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생전 마지막 인터뷰에서 “이제 나의 시대는 지나갔다. 다시 영화를 제작할 생각은 없다. 자기가 좋아서 죽기 살기로 하는 놈이 이기는 거다. 진심을 다해, 거짓 없이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한 말은 영화에 대한 그의 평생의 생각이자, 너무 빠르게 도착한 유언이었는지 모르겠다.
--- 「서문: 故 이태원 대표를 추모하며」 중에서
결과적으로는 태흥영화사의 ‘미완성 창립작’이 된 〈비구니〉는 원래 배우 김지미가 기획한 작품이었다. 임권택 감독이 메가폰을 잡기로 되어 있었는데, 제작 일정이 자꾸 미뤄지자 임 감독이 이태원 사장에게 제작을 권했고, 이 사장은 기획 비용을 지불한 후 〈비구니〉 프로젝트를 가져왔다. 송길한 작가가 시나리오를 쓴 〈비구니〉는 기생이었던 주인공이 불교에 귀의해 해탈하는 여승의 이야기였다.
--- 「김형석, 〈충무로 제작 명가 태흥영화사 약사〉」 중에서
태흥영화사는 올드 충무로의 방식으로 자본을 조달해 영화를 만들었다. 하지만 1990년대에 대기업과 금융자본이 들어오면서 충무로의 지형도는 급변했다. 삼성영상사업단이 100억 원 규모의 제작비를 태흥영화사에 제안한 적도 있지만, 이태원은 “대기업 들어와도 어차피 노하우는 나한테 있다”는 생각으로 거절했다.
--- 「김형석, 〈충무로 제작 명가 태흥영화사 약사〉」 중에서
〈뽕〉은 속편으로 이어지며 섹스영화로 평가절하되었으나, 실제로는 뛰어난 영상미와 구성으로 당대 높은 평가를 받았던 작품. 제24회 대종상영화제에서 각색상, 제22회 백상예술대상에서 영화부문 감독상, 제31회 아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과 음악상 등 주요 영화제에서 수상했다. 1986년 2월 단성사에서 개봉하여 약 13만 7천 명의 관객을 동원, 그해 흥행 6위를 기록했다.
--- 「조준형, 〈한 영화인의 뚝심이 만든 한국영화사의 진경〉」 중에서
이러한 일련의 소동 속에서 태흥영화사는 1988년 2월 6일 개봉한 〈블랙 위도우Black Widow〉(봅 라펠슨, 1987)부터 1991년 7월 6일 개봉한 〈나 홀로 집에Home Alone〉(크리스 콜럼버스, 1990)까지 총 11편의 20세기폭스사 수입작들을 전국에 배급했다. 그리고 20세기폭스와의 계약이 만료된 후에는 미국의 ‘컬럼비아 영화사’의 영화들을 간접배급 방식으로 전국에 배급했다.
--- 「이수연, 〈혼란한 영화판에 승부수를 띄우다〉」 중에서
태흥의 1980년대 필모그래피는 제작이 불발된 〈비구니〉의 여파와 창립작 〈무릎과 무릎사이〉를 비롯해 〈어우동〉, 〈뽕〉 같은 성애영화, 〈돌아이〉, 〈기쁜 우리 젊은 날〉,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 같은 청춘영화로 채워져 있다. 주지하다시피 1980년대는 “낮에는 전두환의 폭압 정치에 맞서 돌을 던지고, 밤에는 전두환의 자유화 정책에 발맞춰 싸구려 에로영화를 보며 킬킬댔던” 각성과 환각의 시대였다.
--- 「박진희, 〈태흥영화사(史)를 완성하는 또 다른 퍼즐〉」 중에서
“영화 홍보에 있어서 굉장히 큰 변화가 있었던 시점은 〈취화선〉 때였어요. 당시에 홈페이지를 잘 만드는 게 엄청난 이슈가 되었어요. 예를 들어 요즘 메타버스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가 이슈인 것처럼, 당시에는 홈페이지가 정말 중요했어요. 저만 해도 〈취화선〉 홈페이지에 엄청 심혈을 기울여서 결국 상을 탔어요. 제49회 칸국제광고제 필름이벤트프로모션 부문에서 은 사자상을 받았죠. 백지의 모니터 위에 그림을 그려 나가는 방식으로 홈페이지를 구성했고, 화선지에 먹물이 번지는 효과 등을 통해 한국화의 특징을 살려 낸 그런 홈페이지였어요.”
--- 「박진희, 〈무릎과 무릎사이〉부터 〈하류인생〉까지〉」 중에서
태흥영화사와 대표 이태원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지나치게 간단하거나 아니면 그렇기 때문에 설명이 종종 소설이 된다. 태흥영화사는 이태원의 알레고리인가, 아니면 이태원은 태흥영화사의 환유인가, 이런 식으로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 둘의 관계는 매개 없이 연결된다. 그러면 그 둘 사이를 무엇이 중재하는가. 여기에 취향이 개입한다.
--- 「정성일, 〈태흥영화사, 2001년 그해 겨울, 혹은 한국영화사의 마지막 고전적 제작 양식에 관한 기록〉」 중에서
영화 기자로 처음 발을 디딘 2000년은 한국영화 역사의 새로운 페이지가 작성된 해였다. 〈춘향뎐〉이 한국영화 최초로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고, 2년 뒤에는 〈취화선〉의 임권택 감독이 같은 영화제에서 감독상의 영예를 안았다. 기자 초년 시절의 내게는 한국영화가 세계 최고의 영화제에서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초현실에 가까웠다.
--- 「허남웅, 〈영화계 동료들이 증언하는 이태원과 태흥영화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