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이 되시면 어떤 자세로 근무하실 겁니까?”
“퍼블릭 서번트public servant, 그러니까 ‘시민의 종’이라는 자세로 열심히 봉사하겠습니다.”
나는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대답했다. 영어를 섞는 것이 있어 보일 것이라는 어설픈 생각을 했다. 그러자 면접관은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시민의 종이라는 생각만으로 공무 수행을 잘할 수 있겠습니까?”
[…] 국가는 국민을 계몽의 대상으로 여겼고, 공무원은 국가 발전에 앞장서서 국민을 이끌고 있다는 우월의식이 있었다. 그런 시대에 공무원이 국민의 종이라는 말은 부합하지 않았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발달한 선진국에서나 들을 수 있는 요원한 말이었다. 면접관은 잘난 척하는 공무원 지원자를 점잖게 타일렀던 것이다.
--- p.26~27 「시민의 종이 되겠다고요?」 중에서
1988년 가을, 우리나라에서 하계 올림픽이 개최되어 세계의 이목이 개최지인 서울에 집중되었다. 서울특별시에서는 외국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환경개선 사업을 벌였다. 내 가 근무하는 망우2동사무소는 망우로, 봉오재길, 상봉터미널길, 용마산길 등 사면이 간선도로에 인접해 있어 다른 동보다 할 일이 많았다. 더군다나 망우로는 정동진에서 출발하는 올림픽 성화가 지나갈 성화 봉송로였다. 성화 봉송 장면이 전 세계에 생중계되기 때문에 더 신경 쓰였다. 우리는 큰길가의 담장, 상가 출입문, 불량 간판 등 카메라 앵글에 잡히는 모든 주변 환경을 정비해야 했다. […] 그러던 어느 날, 작업 시작한 지 두 시간쯤 지났나, 밤 10시경에 간식으로 순대에다 막걸리를 두어 잔씩 마셨다. 우리는 피곤하기도 하고 술기운도 돌아 길바닥에 주저앉아 담벼락에 기대 잠깐 졸고 있었다. 그때 아이의 손목을 잡고 바로 앞을 지나가는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얘, 너 공부 열심히 안 하면 나중에 커서 저렇게 된다.”
우리를 술 취한 노숙자로 본 것이다.
--- p.28~30 「공부 안 하면 노숙자 된다」 중에서
선거가 있던 시기였다. 언제부턴가 내가 결재받으러 들어갈 때마다 사무장이 사소한 것들을 트집 잡고 짜증을 냈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책상 좌측 서랍을 반쯤 열어놓는 것이다. 무슨 의미인지 몰라 선배에게 조용히 물어보니, 서랍에 상납할 돈을 넣으라는 뜻이었다. 선거 때가 되면 취로 인부 예산이 필요 이상으로 많이 내려왔다. 예전에 지급된 서류를 들여다보니, 평소에 일하지 않았던 생활보호대상자들이 노임을 받은 것으로 도장이 찍혀 있었다. 사회 담당 직원 서랍에는 생보자들의 목도장을 모은 빨간 인주투성이가 된 주머니가 있었다. 사무장의 속내는 일하지 않은 사람을 일한 것으로 서류를 만들어 자기에게 상납해야 하는데 내가 안 하니 갈군 것이다.
나는 내막을 알고도 취로 노임 지급 건으로 결재를 올릴 때마다 열려 있는 책상 서랍을 짐짓 모른 체했다. 그날도 결재를 올리자 사무장은 예외 없이 짜증을 내며 말이 안 되는 것으로 트집을 잡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내 책상에 돌아와 사직서를 썼다.
“소직은 개인 사정으로 인하여 사직하고자 하오니,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사흘째 집에서 놀고 있는데 동장이 전화했다. 마치 손주 녀석의 투정을 받아주는 할아버지 같은 목소리였다.
“박 주사, 며칠 쉬었으면 이제 나오지.”
반가웠지만 쑥스럽기도 했다. 나흘째 되던 날 출근했다. 사무장이 나를 보더니 반기며 말했다.
“박 주사는 진짜 양심적인 사람이다.”
그 후로 내가 올린 결재 서류에 트집 잡는 일이 없어졌다.
--- p.41~42 「홧김에 사직서」 중에서
나는 그전까지 사람이 그렇게 밥을 많이 먹을 수 있는 줄 몰랐다. 또 그렇게 큼지막한 눈물방울을 그토록 계속해서 떨구는 사람도 못 봤다. 사흘을 굶으면 남의 집 담을 넘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데 일주일을 제대로 못 먹었다니 오죽했으랴. 식사가 끝나자 당직자들이 쉬는 방에 데리고 갔다. 지금 밖에서 자면 안 되니, 오늘은 여기서 쉬고 내일 날이 밝거든 가시라고 했다. 그는 금방 잠들었다. 코 고는 소리가 엄청나게 컸다. 날이 새자 당직 근무 중인 나를 계면쩍게 쳐다보고는 고개 숙이며 말없이 떠났다.
나는 그가 밥 먹으면서 왜 그렇게 많은 눈물을 쏟았는지 알 수 없었다. 엄동설한에 노숙하다가 따뜻한 밥에 국물을 먹어서였을까? 뿔뿔이 흩어진 처자식들이 걱정되어서였을까? 아니면 국가 지도자가 잘못해서 나라가 망하고 사업이 망했는데, 말단 공무원이 따뜻하게 해주어 분노와 고마움이 교차했기 때문이었을까? 분명한 것은, 역사를 통해 볼 때 위정자가 잘못해서 전쟁이나 국가 부도 같은 큰 환란이 오면, 생사가 걸린 피해는 오롯이 국민이 입는다는 것이다.
--- p.101~102 「울면서 밥 먹는 남자」 중에서
다음 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사달이 났다. 호프집 주인이 직원들이 했던 말을 그 남자에게 전한 것이다. 그 남자가 나에게 전 화해서 어떤 놈이 그러더냐고 주민센터를 확 엎어버리겠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동네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막고 분란을 해소해야 할 공무원, 그것도 서무주임이 갈등의 원인을 제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나는 남자에게 용서를 비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분의 식당에 가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연속 사흘을 찾아다니며 빌고 또 빌었다. […] 돌이켜 보면 지금도 부끄럽고 수치스럽다. 한번 내뱉은 말은 다시 쓸어 담을 수 없으니 조심해야 한다. 공직자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 p.136~137 「다시 못 주워 담을 말」 중에서
“단장님이 소원을 이루시려면 국가를 상대로 두 번의 소송을 제기해 이겨야 합니다. 소송하려면 변호사를 사야 하니 돈이 들어가고, 오래 걸리는데 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아버지를 찾는 일이 시작되었다. 먼저 숙부와의 ‘친생자 관계 부존재 확인 소송’은 숙부가 살아 있어 유전자 감식으로 간단히 해결되었다. […] 돌아가신 아버지를 친부란에 기재하기 위한 소송이 고비였다. 소송에서 변호사는 단장님이 한자를 몰라 숙부모가 부모로 기재된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최근 ‘6?25 전사자 가족 찾아주기 사업’에 신청 서류를 내면서 알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사실을 뒷받침하기 위해 단장님 가족의 사연을 잘 알고 있는 고향 마을 사람들 전체가 나서서 인우보증을 서주었다.
근 1년 만에 전주지방법원으로부터 6?25전쟁 때 전사한 분이 단장님의 친아버지라는 확정판결을 받았다. […] 단장님은 어린 나이에 객지에서 고아처럼 떠돌며 고단한 삶을 살다가, 육십이 넘어서야 친아버지를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호적 정리가 끝나자, 나를 찾아와 눈물을 글썽였다.
“내게는 박 주임이 나라님이여…….”
--- p.140~142 「내게는 박 주임이 나라님이여」 중에서
메르스 사태가 끝나갈 무렵, 한 통의 항공 우편엽서가 날아왔다. 독일로 돌아간 사망자의 큰여동생이 내게 보낸 과분한 감사 인사였다.
“당황한 처지에 몰린 메르스 환자 보호자를 그렇게 성의 있게 돌봐주신 그 신념과 용기와 인내에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고마움을 이제라도 전하고 싶어서 늦었지만 몇 자 적습니다. 그날, 그 수고가 서울을 더욱 따뜻하고 살기 좋은, 인정 있는, 고향으로/고국으로 만드는 것 같습니다. 뜨거운 뼛가루 상자를 안고 우리 두 자매는 말을 잊어버렸었습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이런 감사의 인사가 박 계장님이 앞으로 계속 일하시는 데 작은 격려가 되기를 빕니다. 늘 건강하십시오. 10. Aug. 2015. 김영숙?김영희 드림”
--- p.177 「오빠의 분골함을 든 자매들」 중에서
우림시장 주변을 순찰하는데 옛날 일이 생각났다. 공무원을 막 시작했던 서기보 시절, 재산세 등 각종 세금 고지서를 가정에 배부하기 위해 골목을 부지런히 오갈 때였다. 동네에서 약국을 운영하던 나이 지긋한 사장님이 나를 불렀다. 수고 많다며 박카스 한 병을 따서 주더니 5만 원을 건네며 신발이나 한 켤레 사 신으라고 하셨다. 마치 큰형님이 막냇동생 대하듯 정겨운 표정이었다. 갓 들어온 공무원이 허접한 운동화를 신고 분주히 오가는 모습을 보고 측은지심이 들었을까? 어쩌면 공무원이 동네일 보는 게 고마워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30년 지나 동장이 되어 그 약국 자리에 가보니 약국은 흔적도 없고 다른 업소가 들어서 있었다. 주변 분에게 약국 사장님의 안부를 물었더니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 가난한 시골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서울에서 동장까지 했으니, 나름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동장으로 10개월 일하는 동안, 9급 서기보 시절을 잊지 않았다. 동장으로서 직원들이 기안한 문서를 결재하고 지시하는 것이 답답하기도 했다. 내가 직접 계획서를 만들고 실무를 하던 습관이 오랫동안 몸에 배어서였다. 동네 행사에서 동네 어른으로 예우받는 것이 쑥스러웠고, 실무자일 때가 편했다고 느꼈다. 나는 정서적으로 아니, 사실상 6급 공무원이었다.
--- p.214~215 「동장이 되어 돌아오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