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랑 치고 가재 잡고 동전 줍고…. 일하고 공부하고 월급 타고…. 문학지 편집과 교정이야말로 일거양득 그 이상의 보람으로 다가왔다. 급여가 아주 빈약했지만 업무를 통해 얻어지는 알찬 공부에 비한다면 그런 걸 탓할 계제가 아니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공부가 박제된 이론 중심이라면, 업무를 통해 매일매일 몸으로 배우는 공부야말로 생생한 현장 학습이었다.
더욱이 이사장님과 오 국장님, 조정래 선생님한테서는 배울 점이 참 많았다. 특히 이사장님은 세상만사를 선험적으로 통찰한 직관의 달인이었다. 그 직관의 날카로움은 면도날보다 훨씬 더 번득였고, 정확성으로 말하자면 족집게를 뺨치고도 남았다. 이사장님께서는 항상 말씀을 아끼셨지만, 누군가의 말을 한두 마디만 들으면 벌써 결론을 꿰뚫고 명료한 해답까지 제시함으로써 세인을 놀라게 했다.
이사장님은 병약했다. 몸집이 호리호리했고, 체중은 평생 50킬로그램 미만에서 맴돌았다. 그런데도 누구 못지않게 통이 컸다. 중대한 결심을 하실 때에는 과감했다. 문화공보부(약칭 문공부, 문화체육관광부의 전신) 장관이나 서울특별시장 등 유관 기관의 고위층과 대화를 나눌 때에는 특유의 인품과 위엄과 결기로 초장부터 상대방의 기선을 제압했다. 이사장님은 한국 문단에 우뚝 선 불세출의 사령탑이었다.
황명 선생님 계신 곳에 늘 강민 선생님이 계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황 선생님 존함과 강 선생님 존함을 맞바꾸어 황민, 강명… 이렇게 부르기도 하였다.
두 분 선생님은 동국대학교 동문으로서 국문과 선후배이기도 하지만, 필자는 그 두 어른을 뵈올 때마다 언제나 푸근함과 든든함을 느끼곤 하였다. 필자가 생각하건대 두 분 선생님께는 공통점이 있으니, 그것은 쉽게 말해서 도량 넓은 대장부의 보스 기질이라고 하겠다.
또, 두 분은 진정한 우정이 무엇인가를, 인간답게 사는 길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황 선생님이 유명을 달리하신 지금, 강 선생님은 서울을 떠나 경기도 양평에 내려가 살고 계시지만, 지난날 황 선생님과 강 선생님이 마주 앉아 넉넉하게 대작을 하거나 식사하시는 모습은 그 자체로서 부럽기까지 하였다.
내가 추천을 완료한 직후 어느 날이던가, 하루는 안 선생님께서 직장으로 전화를 걸어 퇴근 후에 들러 달라고 하셨다. 나는 무슨 일인지 몹시 궁금해 하면서 퇴근길에 안 선생님 댁을 방문하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안 선생님께서는 당신의 서재에 미리 술상을 차려 놓고 기다리다가 내가 문간으로 들어서자 이만저만 반가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사모님도 함께 계셨다. 한국적 모성의 표양이던 사모님께서는 조용한 미소를 머금은 채 안 선생님 곁에 나란히 앉아 계셨다.
안 선생님은 곧 나를 술상머리에 앉힌 뒤 문단 데뷔를 축하한다면서 대뜸 술잔부터 권했다. 황송하기 짝이 없었다. 새파란 애송이가 연로하신 스승의 술잔을 받게 되다니…. 그날따라 안 선생님은 시종 기분이 좋아 술잔을 손에 들고 뱅글뱅글 돌리는 것이었다.
안 선생님은 본래 약주를 드실 때 술을 최대한 아끼면서 술잔을 그네 태우듯 간당간당 흔들거나 뱅글뱅글 돌리곤 하셨다. 그날도 안 선생님은 그렇게 약주를 즐기는 것이었다. 나는 안 선생님께서 주시는 술잔을 딸꼭딸꼭 받아 마셨다. 어느 정도 취흥이 도도해졌을 때 안 선생님께서 내게 물으셨다.
“이 군, 올해 몇 살인가?”
“스물여섯 살입니다.”
“오, 그래…. 아주 좋은 나이로군. 내가 그 나이 때 문단에 나왔지. 그런데 말이야…. 스물여섯 살이면 우리 집 막내아들보다 한 살 적군. 오늘부터 이 군이 우리 집 막내가 돼야겠어. 하하하….”
노작가 안수길은 밤새 시달렸다. 이제는 고질이 되어버린 천식으로 가슴을 후비는 듯한 기침을 거푸거푸 토했기 때문이었다. 밑자리도 따스운 편이었고, 한켠에는 석유난로가 벌겋게 달아 있었으나 기침은 여간해서 가라앉지 않았다.
아침상을 물리자 그는 다리를 포개고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았다. 한가로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취한이나 하고 있을 계제가 아니었다. 오늘은 원고 마감 날, 쓰다 남은 뒷부분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원래 밤에는 붓을 내지 않은 성미였는데 아침이 되자 결말까지 훤히 내다보이는 것이었다.
그는 원고지에 한 자 한 자 글을 써 내려갔다. 팔에 힘이 달리고 호흡마저 가빠 글자의 획이 다소 흔들렸으나 문장은 솔솔 풀려 나왔다.
드디어 원고지 상단의 풀칠한 자리에서 오족, 오족, 오조족… 하는 소리가 났다. 다 메워진 원고지 한 장을 떼어낸 것이다. 그 원고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곁에 앉은 부인에게로 넘겨졌다.
소설가 이문구(李文求, 1941~2003)는 장편소설 『매월당 김시습』을 통해 그를 되살려 냈다. 매월당의 면모가 잘 부각된 이 작품은 한때 베스트셀러가 되어 폭발적인 인기를 불러 모으는 가운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매월당의 생애 전체를 형상화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월당 김시습』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제공해 주었다.
어쨌든 매월당은 어느 모로 보나 연구 대상이 되고도 남을 신비로운 인물이었다. 『금오신화』의 등장인물들이 그렇듯 그 자신 여느 범부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이 알량한 재주로 입신양명을 위해 동분서주할 때 그는 비상한 두뇌와 역량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세상을 등진 채 남들이 생각하지도 못한 소설을 썼다는 자체가 자못 놀라운 일이다. 당대 최고의 천재였던 그가 한글로 소설을 썼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금오신화』가 한글 소설이 아닌 한문 소설이어서 못내 아쉽다. 국문학을 전공하는 학자라면 몰라도 오늘날 그의 한문 소설을 찾아 읽을 독자는 거의 없다.
이제 철도는 우리 일상생활 그 자체가 되었다. 숱한 사람들이 거의 매일 철도를 이용하고 있다. 철도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은 도서 지방과 산간벽지가 아니라면 철도는 문자 그대로 시민의 발이 되었고, 날이면 날마다 각종 물자를 끊임없이 실어 나름으로써 유통의 주역이 되었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의 일상생활과 철도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렇다면 역을, 철도를, 열차를 소재로 한 문학 작품이 본격적으로 창작되어야 한다. 그뿐 아니라 이 같은 소재의 작품들 중에서 길이 남아 두고두고 오래오래 읽힐 수 있는 명작이 나와야 한다. 이처럼 역을, 철도를, 열차를 명작의 주역으로 등장시키지는 못할망정 각 역에 얽힌 스토리마저 역사의 뒤안길로 속절없이 스러져 가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 반면, 역이 문학과 만나면 기대 이상의 명소로 재탄생할 수 있다. 예컨대 경춘선의 옛 신남역은 김유정역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위상이 달라졌다. 종전에는 전국의 다른 역과 다를 바 없는 작은 역에 지나지 않았지만, 오늘날 김유정역은 김유정문학촌과 연계되어 그 의미가 크게 달라졌다. 신남역은 그냥 무심코 지나치는 역이었지만 이제 김유정역을 그냥 지나칠 사람은 없다. 김유정역을 지나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김유정이라는 작가와 김유정문학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