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는 나중에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에야 자기의 무지를 깨닫고 눈물을 흘리며 사랑을 고백했는데 우리는 무지를 인정하지 못하여 흘릴 눈물조차 없는 것은 아닙니까? 이천 년 전에 인류에게 다가오시어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어부와 세리를 제자로 부르시고, 병자를 낫게 하시고, 고아와 과부, 죄인과 약자를 위로하시고,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신 예수님과는 다른 나만의 예수님상을 그리며 믿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분께서 행하신 치유에만 관심이 있고, ‘병을 고치시는 그분의 마음’엔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닙니까?
--- p.38
그분은 사람들 가운데서 사람의 아들로 세상에 태어나셨고, 그렇게 여느 사람과 다르지 않게 생로병사의 굴레에서 고통받으시다가 고통 속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자처하시면서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너희는 온갖 모욕과 수치를 당하며 고통받은 이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그 얼굴을 보면서 너희 창자가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껴 본 적이 있는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하여 온갖 수치를 감수하며 자기를 사 가기를 바라며 저녁때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길모퉁이에 서 있는 가장家長의 안타까운 마음(마태 20,1-15)과 하나 되어 본 적이 있는가?”
--- p.62
예수님은 사람들을 당신을 ‘따르는 사람’과 ‘따르지 않는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는 것을 경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이유는(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는) 편견 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차별 없이 세상을 사랑하며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는 신앙인과 비신앙인, ‘내 편’과 ‘네 편’, ‘지지자’와 ‘반대자’를 갈라 세우며 대립하는 일체를 뛰어넘어 모든 이들 안에서 하느님의 생명을 느끼며 살기 위해서입니다.
--- p.157
세상에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차원이 있습니다. 사랑은 언어의 논쟁을 벗어나는 신성한 영역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이론적으로 다 알고 나서 어머니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린이는 사랑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데는 미숙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어버이의 사랑을 잘 느끼고 전달하며 자기의 존재로 그 사랑을 금방 느끼게 합니다. 사랑을 인간의 언어로 정의 내릴 줄 아는 어른이 되어 가면서 사랑에 상처를 입기도 하고 크고 작은 오해를 주고받기도 하고 어버이의 사랑에서 멀어지는 일도 발생합니다.
--- p.184
제자들은 말라 죽은 무화과나무의 겉모양만을 보지만 거기에는 말라 죽는 것 이상의 엄청난 힘, 만물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시는 하느님의 힘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 힘은 인간의 힘(인간의 언어)을 잠재우는 자만이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라 죽은 나무를 보게 하시며 “보라. 나는 말 한마디로 나무를 말라 죽게 하는 그런 존재다.”라고 하느님으로서의 당신의 능력을 자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너희는 말라 죽은 이 나무에서 무엇을 보는가? 나무를 살리고 죽이는 하느님의 힘을 느끼는가? 나는 지금 그 힘을 너희에게 느끼게 하려고 그 힘으로 너희를 만나고 있다. 믿는 자만이 그 힘을 느낄 수 있다.”
--- p.285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20-21)
--- p.327
하느님은 그들을 창조하시면서 당신의 영을 불어넣으셨고, 보시니 좋았다고 감탄하셨습니다. 창조는 먼 옛날 한 처음 유일회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항상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그 옛날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것처럼 지금도 우리를 지으시고 보시니 좋다고 감탄하십니다. 세상에 하느님 보시기에 좋지 않은 창조물은 없습니다. 우리의 과제는 하느님께서 좋게 지으신 것이 왜 악해졌는가 하며 악한 것을 골라 저주하고 단죄하며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눈으로 하느님의 창조물을 바라보며 감탄하는 것입니다.
--- p.373
예수님은 기적만을 요구하면서(마르 8,12) 복음에 따라 살지 못하는, 그래서 하느님의 힘으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안타까워하십니다. 기적은 복음의 삶을 살게 하고 복음의 삶을 사는 사람은 기적을 일으키는 삶을 삽니다. 복음을 믿는 이에겐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기적입니다. 인생 자체가 기적입니다.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아픈 것도 늙는 것도, 이 대지 위에 어느 날 나타나서 살아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이 벌써 기적입니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 마음을 나누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하고 꿈꾸고, 아픔 가운데서도 서로 위로하고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한번 핀 꽃이 다시는 시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고 피고 다시 또 지고 피는 것이 기적입니다. 땅을 일구어 얻은 빵을 생명의 양식으로 먹고 포도를 가꾸어 얻은 술을 구원의 음료로 마실 수 있다는 것이 또 기적입니다. 보이는 것 모두가 우리에게 기적입니다. 그렇기에 모든 것이 기적이 아닙니다. 기적의 삶을 사는 이는 무슨 신기한 일이 더 일어나기를 바라지도 않고 거기에 매달리지도 않습니다. 현상의 변화에 대한 감동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사그라들기 마련입니다. “해가 떠서 뜨겁게 내리쬐면, 풀은 마르고 꽃은 져서 그 아름다운 모습이 없어져 버린다. 이와 같이 부자도 자기 일에만 골몰하다가 시들어 버릴 것이다.”(야고 1,10-11)
--- p.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