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관조 씻기기』는 언어가 닿지 않는 지점 또는 사물이나 사물과의 관계에서 생성되는 무수한 질문과 운동에 대한 왕성한 호기심을 보여 주는데, 시인은 거기에 은유적인 이름을 붙여 주기보다는 감추면서 드러내기를 통해 오는 미세한 자극을 즐기는 것 같다. 그가 앞으로 이루게 될 시적 성취에 대한 기다림은 불안이 아니라 큰 즐거움이다.
김기택(시인)
너무 빨리 시작해서 너무 빨리 끝나는 음악 같은 시의 각 연들은 각각 하나의 인상 깊은 구체성에 도달하고 있다. 이러한 인상적인 조각들이 또 모여 세상 안에 숨겨진 서늘하고 끔찍한 역설을 드러낸다. 그렇다. 무미건조한 신문지 몇 장처럼 간결하고 감정이 실리지 않는 몇 개의 시구가 세계의 거대한 피투성이 머리를 덮고 있다. 그 덮은 모습은 피투성이를 직접 대면하는 것보다 끔찍하다. 이렇게 시어에 마음을 섞는 동안 이미 우리는 이상한 아름다움으로 차 있는 건물에 저도 모르는 사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서동욱(시인.문학평론가)
언어에게 옷을 입히는 방식이 아니라 언어를 씻기는 방식을 통해 그는 우리에게 새로운 시적 경험을 제공한다. 그는 예술적인 다양한 ‘방법론’을 지워 버리는 ‘방법론’을 지닌 희귀한 시인이다. ‘그냥’ 말하겠다는 것이 미적 망각이 아니라 의지일 때, 그의 시학은 우리의 눈을 씻긴다. 그를 따라서 “놀라울 일이 없는데도 나는 놀란다”. 그에게 ‘낯설게 하기’는 기법이 아니라 세계다. 목소리를 잃어버린 사물의 침묵이 인간적인 목소리 너머에서 깨어나고 있다. 나는 ‘시’라고 말하고서, ‘시’라고 말한 것이 놀랍고 ‘시’가 놀랍다. 김수영의 말대로 “침묵의 한 걸음 앞의 시, 이것이 성실한 시”라면, 황인찬의 시를 두고 성실한 시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김행숙(시인)
그렇다. 신성(神聖). 최근 어떤 젊은 시에서 우리가 신성을 경험한 적이 있었던가? 그의 독특한 시적 자질의 핵은 그가 절대로 이를 직설적으로 제안하지 않고 지극히 자연스럽고도 아름다운 장면으로 그린다는 점일 것이다. 덧붙여 그가 대상을 쉽게 침범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의 시를 읽다 보면 그것이 어떤 대상이든 간에 주체와 대상 사이에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이상한 격리감’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으리라. 그는 지상의 모든 존재를 신성의 잠재적 구현자로 예감하고 있기 때문에 감히 신을 만질 수 없는 수행자처럼, 마치 울타리를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믿는 신자처럼 어떤 종교적인 염결성으로 대상을 바라본다고 말이다. 공백은 격리감으로 뒤바뀐다. 그야말로 신성한 격리감이다.
박상수(시인·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