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해교육은 일상생활을 하는데 가장 중요하다. 글을 읽고 쓰고 셈하는 것을 가르치고, 문자를 이해·활용하는 능력을 길러주는 교육이다. 문해는 개인의 기본권이지만 “비문해의 문제는 국가가 짊어져야 할 책무”다. 우리 나라도 1950년대부터 비문해 성인 전체를 대상으로 문맹퇴치운동을 펼쳤다. 2006년부터 ‘성인문해 지원 사업’을 실시하여 260만명(’08, 국립국어원 조사결과) 중 22.5만여명(8.5%)에게 문해교육을 제공했다. 그러나 최근의 다문화, 외국인, 탈북자의 증가 등으로 비문해 성인은 늘어나고 있는 상황(’14년 조사 결과 264만명으로 증가)이다. 그래서 지금도 일상생활에 필요한 읽고, 쓰고, 셈하기가 불가능한 18세 이상 성인 인구는 약 264만 명이다. 전체 성인 인구의 6.4% 해당한다.(국평원 조사, ’14년 통계청 승인) 또 신문해계층(’14년)이 “다문화 295,842명, 외국인 근로자 538,587명, 탈북자 26,000여 명에 이른다.”
『열하일기』의 인기는 상상 초월이었다. 그만큼 비판도 크게 일었다. 정조가 조선의 문체를 어그러뜨린 주범이 박지원이고, 그 책이 『열하일기』라고 할 정도로 파급력이 컸다. 나중에 『열하일기』 속의 “서학 관련 내용이 대거 삭제” 했어야 할 만큼 연암은 사회적 검열에 민감했다. 그래서 『渡江錄序』는 뜬금없는 글이 아니다. 이것은 박지원이 조선이라는 상징적 질서에 부합하려 한 흔적이다. 그러기 위해 박지원은 가면을 썼다. 그것을 라캉은 ‘상징적 거세’라 했다. 그 행위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
상징적 거세는 “즉각적인 심리적 정체성과 상징적 정체성(대타자 안에서 혹은 대타자에 대해서 내가 누군인지를 결정하는, 내가 쓰고 있는 상징적 가면이나 이름) 사이의 간극”이다. 연암 자신과 연암의 사회적 지위나 권위를 부여하는 상징적 이름 사이의 틈에서 생긴다. 그래서 주체는 결코 완전하게 자신의 상징적 가면이나 이름과 같을 수 없다.
『화두』에는 재미있는 시, 웃음을 화자내는 시가 참 많다. 기존의 진지함이 부드러움으로 바뀌어 있고, 선생 특유의 유머 감각이 살아 있다. 선생의 시집을 대하면 힘들기는 늘 마찬가지지만 이번처럼 웃어본 적은 별로 없다. 그 어리숙한 웃음에는 선생의 철학이 녹아 있다. 다양한 논리 구조가 자연스런 일상으로 변모해 있다. 웃음을 선사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갈래다. 彼我를 분별하려 하지만 잘 안 되는 데서 오는 웃음과, 그를 구분 못[안] 하는 데서 오는 웃음이다. 남편의 방심을 뚫고 아내가 던진 재떨이가 날아 왔다. 그리고는 두 바늘 꿰매야 하는 상처를 입었다. 분명 고소감이지만 부부이기에 그럴 수 없다. 이를 東學의 용어로 풀면 不然其然이다. 예기치 못 한 아내의 행동은 부부들 간에 있을 수 있는 부정[不然]적인 모습인 동시에 부부니까 그럴 수 있는 긍정[其然]적인 일면까지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이를 애기처럼 일러 바치는 화자의 모습에서 파안대소하게 된다.
심각한 이야기를 코믹하게 들려주는 화술이 돌아가신 길창덕 화백의 만화와 겹친다. 또, 초등학교 3학년 손주가 목욕하다가 벌거벗은 채로 나와서 할아버지에게 같이 목욕하자 조른다. 난감하고 멋쩍다. 無分別한 손주와 함께 훌렁 벗어 던지고 목욕할 수 있는 非分別한 할아버지가 되기에는 아직도 道力이 부족하다. 이것이 선생의 현주소다. 마음과 몸이 여전히 따로 논다. 그런가 하면, 아내 몰래 은행 이자 몇 푼 받으러 가는 ‘내’가 무척이나 신난다. 아내가 몰라주기를 바라고, 이런 날이 많기를 기원한다. 기가막힌 가장이지만 그 당찬(?) 위세가 귀엽고(?) 예쁘다.
배한봉의 시 제목은 간단 명료하다. 대부분 명사로 끝난다. 제목의 길이도 짧다. 1어절과 2어절 제목이 80%에 해당한다. 순환적 시간어를 애용하고 구체적 공간을 부각한다. 나머지는 생태계와 관련된 어휘를 동원하여 그가 즐기는 지상적 사유를 충족시킨다. 명사는 개념을 명확하게 하고, 사유의 범위를 한정한다. 그래서 명사로 끝나는 글들은 명쾌하고 시원하고 여운을 준다. 이는 배한봉이 사유하는 시인임을 알려준다. 행동보다는 관조, 관망, 침잠하는 시인임을 증거한다.
배한봉의 시제목은 하늘 ‘아래’를 중시한다. 그의 하늘 ‘아래’는 우주가 교감하고, 천지가 조화한다. 평등 속의 차별, 차별 속의 평등이 구현되고, 모든 것이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의 원인이 되어 얽혀 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세계, 데리다가 말한 차연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래서 제목은 짧아도 시는 길다. 간단 명료한 제목을 맛갈 나는 감성의 언어로 상술하기에 그렇다.
“내 시집[술래의 노래]만 나오면 한국시단이 발칵 뒤집힐 줄만 알았다.”
‘나의 독자들에게’(쑥고개) 했던 고백이다. 박석수의 시적 공간이 어떠했고, 그의 시가 어떻게 발아(發芽)했는가를 간명하게 밝혀주는 한 문장이다. 그의 초기 문학은 유아독존(唯我獨尊)의 절대 공간이 지배했다. 그만큼 그는 순진한 사람이었다. 달리 말하면 자신의 지행(知行) 공간에 갇혀 산 사람이었다.
자기 확신의 다른 말은 열정과 독단이다. 열정은 순백(純白)한 삶의 생기(生氣)이고 독단은 순정(純情)한 삶의 치기(稚氣)다. 생기는 불꽃이고 치기는 열꽃이다. 열정과 독단, 생기와 치기, 불꽃과 열꽃은 보편적인 자존심의 발로다. 그 중에서도 유아독존(唯我獨尊)은 시인의 전용상표다. 그래도 환상을 현실과 동일시 하지 않는다. 박석수는 어머니가 얻어주신 이잣돈으로 용감하게 시집을 냈다. 이런 면은 그가 순도 100%임을 보여주는 동시에 면역력 0%임도 동시에 알려준다. 그의 시가 상처투성이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박석수 시의 장소성과 다른 작가의 그것은 어떻게 닮고 다른가?
--- 본문 중에서
작가의 말
학위 논문인 ‘체질시학(體質詩學)’ 심화작업이 버겁다. 길은 먼데 날은 저물고, 마음은 급한데 걸음은 더디다. 걸음은 더디다. 이따금씩 밥 먹는 시간이 아까워 굶는다. 그러다가 며칠을 넋 놓고 앉아도 있다. 과연 이 방법론으로 보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나는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숨만 쉬면 나오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동분서주(東奔西走), 좌충우돌(左衝右突)한다. 이 글은 그런 흔적들이다.
---「글을 열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