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철학도 마찬가지다. 세계관이 본질적으로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이라는 말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역사철학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누구나 특정한 전제 위에 특정한 관점으로(즉, 세계관을 통해) 역사철학을 한다. 이것이 참이라면, ‘역사철학’과 ‘역사관’이 두 단어 앞에는 언제나 형용사가 필요할 것이다. ‘나의’ 역사철학, ‘당신’의 역사철학같이 말이다. 혹은 누군가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의 사상을 진리로 받아들여, 마르크스주의를 기반으로 세계를 인식하기로 결의했다면, 그 사람은 역사를 사유적으로 고찰할 때 ‘마르크스주의적 역사철학’(Marxist Philosophy of History)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적’(Christian)이라는 형용사가 붙은 ‘기독교 역사철학’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재정비된 세계관을 통해 역사의 정의·원리·의미·목적 등을 고찰하려는 지적 노력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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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신부들이 잉카제국의 이교도들에게 복음서를 들이밀었던 것처럼, 인본주의자들은 같은 믿음을 소유하지 않는 집단들에게 인권선언문을 들이댄다. 유시민 작가처럼, 사람들은 자신을 무신론자이자 유물론자라고 소개하는 동시에,231 자유의지와 평등사상과 인간의 존엄성을 믿는 인본주의자로 묘사한다.232 자신들이 한낱 짐승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인간이 짐승으로부터 성별된 존엄한 존재라고 믿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합리적 사고를 뛰어넘는 초월적 믿음이며, 그로부터 가치체계가 성립되었기에 아주 완벽한 ‘종교’다. 행여, 희곡 『이타카』(Ithaka)에서 인본주의자 뢴네가 인간을 세포와 벌레로 깎아내리는 과학주의자를 살해한 것처럼,233 인본주의자들이 과학주의적 인간관을 포기하는 날이 올지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인간 의 신성함은 여전히 초월적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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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무엇보다 ‘사람의 이야기’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시나 완전하신 분이기에, 변화를 전제로 하는 ‘역사성’을 가지시지 않는다. 하지만 변화무쌍한 인간과의 교제에 한정해선 역사성을 가지신다. 자연환경도 마찬가 지다. 자연은 변하지만 기계적이고 무의식적으로 변화할 뿐이다. 인류의 행보엔 언제나 의도·목적·동기 같은 ‘인격적 설명’이 요구되는 분야이다.9
하나님과 자연을 논하지 않고도 역사를 (불완전하나마) 써낼 수 있지만, 인간성을 박탈한 역사는 역사로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 역사학은 신학이 거나 지리학 혹은 생태학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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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역사란 무엇인가? 이 짧지만 굵은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역사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교회와 세상이 벌이는 영적 갈등의 이야기다. 역사는 종말로 가차 없이 달리며, 공의로운 심판으로 폐막한다. 하나님의 ‘섭리’라 함은, 역사가 비록 어지러운 혼돈의 연속으로 보일지라도, 거룩한 섭리의 안내를 받고 있음을 뜻한다. 하나님께선 자신의 뜻을 역사에 예정하셨고, 섭리는 불가항력적으로 모든 예정을 성취한다. 따라서 역사는 방향과 목적을 가진 ‘유의미한’ 발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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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어떤 부분에 관심을 둘 것인가’에 대한 질문도 이와 유사하다. 역 사학이 오직 과거에서 의미 있는 부분만을 다룬다면, 역사인식자는 먼저 역사의 목적을 찾아내야 한다. 역사의 목적은 인류가 만들어 가는 게 아니다. 창조주가 부여하는 것이다. 피조물은 자신의 목적을 조금도 가감할 수 없다. 따라서 역사학자는 역사의 창조주에게서 역사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로이드 존스에 따르면, 역사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있다. 그의 주장이 옳다면, 역사는 결국 하나님의 도성인 교회에 관한 것이다. 역사에선 오직 교회와 관련된 사건만이 의미를 가진다. 의자가 앉는 것에 관한 것이듯, 역사는 결국 교회에 관한 것이다. 나머지는 무가치하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로이드 존스와 토인비의 제언에 따라 다음 세 가지 영역에 주목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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