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문득 안경을 벗은 내 얼굴에서 낯설고도 익숙한 사람이 스친다. 익숙한 주름, 익숙한 표정. 누구였더라. 한참을 고민하다 내뱉은 한 마디. ‘아! 아버지다.’ 거울 속에 아버지가 있다. 아니, 내 얼굴에 아버지가 있다. 서른이 된 내 얼굴에서 이제 아버지의 모습이 비치기 시작한다. --- p.19
그러니 이 어려움은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버지를 닮은 나니까, 아마 아버지도 나만큼 둔했을 테고 어리숙했을 테다. 남들은 잘 해내지만, 내게 유독 버거운 일이 하나씩은 있지 않은가. 어쩌면 아버지에겐 아버지란 역할이 그렇지 않았을까. 세상을 이기지 못한 나의 아버지였지만, 직업으로 당신의 존재와 가치를 평가했던 세상처럼 나를 향한 역할과 책임만으로 당신의 존재를 묻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란 역할을 버거워했던 그였기에 이젠 잣대를 내려놓고 그의 인생을 조금 더 편히 바라보고 싶다. --- p.31
누군가의 아들에게 당신의 아버지와 나눈 하루의 대화를 전하는 것이 나의 상실을 끝낼 수 있는 가장 건강한 방법이었다. 내가 만난 아버지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마음을 기록하고, 아버지란 단어 안에서 다양하게 살아가는 삶을 직면하는 것. 아버지의 퇴근을 기다렸던 어린 시절의 긴 밤을 알기에, 오늘도 긴 밤을 보낼 이들을 위해 낯선 아버지들의 고민과 꿈을 엮는 것을 나의 다음 과제로 정했다. --- p.40
그의 대답을 듣다 신발을 보았다. 신발 밑창이 떨어지면 버릴 법도 한데 그는 굳이 검은 실로 낡은 밑창과 신발을 꿰매 놓았다. 이처럼 이태백의 지나버린 아픔도 기워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모나미 볼펜에 꽂아 쓰는 몽당연필처럼, 이태백의 낡은 신발처럼 구멍이 나버린 지난 경험도 얼기설기 묶어내 어느 하나 버리지 않고 자신의 삶을 마주하길 바랐다. 좁고, 춥고, 불안한 주차 관리실이지만, 이태백이 있는 이곳은 분명 존엄을 지키기 위한 삶의 현장이었다. --- p.52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 아버지란 존재에 대해 조금씩, 객관적으로 다가간다. 돌팔이의 고백을 들으며 그렇다면 나는 가장이 아닌 개인으로서 아버지를 바라본 적이 있나 생각해보았다. 나 역시 기능으로만 아버지를 평가했던 것은 아닐까. 그 잣대가 과연 타당했을까. 가장으로서는 적합하지 않아도 분명 아버지에게도 개인으로의 삶과 의미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타인으로서 아버지의 삶을 바라볼 수 있을 때, 그의 삶을 있는 그대로 존중할 수 있을 때 나와 아버지의 진정한 다음 관계가 시작될 것이다. --- p.62
힘겹게 감춰둔 마음을 꺼내자 쌓아두었던 슬픔이 한 번에 쏟아졌다. 내가 설정한 ‘좋은 아버지’는 완벽히 내 아버지와 반대의 모습이다. 아버지가 했던 일을 하지 않고, 그가 하지 않았던 일들을 해내는 것. 이 단순한 반전이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좋은 아버지의 모습이다. 벅시도 나와 같았다. 그 역시 경험하지 못한 아버지의 뼈대를 직접 그려내야 했다. 약속을 지키는 사람,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 뛰어난 능력은 없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는 사람. 벅시와 내가 그린 아버지의 모습은 닮아있다. --- p.84
한 살씩 나이를 먹고 어른에 가까워질수록 상실은 일상이 될 테고, 많은 것을 잃어갈수록 나와 닮은 누군가의 얼굴은 또렷해질 것이다. 비록 나는 쉽지 않겠지만, 아버지와 아이라는 두 세계를 넘나들며 꺼낸 작업이 누군가에겐 서로를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이 기록이 누군가에게 아버지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갖는 이유가 될 수 있다면, 나도 포기하지 않고 내 아버지를 향한 되새김질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 p.96
내가 가진 단어 ‘아버지’는 가볍고 약했지만 애써 찾아가 진행한 다양한 아버지와의 인터뷰로 조금씩 묵직해지고 있다. 내가 지켜본 것처럼 앞으로 앵도 나를 지켜봐달라고 했다. 내가 상실한 사연과 기억을 새로이 담아내 어떻게 아버지란 단어를 새롭게 채워가는지 지켜봐달라고 말이다. --- p.136
모든 인터뷰가 끝나고 나는 어느 정도 아버지와의 닮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렇게도 살아가고, 저렇게도 살아가며 모두 아버지라 불리는 그들의 여지가 내게 다를 수 있다는 희망도 주었다. 내가 닮아야 할 아버지, 내가 향해야 할 아버지는 자기의 방식으로 당당히 살아가는 아버지에 있다. 언제나 다름은 닮음에서 시작한다. --- p.148
아직도 나의 꿈은 거창하다. 모두가 대화를 통해 상처를 회복하는 것, 두려워하지 않고 대화를 건넬 수 있는 효과적인 도구를 제작하는 것. 타인의 아물지 못한 흉터에 참고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하는 것이 오래 간직하고픈 나의 꿈이다.
--- p.1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