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그래픽 디자인을 어떻게 전시할 것인가’ 하는 기본 질문에서 출발한다. 각 장은 우리가 관심을 두는 개념과 접근법을 다루지만, 그런 주제를 추상적으로 논하기보다는 구체적인 전시 사례들을 통해 살펴본다. 그러므로 이 책은 2000년대 중반 이후 우리가 관심 있게 보거나 의미 있게 참여한 그래픽 디자인 전시회들의 짤막한 리뷰 모음으로 읽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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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디자인 전시에 내재하는 문제는 반대급부로 새로운 기회를 암시하기도 한다. 작품을 원래 맥락에서 분리하면, 직접적 의미를 이해하기는 어려워지는 대신 비판적 성찰에 필요한 거리를 얼마간 확보할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픽 디자인은 일상생활에 너무나 밀접히 얽혀 있기에, 실제 맥락 안에서는 잠시 멈추고 디자인의 존재나 기능, 의미를 일부러 생각해 보기가 쉽지 않다. 반면, 미술관은 사물을 고립해 관조하는 데 적합한 환경을 조성해 준다. 덕분에 우리는 일상 사물을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게 된다.
--- p.54
2005년에 비교하면, 2014년에 열린 메비스 판 되르선 회고전에는 훨씬 관습적인 디스플레이 방법이 쓰였는데, 이는 작가들이 성숙했다거나 보수화한 증거라기보다 오히려 미술관 전시 제도를 반어적으로 비꼬는 비평에 가까워 보였다. 퍽 상세히 작성되고 작품보다도 크게 표시돼 전시장을 시각적으로 지배하는 캡션은 이런 관찰을 뒷받침했다. 어떤 면에서 이는 미술 전시회에서 보조적 지위에 머무는?작품 이해에는 필요해도 감상에는 방해만 되므로 되도록 눈에 띄지 않게 처리되어야 하는?캡션에 주인공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그래픽 디자인의 문화적 위계를 꼬집는 자조적 농담처럼 보이기도 했다.
--- p.62
‘작업실을 전시장으로 옮겨 일정 기간 그곳에서 공공연히 운영하며 작품 생산 과정을 실시간으로 공개한다’?언뜻 기발하고 재미있는 발상처럼 들린다. 그렇지만 이 ‘재미’의 정체는 뭘까? 예술과 삶이 마침내 만나는 순간에 관한 상상일까? 창작자의 신비한 내면에 들어가는 열쇠에 대한 기대일까? 아니면 좀 더 불길하게, 리얼리티 TV처럼 타인의 일상을 엿보고 싶다는 관음증일까? 그렇다면 혹시 그런 충동을 부채질하는 전략은 전시(exhibition)를 노출증(exhibitionism)으로 변질시켜 관객의 관음증과 공모를 꾀하는 악덕 아닐까?
--- p.111-112
그런데 특정 전시의 성과와 성패를 따지기 전에, 디자인과 픽션을 결부하는 전시 전략 일반의 시대적 유효성에 관해서도 생각해 볼 만하다. (...) 적어도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2016년 이후, 대체 현실이나 ‘대안적 사실’은 문화 예술에서 사변적으로 논의되는 개념이 아니라 현실 정치와 국가 간 정보 전쟁에서 사용되는 무기가 됐다. 팬데믹과 백신에 관한 음모론이 판치는 상황에서, 사실과 허구를 분간하는 힘은 생사를 가르는 사안이 되기까지 했다. 그러니만큼 공상에 관해 이야기하기는 훨씬 어려워졌고, 행여나 픽션을 만우절 장난처럼 부리는 건 무책임하다고 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그런데도 ‘진실’은 여전히 고리타분해 보인다면, 그건 우리가 디자인을 통해 진실을 이야기하는 방법을 업데이트할 때가 지났다는 뜻이다.
--- p.149-151
혹시 이는 우리가 이 책 전반부에서 관찰한 변화, 즉 그래픽 디자인 전시의 수행적 전환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사례일까? 수행, 퍼포먼스, 공연의 사회적 가치는 반복할 수 없는 ‘순간’을 여러 사람이 공유하는 데 있다. 작품에 진열된 곳이 어디건 간에, 함께하는 경험으로서 전시회의 ‘회’는 공간뿐 아니라 시간과도 깊이 관련된 개념이다. 그래픽 디자인을 전시하는 전략이 세계의 네 번째 차원에 좀 더 예민해진다면, 작품의 ‘존재감’이나 ‘아우라’에 대한 걱정을 덜고 실세계 안팎에서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사건으로서 전시회의 가치를 새삼 소중히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 p.161
혹시 최근 들어 이런 불일치가 구조화하는 듯한 인상을 받지는 않는가? 한편에서, 그래픽 디자인 결과물은 주로 디자인 페스티벌이나 페어 같은 단기적, 상업적 행사에 위임되고, 비평적 접근을 허락하는 전시회는 디자인을 대상으로 바라보고 해체하는 데 치중하는 나머지 디자이너의 일상적 활동에서 멀어지는 경향이 엿보인다. 즉, 전시 범주가 사회적으로 분업화하는 조짐을 보인다는 뜻이다. 다른 한편, 전시 수용 방식에서는 그런 분화가 아직 자리 잡지 않은 탓에, 디자인 페어를 찾은 관객은 화려한 피상성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디자인 전시회 관객은 소외감을 느끼는 일이 반복된다.
--- p.164-1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