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를 떠나던 날, 친구가 공항으로 배웅을 나왔다. 떠나기 전에 나는 울고 말았는데 그것은 나의 떠남 때문이 아니라 그의 남겨짐 때문이었다. 멀어지는 동안 나는 그녀를 아주 많이 뒤돌아봤다.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처럼 몇 번이고 뒤돌아보는 멋진 오르페우스 같았다고, 비행기를 타기 전 받은 문자에 쓰여 있었다.
누군가 내게 파리에서 무엇을 하였나 묻는다면 나는 그저 존재하는 일을 했다 하겠다. 공간 속에 서거나 앉거나 누워, 세계를 전부 감각했으므로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몸을 마침내 연마했노라고. 그럼에도 거기 남아 있는 얼굴을 한 번만 더 보고 싶었다고.
--- p.18, 「공간에서」 중에서
만일 그가 춤만 추었더라면, 왕자이거나 광대이기만 했으면, 세상은 그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날아오르기를 멈추고 땅을 굴렀으므로 세상도 그에 대한 사랑을 멈췄다. 물론 사랑과 고독은 호환되는 항목이 아니기에, 춤만 추었다 해도, 사랑받았다 해도, 그는 깊이 고독했을 것이다. 해서 그는 천재 무용수로 남지 않고, 스스로 외면당한 안무가가 되었다.
--- p.24, 「봄의 제전」 중에서
동시대인이라는 말의 가장 적합한 정의란 ‘함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다. 우리는 시대를 견디며, 시대를 견디지 못한 이들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 그리하여 어떤 죽음들에 대한 기억을 설명 없이 나누는 사람들. 함께 웃는 사람들이기보다, 함께 웃지 못하는 사람들. 무언가가 좀처럼 웃기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 p.47, 「관객 학교」 중에서
프랑스어로 유령은 revenant이며, 이를 직역하면 ‘다시 돌아오는 자’라는 뜻이다. 떠나간 이가 미처 영영 떠나지 못하고 또다시 돌아오는 일. 부재하는 이가 현전하는 일. 드나들고 출몰 하고 배회하는 일. 아마도 할 말이 남아 있어서. 밝혀지지 않은 진실이 있어서. 그 죽음이 개운한 안녕일 수 없어서. 납득하고 단념할 수가 없어서. 아파서. 아픔이 말이 되지 않아서. 산 자만이 그 말을 해줄 수 있어서.
--- p.80, 「비극의 기원」 중에서
그리고 그날 그녀는 연극을 하느라 아무도 죽이지 못했다. 앙헬리카 리델. 세계의 진창으로부터 얻은 상흔에서 비명 같은 작품을 길어내는 사람. 인간의 역한 위선을 조롱하고, 아직 충분히 울지 못한 자들을 연민하며, 누구로부터도 사랑받지 못함에 끝없이 절망하는 이. 그녀는 무대에 쌓인 흙더미를 파헤치고, 그 위에 엎드려 자위하고, 수십 개의 소파를 나르고, 레몬을 잘라 다리에 문대고, 허공에 팔을 휘젓고, 머리 위에 술을 뿌리고, 박제가 된 동물과 눈 맞추고, 자신의 피를 뽑는다.
--- p.96, 「테러와 극장」 중에서
티켓은 6유로였고, 한쪽 귀퉁이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가시성 없음.” 우리말로는 ‘시야제한석’ 정도였을 것이 그토록 극단적으로 표현된 것에 웃음이 났다. 되려 솔직함이 좋으면서도, 그렇다면 왜 파는가 싶기도 했던 그 좌석. 그 발코니석. 무대 바로 옆, 오케스트라 피트에 면한 층층의 방. 무대의 3분의 2가 가려져 체념과 상상을 북돋우던. 거기서만 볼 수 있는 것들이 볼 수 없는 것보다 많던.
--- p.129, 「장 끌로드 아저씨」 중에서
만일 당신이 춤을 춘다면 나는 가만히 앉은 몸으로도 그 춤을 따라 추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다. 무대 위의 도약하는 몸이 저토록 가볍기 위해 얼마나 무겁게 근육을 조이는지, 저 한없는 회전이 얼마나 아찔하게 어지러움을 비껴가는지, 바닥을 기는 무릎은 어떤 저릿함으로 납작해지는지. 오직 몸을 통해 상상할 수 있는 한에서 우리는 그만큼 더 춤을 볼 수 있고, 알 수 있고, 감각할 수 있다.
--- p.155, 「춤을 나눠드립니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