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가리가 물속에 두 다리를 담그고 멍청히 서 있다
냇물이 두 다리를 뎅강 베어가는 줄도 모르고
왜가리가 빤히 두 눈을 물속에 꽂는다
냇물이 두 눈알을 몽창 빼가는 줄도 모르고
왜가리가 첨벙 냇물 속에 긴 부리를 박는다
냇물이 제 부리를 썩둑 베어가는 줄도 모르고
두 다리가 잘리고 두 눈알이 빠지고 긴 부리가 잘린
왜가리가 퍼드득 날갯짓을 하며
하늘 높이 떠오른다
아주 가볍게 떠올라 하늘 깊이
온몸을 던져 넣는다
냇물도 하늘로 퍼드득 솟구치다
다시 흘러간다
--- 「이나명, 왜가리는 왜 몸이 가벼운가」 중에서
벼랑 같은 아파트들
언제부터 이 칸을 위해 역병처럼 사는지
마스크를 쓰고 마신 숨을 다시 뱉는다
밤이 되면 불 꺼진 口에 눕는 생은 행간 밖
무릎을 꿇다가도 낙타처럼 일어서고 싶은데
태양 아래 끓어오르던 그 길은 어디로 가고
삭제된 口들로 채워지는 공백
포클레인 자국이 길을 만들면서부터
파헤친 흙만큼 산이 생기고
나의 쓸모는 모래가 바퀴에 들러붙는 듯했다
누군가 타워크레인을 옮겨놓자
레미콘이 합세하기 시작했다
시멘트 채운 몸에 눈물을 버무리며
바람의 설법에 귀를 기울이며
거대한 공사판의 나는 먼지로 사라지고, 살아지고
--- 「박수빈, 원고지」 중에서
대추나무 가지 사이에
돌멩이 하나 박혀 있었다
드릴 것이
그것뿐이라
아무 소원도
적어놓지 못하였다
천년만년 가슴속에
묻어둘 것이
돌멩이 하나뿐이라
금동보석함에 담아서 드리기도 무엇해서
대추나무 가지 사이에
꾹꾹 눌러 끼워놓았다
그것이 무슨 보석이라고
돌멩이 위에
두툼하게 덧살을
붙여가고 있었다
--- 「진영대, 복장(腹藏)」 중에서
마음 안에
매미 있는가 호랑이 있는가
곽암과 만해가 물었던 길
길의 끝자락에서
내가 심우(尋牛)하려니
파란 눈의
융에게 길을 물어
페르조나를 해체한다
동시(東時)와 서공(西空)이 소통하며
하나로 돌아가는 길
심우꽃 만발하려는가.
--- 「서주석, 심우꽃」 중에서
한 뼘 남짓 될까,
학의 다리로 만들었다는 하얀 뼈피리
간 봄 떨어진 동백꽃 울음으로
삼경 지나는 초승달 소리로
별 총총 새벽하늘 건너갈 때
가느다란 두 다리 가지런히 모아 펴고
겨울 바다 깊숙이 뛰어들더니
꿈결이었나,
올곧은 다리가 저어 간 은하의 밤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전생(前生)의 한 뼘
--- 「윤정구, 한 뼘」 중에서
발을 헛디뎌 몸이 넘어진다
산도 넘어진다
겨우 추슬러 마음 하나 도로 세우고
이제는 보이지 않는 너를
혼자서 본다
설사면에 튀긴 햇살이 칼끝처럼 몸속을 파고든다
냄새로 찾아가는 설산의 내막
바람은 울음으로나 길을 찾아 가는데
여러 번 꺾인 몸은
조각난 얼음 속으로 파묻히고 밟히면서
누구를 찾아 가는가
끝도 없는 고집
혼자 앞장 세워 겨우 모퉁이 돌 때
아, 저기 설산 아래 까맣게 떠오르는 사람
이름도 지워버린 채
울지도 못하면서
무릎만 젖어 흐르는 너는
오래 흔들리면서
무한정 기다리는 나는
--- 「최영규, 설산 아래에 서서」 중에서
새 학기 첫 번째 강의시간.
강의실 여기저기 무겁게 자리 잡고 있는 긴장을 깨우며
출석부 속의 학생들 이름을 부르는데,
김슬기, 박슬기, 이슬기 등,
슬기, 라는 이름이 유난히 많아서,
이 강의실은 강이네요, 했다.
학생들이 의아해했다.
슬기, 라는 이름을 가진 세 명의 이름을 합하면,
다슬기니까 여기가 강이지요.
자네들만으로는 강이 안 되는데,
김바위, 라는 학생도 있어서
강이 되는 겁니다.
강은 서로 부둥켜안고 바다로 흘러가는 성질이 있습니다.
나도 강이 되어 함께 할 테니 여러분도
열심히 공부해 강처럼 흘러
흘러 바다로 갑시다, 라고 부탁하자
강의실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주는
강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 「오석륜, 강의실에 흐르는 강」 중에서
칼날 위에 머리카락을 올려놓고
입으로 불면 끊어지는
취모검, 칼 한 자루 생각한다
잡풀 무성한 마음까지도 쓰윽 슥
단칼에 벨 수 있는
이를테면 사람을, 세상을 살리는
활인검
쇳물이 되었다가 뜨겁게 열 가한 칼날이
도라지꽃으로 푸른빛을 띨 때
때려 펴고 갈아주길 무수히 반복하면
고통의 한 가운데
녹슬지 않는 금강의 시간들
언젠가의 생애에 내 한 번은
대장장이 곳집의 칼이었을지도
길이 1미터 넘는, 날카롭게 날이 선
칼의 잔혹한 말을 견디며
더 나은 삶을 위해 바치는 또 다른 눈부심
기묘한 아름다움의 칼들
제 마음을 무수히 베이고서야 한 마음을 얻는 칼자국들
속이 하얗게 빛나는 잘 벼린 칼의 날을 맨손으로 짚고
고요히 목숨을 건너는 하루,
나는 나를 잊는다
--- 「한이나, 파릉의 취모검」 중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반한다는 것은
헬 수 없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은
셀 수 없는 까닭이 있을 것이다
어느 순간 내 마음에 깊게 파고든
정말로 나를 뒤흔든 말 한 마디
어느 순간 내 가슴에 넓게 배어든
진실로 나를 이끌었던 몸짓 하나
아아, 나를 뒤흔들었던 한 마디 말
무연한 너를 끌어당긴 하나의 몸짓.
--- 「고영섭, 마음을 사는 일―화두 1」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