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듬은 텍스트적 실체가 아니다. 리듬은 언어를 매개로 하지만 언어 그 자체가 리듬은 아닌 것처럼, 리듬은 경험될 때 리듬이 된다. 여기서 리듬의 경험이라는 것은 텍스트로부터 시각적 혹은 청각적인 운동의 흐름을 감지한다는 뜻인데, 그것은 작가와 독자, 혹은 텍스트와 독자 사이의 코드이자 소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따라 현대시조라는 정형시에서 리듬은 음운론, 통사론, 의미론 모두와 연관되어 있으며, 이들의 통합체가 곧 리듬이다.
여기서 특별히 시조는 ‘정형률(음보율)’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 역시 마찬가지로 통합체로 기능하는 것이지, 정형률만 개별적으로 존재하거나 기능하기는 어렵다. 물론 시조는 4음보를 전제로 창작되었고 4음보로 읽는 것을 강요받지만, 그것을 ‘규칙’으로만 본다면 모든 시조는 하나의 리듬만 갖고 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시조는 각자의 리듬을 갖고 있다’는 명제가 성립할 수 있다면, 그 리듬은 분명 의미와 연관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의미는 역사와 사회 혹은 인간에 대한 주관적 재현, 개별 주체의 주체성이 최대한 발휘될 때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조의 리듬은 늘 새로운 세계 안에서 구성되며, 새로운 세계는 새로운 언어와 형식에 의해 구축된다. 그것을 ‘리듬 충동’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시조는 리듬 충동의 로고스와 파토스를 동시에 보여주는 양수겸장(兩手兼將)의 문학 장르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 p.25~26
시조는 소수의 시인들 시집에 언제까지 갇혀 있을 것인가. 시인들끼리 열심히 창작열을 돋우고 세미나도 하며 세계화를 꿈꾼다고 한들, 시조는 여전히 지면에 갇혀 있을 뿐이다. 이제 시조는 거리로 나가야 할 것이다. 시조는 ‘페이퍼 시조(Paper Sijo)’가 아니라, ‘스트릿 시조(Street Sijo)’, 퍼포먼스(performance)로서의 시조가 되어야 한다.
시조의 고유성을 해친다고 말하거나, 시조의 본질 또는 정신을 잃는다는 우려와 비판 역시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시조 역시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문학 장르다. 시대정신이 본질이다. 시대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면, 시대를 오롯이 담아내지 못한다면 시조는 곧, 어느 박물관의 유물실에 전시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실험할 수 없고, 모든 사람이 정격을 지킬 수 없다. 다양한 시도와 끊임없는 변혁만이 시조의 지경(地境)을 넓힐 것이다. 그때 시조는 ‘이미’ 대중의 시조가 되어 있을 것이다.
--- p.41~42
이우걸 시인의 시집에 수록된 시의 리듬은, 시조의 율격 따위로 읽어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여기서 리듬은 텍스트적 실체가 아니며, 경험하는 리듬이다. 다시 말해, 시조의 리듬은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언어 그리고 형식에 의해 구축되는 것이므로, 시인에 의해 파괴되는 낡은 감각적 분배에서 시조의 리듬은 시작된다. 기존의 담론을 해체하고, 기존의 감각에 의문을 제기하는 문장들의 흐름(리듬)은 이 세계에 단 하나뿐이다. 그 리듬이 시조이든, 소설이든 장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다만, 이우걸 시인의 리듬은 시조로 발현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우걸 시인의 작품을 읽을 때는, 이 작품이 시조임을 전제로 읽어야할 것이 아니라, 의미를 찾고 해석하는 가운데 시조의 리듬을 우리가 ‘경험’해야 한다.
“단 한 줄의 시를 쓰기 위해 삶을 다하여야 하며, 단 한 줄의 시를 쓰기 위해 예술을 다해야 한다”는 모리스 블랑쇼의 말처럼, “그 어떤 작품과도 닮지 않으면서 예술을 닮아야 한다”는 조셉 주베르의 말처럼 시조라는 장르를 다해서 문장 하나를 완성해가는 이우걸 시인의 리듬, 존재론적 모험을 감행하고 있는 이우걸 시인의 리듬은 이우걸 고유의 것이자 시조 고유의 것이다. 앞으로 이우걸 시인이 고군분투해야할 것은 클리셰가 아니라 시조라는 장르 자체일 것이다. 이우걸 시인이 하나의 시조다.
--- p.127~128
말라르메의 말처럼, 시인 화자의 소멸이 있어야 순수한 작품이 남는다. 그리하여 시의 문장들은, 낱말들은 ‘고대의 서정적 숨결’ 혹은 ‘개성적 문장’이 되어, 서로 충돌하며 불꽃(spark)을 일으킨다. 그 불꽃이 시의 아름다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시인이 해야할 일은 서둘러 시에서 빠져나오는 일일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이 빠져나온 시는, 화자와 대상만이 남는데, 앞서 언급했듯이, 대상이 화자보다 ‘아프리오리(a priori)’하게 선재(先在)하고 있으니, 대상이 얼마나 매력적이냐에 따라 화자의 목소리도 그에 따라 매력적일 것이다. 김일연은 시인은 ‘바람’, 박명숙 시인은 ‘꾀꼬랠루’, 이석구 시인은 ‘초록’, 장영춘 시인은 ‘애월’, 정평림 시인은 ‘소나무’, 홍성운 시인은 ‘조랑말’을 대상으로 삼았다. 물론 여기서, 대상 자체가 매력적이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대상을 향한 시적 주체의 태도와 양상이 매력적이어야 할 것이니, 이들이 배치한 대상과 화자와의 관계에 보다 주목한다면, 우리는 쉽게, 그러나 빠져나오기 어려운 문학의 공간에 접근하게 될 것이다. 불꽃, 섬광처럼 튀었다 사라지는 곳. 한순간 모든 것을 태워버리고 사그라지는 곳.
가끔은, 문학의 공간이 무서울 때가 있다.
--- p.49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