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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한 인생은 사라지고

상냥한 인생은 사라지고

현대시학 기획시인선-22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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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3월 14일
쪽수, 무게, 크기 121쪽 | 125*188*20mm
ISBN13 9791192079127
ISBN10 1192079124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상냥한 인생은 사라지고

삼십 년 동안 아비의 생을 지탱해 준
버드나무 한 그루
도대체 얼마나 한다고
오라비는 제멋대로 버드나무를 팔아버렸나
덩달아 뿌리째 뽑혀나가
마구 뒹구는 기억들
버드나무 아래 앉아서
침착하고 내성적인 죽음을 기다리던 아비는
생생한 헛헛함으로 허둥대신다

다 해봤어요
이생에서 더 해볼 게 없어서
버드나무가 돈이 되나 알아봤어요.
귀농한답시고 들어와 다 팔아치우는
오라비는 눈치가 없는 건가요,
배짱이 무궁무진한가요

아비는 아직 살아 있고
오라비는 돈을 벌었어요
실패했다, 라는 문장의 주어는 언제나 저예요
다행이지요
제가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저는 매번 지고 말아요
팔랑이던 초록 버드나무 잎사귀처럼
상냥했던 인생은 이제 바빌론 강가에서나 만날 수 있어요

버드나무 팔려나갔다는 소식을 들은 날,
눈먼 가수가 검은 제비 같은 선글라스를 끼고
부르는 노래를 밤새 들었어요
별이 흘리는 눈물처럼 비가 내린다고
혼자인 게 더 나을 것 같다고
하지만 혼자이고 싶지 않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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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엉이와 빨간 기억

깊은 밤 부엉이는 훅훅
상수리나무 젖은 잎처럼 운다
훅훅 허공에 빈 주먹질 한다
훅훅 마른 나무에 입김 분다
나뭇가지에 훅훅 새순 돋는다
부엉이는 나무다 나무는 부엉이다

나무는 훅훅 어둠 속을 날아다닌다
적적한 달 귀퉁이 물고 가다가
주인을 알 수 없는 무덤에 흘리고 간다
반짝, 무덤에서 피어나는 빛
부엉이는 훅훅 자란다

부엉이는 밤새 여기저기서 훅훅 둥글게 울어쌓고
나는 고향집에 오면 아무 때나 잠이 쏟아진다
머리는 늘 동쪽에 두고 잔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해가 뜨는 쪽을 바라봐야 한다는 어른들의 무서운 말
앞산 무덤을 보며 자란, 오래된 습관이 빚어낸 말
누워 있는 방은 오래전 흙집 외양간이 있던 자리

훅훅 나무가 우는 밤이면 떠오르는 시절 하나,
다섯 살 무렵 외양간에 들어가
뽀얀 송아지처럼 훅훅,
어미 소의 젖을 빨아 먹던
빨간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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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못한 말

앞집 할매 담장 위로 쑥 고개 내밀고 물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하루 종일 집에서 뭣하요?

종일, 무화과나무 아래 놀고 있는 어린 고양이들을 보았어요
고양이를 지키는 어미 고양이를 보았어요
텃밭에 옮겨 심은 상추는 언제쯤 뿌리 내려 와싹와싹 자랄까 생각도 했어요
드디어, 저 멀리 산 아래 기차가 지나는 시간을 적어두었어요
배가 고프면 감자를 쪄서 검은 개와 나눠 먹으며
햇살 잘 드는 마루에 나와 시를 읽어요 그러다가
담장 너머 감나무 잎사귀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을 오래 바라봤어요
라고, 말하지 못했다

아따, 마당에 풀이 가득하고만, 할 일이 많겄소

풀을 다 뽑아버리면 풀벌레는 어디서 사나요?
여름밤 풀벌레 소리는 어떻게 듣나요?
그러면 제 귀는 밤새 잠 이루지 못할 텐데요,
마당을 북방의 초원이라 부르고 싶어요
무성해진 그곳에 누워 은하수를 보고 싶어요
라고, 말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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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서 만나자는 말

조선시대 시집간 딸은 명절이 오면
어머니와 반보기를 했다지
친정어머니가 반, 시집간 딸이 반
중간에서 짧은 만남 후
아쉬운 이별을 했다는 반보기

세상에서 이토록 간절한 말
중간에서 만나자는 말

내가 반을 가고 당신이 반을 오면
반이라도 만날 수 있는가 우리는
너무 멀리 가거나 혹은
미처 이르지 못해
결국 만나지 못하고
당신과 나의 중간은 어디쯤인가
지도에도 없는

중간에서 만나자는 말
세상에서 이토록 슬픈 말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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