 시기에는 몽상가가 되는 것이 최고였다. 이 기술을 이용하여 우리 자신의 미개척 부분을 표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코인, 1999: 273 참조), 우리 스스로를 “마침내 세상에 드러낼 수 있는 독창적인 생각의 몽상가, 자유로운 영혼, 독창적인 생각의 근원”으로 제시하고 단정할 수도 있다(195).
따라서 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는 초창기의 인터넷을 자아에 대한 우리의 낭만적 관습과 기술과 관련하여 훨씬 좋고 효과적인 도구로 바꿔 놓았다. (중략) 뿐만 아니라 휴대폰만 있으면 “어디서든” 가능하다. 휴대폰은 당신에게 거의 전지적이고, 동시에 어디든 존재할 수 있게 해 주는 마법의 구슬이고, 또한 그 연결 상태를 유지시키는 도구이다. 이 도구는 존재하고 있는 우리가 더 큰 사회적 세계의 일부임을 지속적으로 확인시킨다. 그리고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다시) 연결시킨다. 따라서 휴대폰은 우리의 사회적·실존적 취약성에 대처하는 방법이 되었다. 몰리의 주장처럼, 휴대폰은 가정과 다른 곳에서 일상 의식의 일부가 되면서, “심적 안심”(305)까지 제공한다.
즉, 사람들은 휴대폰이 없으면 불확실하고 불완전하다고 느낀다(303). 휴대폰은 “모든 것을 아무 탈 없이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마법의 기술”이었다. 다시 말해, 휴대폰은 전통적인 종교가 하지 못한 것을 할 수 있다(또는 적어도 그렇게 인식되었다). 우리로 하여금 세계가 (다시) 전체라는 느낌을 갖게 할 수 있다. (중략) 휴대폰은 PC가 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친밀감과 교제 활동을 제공한다. 정말로 새로운 것은, 이런 새로운 기술과 미디어가 지난 세기의 모바일과 덜 사회적인 도구들과는 달리, 우리의 경험과 관행을 변화시킨 점이다. 이동성과 편재성으로 인해 새로운 장치들은 두 개의 세계가 아닌 하나의 세계를 경험하게끔 해 준다. 오프라인 세계와 분리된 온라인 세계, 현실 세계와 분리된 가상 세계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 p.293~295
스마트폰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하나로 혼합된 세상을 이루는데 기여했다. 더욱이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기술과 미디어를 더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이는 우리가 경험하고, 생각하고, 행하고, 존재하는 것 대부분을 차지한 터라 그것을 기계로 경험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더이상 알아차릴 수도 없다. 만약 이들 각각이 개별 물체로 보인다면, 그 기술은 아주 환기적이고 마법적일 수밖에 없어 대개 예술이나 디자인으로만 제시될 것이다. 확실한 것은 이들이 고장이 나거나 예기치 않게 우리를 실망시킬 때, 말하자면 오작동할 때 다시 기계처럼 보일 것이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주장하는 “목전존재(present-at-hand)”이다(하이데거, 1927). 하지만 일반적으로 스마트폰, 인터넷 등은 유용존재(ready-to-hand)이다. 즉, 우리가 이 세계에 관여하기 때문에 이런 기술과 미디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도구나 환경이 아니다. 때문에 우리가 무엇을 하든 우리가 하고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그것이 우리 일상의 부분이고, 세계의 부분이며, 우리의 일부이다.
--- p.297
21세기 낭만주의 과학과 기술은 (해러웨이가 앞서 제안했듯이) 유전학에서 다른 사이보그와 하이브리드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약간의 기술낭만적·포스트휴머니스트 상상력을 활용하면 하나의 스마트폰을 직접 사용하거나 게이밍, 정보통신기술 같은 다른 형태로 사용 중인 우리를 사이보그로 만드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전자 장치와 더 연결되고 얽혀 있어서 점점 더 비행기를 조종하는 사이보그 조종사와 닮아간다. 이것은 곧 우리 인간과 기계의 하이브리드다. 예측컨대 가까운 미래에는 우리의 자동차가 완전히 자동화될 것이다. 운전 중 네비게이션 장치를 사용할 때면 우리는 이미 사이보그 같고, 자동차 또한 이미 부분적으로는 자동화되어 있다. 게다가 스마트 장치에 의해 모든 곳, 모든 것, 모든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자신은 점점 더 보그(Borg)처럼 될 수 있다.
우리는 더 큰 전체의 일부가 되어갈수록 점점 더 우리의 고유한 특색을 잃어가는 사이버네틱 유기체로 변할 수도 있다. 이것은 이미 20세기 말경 영화뿐만 아니라 예술에서도 예견된 일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예술가 스텔락은 자신의 어느 공연에서 전자 근육 자극물로 자기 몸을 인터넷에 연결시켰다. 『프렉탈 플레시』(Fractal Flesh)에서는 “몸이 먼 이국적 에이전트의 숙주가 되고, 『모바타』(Movatar)에서의 “몸은 인공적 실체와 그 행위성을 공유한다.” 이른바 몸의 일부가 아바타의 코드에 의해 움직였다. 인간-기계 공생을 탐구하는 이런 성과는 우리가 어떻게 이미 기술과 융합하고 있는지, 또 우리가 어떻게 이미 기계의 진동에 의존하는지를 보여주는 은유로 해석될 수 있다.
--- p.343~344
스마트폰과 (몰리가 논의하지 않은) 소셜 미디어에 대해서도 비슷한 관찰이 가능하다. 이것들은 이메일보다 새로운 제식을 제공하고, 사용자에게 심적 안심과 존재론적 보안을 부여하며, 우리에게 더 넓은 커뮤니티의 연결성과 소속감을 가져다 줄 것이다. 예컨대, 사람들이 페이스북을 확인하고, 자신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며, 다른 사람들의 게시물을 “좋아한다”면, 이런 활동은 제식적 측면을 띨 수밖에 없다. 사용자들이 다른 사람들이나 더 넓은 커뮤니티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 이런 활동은 반복적으로 (매일, 매시간, 또는 더 자주) 수행되어야 한다. 더욱이 몰리가 말하는 “정보의 우상숭배”도 있을 수 있다. 즉, 정보화 시대에 정보는 “신성시된다”(325). 기술적 과정은 우리에게 “마법”을 걸어서 우리의 이해를 초월한다. 우리는 과학과 마술, 기술과 전통의 혼합 시대를 살고 있다(326).
--- p.480~4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