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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집을 짓는 악보

기억의 집을 짓는 악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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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3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264쪽 | 378g | 152*210*11mm
ISBN13 9791189052454
ISBN10 1189052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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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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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채색인 단풍과 억새의 판타지 속에 햇살 밝은 오후 바람도 없는 날, 하늘에 홀연히 나타난 고추잠자리는 가을빛이 듬뿍 물들어 있다. 참 맑고 가벼운 모습이다. 햇빛을 통과시키는 삽상한 날개, 창자를 토해낸 듯 홀쭉한 배, 청잣빛 눈동자 그 어디에도 어두운 그림자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한 소절 노랫소리도 바람을 깨우는 날갯짓도 없이 침묵이 전부다. 내 마음 그가 떠 있는 높이만 올려놓고 내려다보았어도 세상사에 흔들리는 일 절반쯤 줄어들지 않았을까 싶다, 얼마를 덜어내고 비워야 저만큼 홀가분하고 가벼울지 부러울 뿐이다.
투명하고 진실한 것들은 오래 침묵한다. 무엇을 설명하고 해명하랴. 우리는 많은 말이나 큰소리가 삶의 큰 의미를 실을 수 없고, 때로는 독이 될 수도 있어 줄여야 할 때가 많다. 침묵보다 나은 말이 있을 때만 비로소 입을 열어야 하는 현명함이 필요하다. 언어와 소리가 사라진 뒤에야 보이기 시작하고 설화도 사라지고 맑은 향기가 퍼지리라. 고추잠자리의 맑고 투명한 침묵은 고행 승의 게송偈頌처럼 무겁지도 지루하지도 않을 것 같다.
--- 「고추잠자리의 꿈」 중에서

나이가 들면 사소한 것에도 시비를 걸지 말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라는 자아가 죽어야 한다. 자아가 죽은 빈 공간에서만 예수나 부처, 공자 등 성인의 가르침을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활시위를 밖이 아니라 내 안의 자아를 겨누어야 한다. 기나긴 인류의 역사에서 인간은 제 방식대로 이기적이다. 겉보기에 이타적인 사람의 배후에도 역시 이기성밖에 없다는 걸 느낄 때가 많다. 생각해 보면 이제까지 나 나름의 이기적인 사고로 살아온 일생이었다. 그동안 내가 밖으로 날린 화살은 무의미해졌다. 진짜 과녁은 바로 내 안에 있는 이기적인 마음이었음을 알았다.
--- 「나의 화살은 지금 어디를 겨누는가?」 중에서

사랑은 상대방에 대한 일종의 과대평가의 감정을 수반한다. 한마디로 말해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에는 상대방이 일종의 유일신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까지 소중하다고 생각해왔던 부모, 친구, 심지어 조국마저도 그들 눈에는 들어올 리가 없다. 이렇듯 뜨거웠든 사랑이 언제 떠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시기를 감지할 때가 있다. 상대방이 더 이상 내 삶에서 주인공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비교 가능한 사람이 되는 순간이다.
사랑의 비극은 미움으로 변할 때이다. 사랑에 수반되었던 ‘과대평가’의 감정은 이제 멸시의 감정으로 변하게 된다. 과대평가가 상대방을 이 세상의 유일한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감정이라면, 멸시는 상대방을 평범한 사람보다도 못한 사람, 한마디로 무가치한 사람으로 만드는 감정이다. 남들이 평가하는 것 이하로 여겨지는 시기다. 눈에 씌웠던 콩깍지가 벗어지기 시작하면서 부와 권력을 갖고 있던 한쪽에선 인격의 비교가 아닌 신분의 비교가 떠오를 것이다.
--- 「누가 버지니아울프를 두려워하랴」 중에서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진정으로 알아가는 것이고,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평범함과 실패 그리고 그 사람이 지닌 단점을 이해하고 장점만을 존경하고 감사하는 마음이다.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부부라는 것은 뿌리는 하나이지만 머리는 둘인 콩나물처럼 상대방의 정신세계를 인정하면서 한 곳을 향해가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한 몸이 되어 살아가면서도 두 사람의 존재가 각각 살아있는 삶이 진정한 부부의 삶인 것이다.
--- 「부르지 못한 언어의 노래」 중에서

모닥불이 정열의 탱고 춤이라면 화롯불은 스님이 하얀 고깔을 쓰고 추는 승무僧舞다. 모닥불이 일필휘지로 긋는 추사秋史 고택의 주련柱聯이라면 화롯불은 세필로 쓰는 반야심경이다. 모닥불이 총을 든 혁명의 대부 ‘체 게바라Che Guevara’라면 화롯불은 비폭력으로 조국의 독립투쟁을 해온 인도의 ‘간디’라고 생각한다. 화롯불이 민들레꽃이라면 모닥불은 한겨울의 동백이다. 할머니가 소곤소곤 들려주던 옛이야기가 화롯불이면 모닥불은 웅장하고 화려한 오페라 ‘카르멘’이 아닐까. 계곡을 휘도는 강물이 모닥불이라면 졸졸 흐르는 시냇물은 화롯불이다. 젊은 날 열정과 우정과 사랑이 불타오르던 때가 모닥불이었다면 여유와 중후함이 깃든 노년은 화롯불이다. 판타지 소설이 모닥불이라면 수필은 화롯불일 것이다.
--- 「화롯불과 모닥불」 중에서

그가 세상을 씻어낼 때마다 무지개 비늘 쏟아지고 녹아내리는 포말로 인해 우려낸 주변은 항상 백옥처럼 빛났다. 살아가면서 옷이나 몸에 묻은 때나 얼룩을 지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마음에 허황된 욕망의 때, 성냄의 얼룩, 시기와 질투의 먼지를 털어낼 때 마음속에서 향기가 뿜어 나올 것이다. 오늘 소멸해야 이루어지는 그의 헌신으로 인해 땀에 젖은 몸은 깨끗하게 씻어냈지만, 삶에 찌들고 세월에 절은 내 마음음 때는 구석구석에 아직도 켜켜이 남아 있다.
--- 「아름다운 소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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