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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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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3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120쪽 | 178g | 125*204*8mm
ISBN13 9791158965457
ISBN10 1158965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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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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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줄에 발이 걸린 달빛이 휘청거린다
고요가 고요 속에 침잠하는 자정 넘어
등 굽은 백발 할머니
어둠을 끌고 간다

지상의 잠 깨울까 봐 발소리 죽여 가며
십자가 첨탑에 앉아 숨도 잠시 골라가며
십 분에 딱 한 걸음씩
나무늘보 걸음새로

우회로는 이미 막힌 일방통행 외길에서
시침 분침 길이만큼 짧아진 시간의 보폭
또 하루 소진의 기억
서천으로 저문다
--- 「하현달」 중에서


제 집을 갖지 못한 민달팽이 한 마리가
아파트 담벼락을 밤새도록 기어오른다

몸속의 진액이 빠진
땀방울이 끈적하다

오르다 미끄러지면 다시 또 오르는 길
잠 없이 꿈을 꾸며 쉬지 않고 올라가도
하늘가 별빛은 멀어 더듬이가 떨린다

노숙이 길어질수록 아귀힘은 빠져가고
월세와 전세 모두 고층으로 치솟는 도시

무허가 그린벨트에
재개발이 시작된다
--- 「달팽이의 주소」 중에서


1.
얼마나 걸었을까
무릎뼈가 시큰하다
얼어붙은 산과 계곡 자갈뿐인 들을 지나
신탁(神託)을 따라나선 길 흙먼지가 자욱하다

2.
선지자 거울에 비친 바닷가 수정 동굴
검은 용에 붙들려 간 아사달의 왕녀 찾아
차디찬 동토의 대륙, 봄 다시 맞고 싶다

횟배 앓는 바람 소리 칼집에 갇혀 울 때
비파형 검을 덮는 이끼 같은 푸른 녹들
어둠의 역린을 찔러 용의 피로 씻으리라

3.
성전(聖戰)의 상처에는 거먕빛 꽃이 핀다
공주여, 용의 불길에 내 몸이 타거들랑
해 바른 고인돌 아래 검과 함께 묻어주오

그대 손이 어루만진 수의라도 입는다면
선사의 주술 뚫고 한 신화로 깨어나리
살 비린 피의 내력을 싹둑 끊은 전사로서
--- 「청동검의 노래」 중에서


내가 뭘 어쨌다고 내게 침을 뱉느냐고?

내 아무리 일회용의 비천한 삶이지만 맡은 일 단 한 번이라도 가벼이 여긴 적 있었냐고? 산에서 바다에서 길에서 들녘에서 식당에서 호텔에서 밤하늘 비행기에서, 커피면 커피 맹물이면 맹물 소주와 막걸리에 그 잘난 와인까지 내 언제 낯가리는 것 보았냐고? 그도 모자라 초장 된장 고추장에 담뱃재 오줌까지 죄다 받아줬거늘, 이제 와서 고맙다는 공치사는 고사하고 우악스런 손아귀로 목줄을 조이다가 지르밟고 걷어차서 내쫓는 포악질까지 견뎌야만 하냐고? 오래 살게 해달라고 부탁한 적 없었고 텀블러나 머그잔을 탐한 적도 없었는데 그저 그런 쓰레기에 파렴치한 취급이라니……

계약직 그리 홀대하면
네 사업도 일회성 아니냐고?
--- 「종이컵―다큐와 르포 사이·2」 중에서


누가 또 피의 해역에 모닥불을 지피는가
애저녁에 속만 태울 좁은 물목 한가운데
무모도 저런 무모를
어쩌자고
어쩌자고

정유년 바다에도 불꾼 여럿 있었겠다
깜부기불 목숨마저 사릿물에 던져놓고
열세 척 쪽배에 올라
불섶 향해
가던 이들

불빛 핏빛 한데 엉킨 역사의 다비식장
환호성과 흐느낌이 밀썰물로 갈마들 때
남도 끝 개밥바라기
촛불 하나
밝혀 든다
--- 「울돌목 노을」 중에서


내 피는 시나브로 바닷빛을 닮아간다

걸음발을 뗄 때마다
소금쩍이 이는 날들

바람에 눈을 맞추면 몸이 절로 들썩인다

반세기를 유랑해도 닿지 못한 섬이 있어

꿈속을 허우적대다
다시 쓰는 표류기

모비딕, 그 전설은 아직 탈고되지 않았다
--- 「야생의 족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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