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들이여, 농촌으로 돌아가라!”
이즈음 감각에는 어떠할지 모르겠지만 당시로서는 국가와 민족에게 바치는 애절한 구호였다. 전쟁이 막 끝난 즈음이었고 산업화는 시작도 하기 전이었다. 먹고살 일이 막막한 세월이었다. 무엇보다 국민을 먹여 살릴 우리네 농촌이 피폐할 대로 피폐해져 있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농촌을 떠나 도시로 향하는 청년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였다. 대학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고향에서 농사에 쓸 소를 팔아서 대학 등록금을 대는 일이 많아 오죽하면 상아탑이 아니라 우골탑이라는 자조의 단어가 유행했다. 대도시로 올라온 청년들에게 별다른 뾰족한 살길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런 때에 함석헌, 유달영 같은 분들이 농촌운동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국가가 살아나려면 농촌이 살아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외침이 내게는 큰 깨달음으로 와 닿았다. --- pp.30~31 「농촌에 대한 믿음이 삶을 움직이다」 중에서
온 시내를 헤매다니며 온갖 먼지가 다 묻었을 깡통이고 그 안에 담아온 밥이었다. 다짐은 하였지만 선뜻 숟가락이 나가지 않았다.
“선생님, 어서 드세요.”
걸꼬마가 눈을 깜빡이며 재촉했다. 내가 먼저 한술 떠야 자기도 숟가락을 들이댈 수 있을 터였다.
“그래 먹자. 추운데 걸달러 다니느라 고생 많았다. 잘 먹을게.”
[…] 눈앞이 캄캄했다. 밥 한 끼 먹는 게 이렇게 힘든데 과연 이네들과 함께 살아가는 일이 가능할 것인가. --- pp.55~56 「깡통 안에 든 밥」 중에서
“노동청년회는 이즈음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요? 우려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해주세요.”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이때가 기회다 싶었다. 차트를 만드는 등 철저히 준비한 끝에 주교회의에 나섰다. 그러고는 대한민국의 노동 현실을, 산업체의 구조적인 문제들을, 한국노총의 어용 행각을, 노동청년회의 활동과 그간의 성과에 대해 한 시간 넘게 상세히 보고를 올렸다. 전국회장으로 일을 시작하고 1년여 뒤의 일이었다.
나중에는 이 일이 로마 교황청에까지 보고되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당시 교황이던 바오로 6세가 친히 답신을 보내왔다.
“너무 강경하게 투쟁적으로 나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대립과 투쟁보다는 타협(Compromise, 화해, 양보)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청년회의 날 선 예봉을 꺾게 하는, 조금은 실망스러운 반응이었다. 그럼에도 5천만 원의 지원금을 배로 늘려주셨다. 무언의 응원을 하셨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 p.91 「성당과 함께 청년노동자들과 함께」 중에서
“통대(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대회)가 곧 대통령을 세울 텐데, 보고만 있을 겁니까?”
“막아야지요. 국민대회를 제대로 열어서 목소리를 내야지요.”
“좋습니다. 어서 준비합시다.”
“하지만 사람 모으기가 보통 어렵지가 않아서.”
“방법이 있어요.”
조심스러운 나를 향해 조성우 씨가 눈을 반짝였다.
“유진산 씨가 한번 써먹은 방법인데, 위장결혼식을 여는 겁니다.”
“아…… 거짓말로 사람을 모으자고요?”
“그것 아니고는 방법이 없잖아요.” --- pp.113~114 「비상계엄과 위장결혼식」 중에서
박정희가 없었다면 과연 우리나라의 경제 부흥이 불가능했을까? 장면 정부는 유약하기는 했지만 민주정권으로서 가진 경제건설의 청사진은 분명했다. 4.19 혁명 후 합법적으로 세워진 민주당 정권은 대한민국 근대화를 위해 경제 제일주의와 수출 제일주의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태백산 계획, 울산공업단지 조성 계획을 세웠다. 또한 그에 필요한 자본을 동원하고자 대일 청구권자금, 미국의 대한원조증액 요청, 독일 등 선진국의 차관도입, 외국기업의 투자유치 계획 등에 관한 대강의 교섭안까지 마련했다. 5.16 세력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이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되돌렸다. 박정희는 민주당 정권과 이병철 등 실력 있는 경제인들의 조직체인 한국경제협의회가 합심해 만든 민주당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몽땅 빼앗았다. 그러고는 앞에 신新 자 하나만 덧붙여 신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표방했다. 마치 계획안을 자기들이 만든 것처럼 내세웠다.
우리 국민들은 근면하다. 열심히 일하는 성실한 사람들이다. 바로 이것이 대한민국의 경제를 일으켜 세운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역사 속에 박정희가 존재하지 않았다 해도, 2022년 오늘날 우리의 경제 수준이 여전히 후진국 상태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 pp.119~120 「비상계엄과 위장결혼식」 중에서
“이걸 출판해주실 수 있을까요? 대한민국에 없어서는 안 될 책이 될 겁니다.”
“무슨 내용인가요?”
“‘전태일 평전’입니다. 수배 생활 하면서 쓴 글이지요.”
[…] 출판사로서도 부담이 컸고, 국내에서 출간했다가는 서점에 뿌리기도 전에 여러 사람 잡혀갈 것 같았다. […] 우리글로 쓰인 원고가 바다를 건너 일본에서 일본어로 번역되어 영화로 만들어지고, 이어 책으로 출간되고, 그 책의 판권을 가져와서 번역서를 내었다. 부끄러운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과정을 통해 1983년에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이 책은 사회적으로 어마어마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책을 읽은 수많은 이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고, 우리 시대에 영원히 남을 고전이 되었다. --- pp.144~145 「청계천의 노동자들」 중에서
대선이 끝났다. 결과는 모두가 원하지 않은 종류의 것이었다. 참담했다. 암담했다. 개표가 진행되는 시간에는 민통련 사무실이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는데, 노태우 당선이 확실시되자 모두 썰물 나가듯이 싹 빠져나가고 없었다. […] 그때의 고독감이라는 것은 실제로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었다. 이후로 ‘이창복 죽일 놈’이라는 소리가 한 다리 건너 들려왔다. 고개도 못 들 노릇이었다. 그 여파가 가라앉는 데만 3년은 걸린 것 같다. 그나마 가라앉아서 다행이라 할 일이었다.
재야단체로서는 사상 최초로 특정 대선 후보를 지지했던 정치적 실험모델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 이후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 분열은 커져만 갔다. 실무적인 위치에 있는 내 입장에서 많은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작용할 정도였다. 결국 민통련은 해체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는 지경이 되었다. 민통련의 시대가 가고 전민련의 시대가 도래했다. --- pp.158~159 「1987의 파도와 이후의 고독」 중에서
사태가 급박했다. 7시 55분께 임진각 3층 특실에서 구본태 국토통일원 남북대화 사무국 대화 조정관과 이해학 위원장, 조성우 추진대표, 백기완 전민련 고문 등이 10여 분에 걸쳐 토론을 벌였으나 양측의 입장 차이만을 확인한 채 헤어졌다. 판문점에 적어도 아침 7시 50분에는 입장해야 했다. 그런데 8시 30분이 넘어서까지 정부안을 받아들일 것인지 여부가 결정 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자칫 실무회담 자체가 성사 안 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
오후 1시 30분에 다시 3차 회의가 열리고 대책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내가 주장했다.
“정부의 입장을 받아들입시다. 일단 그렇게 합시다.”
수군수군 눈치만 살피는 분위기였다. 그야말로 그 순간, 모든 것을 뒤집어써도 좋다는 심정이었다.
“언론에서 난리예요. 범민족대회가 과연 성사될 것인지, 신문에서 매일같이 머리기사로 다뤄지고 있어요. 외신 기자들도 우리의 움직임을 매일같이 자국으로 송고하는 중이지요. 사람들의 관심이 이렇게 큰데, 자칫 회담 성사에 실패하면 비난의 화살이 모조리 우리 전민련에게 쏟아질 겁니다. 내가 모든 책임을 질게요. 정부의 요구를 수용합시다.” --- pp.183~184 「남·북·해외의 민간을 한자리에 모으자」 중에서
국회의원 세비가 적지는 않았다. 한 달에 9백만 원 정도 받은 것 같다. 그런데 그것 가지고도 살림이 빠듯했다. 매달 빚이 늘어갈 정도였다. 일단 원주지구당 운영하는 데 월세 등이 기본적으로 400만 원 이상 빠져나갔다. […] 농담이 아니라, 국회의원 한 번 더 해먹었다간 집안이 망해나갈 판이었다. […]
두 번째, 권력의 문제였다. 재야운동권이 모이는 데 가면 그곳이 어디건 늘 상석을 차지하는 나였다. 그런데 국회의원이 되어 의원 총회에 가보면 내가 앉을 자리가 흔치 않았다. 피치 못해 뒤에 서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것을 참기가 힘들었다. 알게 모르게 권력에 길들여지고 권력의 노예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
3일 밤낮을 고민했다. 밤잠을 설쳐가면서 고민했다. 그러고는 불출마로 가닥을 잡았다. 다른 누구와 한 차례 상의도 없이 홀로 결론을 내리고는 이를 발표했다. 그러자 사람들의 반응이, 아니, 반발이 엄청났다. 지구당에 서는 ‘일방적으로 이러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며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 pp.243~244 「고민 끝의 불출마선언과 다음 과제」 중에서
미국은 기본적으로 6.15 정상회담 개최에 반대하는, 적어도 환영하지는 않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이 끈질기게 설득한 나머지 결국 미국도 용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 민족 내부의 일입니다. 우리에게 믿고 맡겨주세요. 우려하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이 한발 물러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한번 세운 원칙은 철저히 고수하는 미국이 끝내 양보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김대중 대통령을, 그간 무수하게 고생하며 옥고를 치르며 그럼에도 통일운동을 끊임없이 전개해왔던 김대중 대통령의 이력을, 미국도 차마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 부분을 존중해주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은 없었지만, 만일 이명박이나 박근혜가 북한과 정상회담을 하겠다고 미국에 요청했다면 그때는 사정이 달랐을 것이다. 통일운동이란 것이 그렇게나 어려운 분야이다. --- p.296 「진정한 동맹은 누구인가」 중에서
남북교류협력법이 웃긴다. 남북 민간교류 활성화를 위한다는 취지에서 남북 간 교류와 접촉을 신고제로 해놓았는데, 이게 허가제 못지않게 문턱이 높다. 각종 행사를 위해 중국 등에서 북한 사람들을 만나기로 했다는 신고서를 내면, 이걸 받아주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요컨대 팩스로 신고서를 보내면 받기야 분명히 받겠지만 승인거부 등의 조치를 취하고 만다. 우리로서는 신고를 했으니 일을 추진하는데, 뒤에 가서는 ‘신고서를 못 받았다’는 이유로 과태료가 붙는다. […] 그래서 대여섯 번에 걸쳐 돈 천만 원 정도를 납부한 것 같다. ‘나중에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어째서 그렇게 열심히 내느냐’고 사람들이 묻는다. 자존심 문제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통일단체의 대표로서 정정당당하고 떳떳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6.15 남측위원회는 민주노총, 한국노총, YMCA, YWCA 등 대한민국의 시민단체들이 거의 다 들어와 있는 거대 조직이다. 현재까지는 단군 이래 최대이자 유일무이한 통일운동 단체라고 불린다. 회원단체가 납부하는 회비로 운영되며 정부로부터는 지원금을 전혀 받지 않고 있다. 정부 지원을 받으면 정부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는 구조가 되기 쉬우므로, 어려운 대로 그렇게 운영해나가고 있다. […] 그리고 상임이사인 나는, 예전에 재야운동단체 시절부터 그랬듯, 보수 없이 ‘돈을 만들어 오는 자리’에 만족하고 있다.
--- pp.301~302 「통일운동의 어제, 오늘, 내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