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21년 10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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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188쪽 | 312g | 127*200*15mm |
ISBN13 | 9791189467302 |
ISBN10 | 1189467305 |
발행일 | 2021년 10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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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188쪽 | 312g | 127*200*15mm |
ISBN13 | 9791189467302 |
ISBN10 | 1189467305 |
생각이 너무 많은 어른들을 위한 심리학 (10만부 돌파 기념 스페셜 에디션)
16,020원 (10%)
뒤늦게 쓰인 비평 05 공간에서 11 봄의 제전 21 솔렌 35 관객 학교 45 김동현 선생님께 64 비극의 기원 69 꽁띠뉴에 83 테러와 극장 95 연극을 끝까지 보기 위하여 116 장 끌로드 아저씨 127 춤을 나눠드립니다 153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175 |
목정원. 공연 예술학을 전공한 저자가 프랑스에서 6년을,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2년을 보내며 가졌던 생각을 담은 책. 장르를 말하자면 에세이. 내게는 참 뜬금없을 책. 그럼에도 한 편의 소제목을 마칠 때면 어김없이 저자의 얼굴이 궁금했던 날들. 마지막 장을 덮고도 앞표지의 ‘목정원’이란 이름에 한참 시선을 두었던 오늘도.
내용이야 공연과 예술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내게 큰 의미는 없었을 것들. 다만 소소한 일상을 보는 시선과 예술의 내면에 들어가는 깊이는 기실, 예술업을 하는 자의 깊은 사색이 남다름에 그려려니 하고도.
명품. 언젠가 지방 촌 가족이 서울 구경이랍시고 찾았던 내로라호텔. 그 스파뭐시기 샤워장에서 명품 빤스 입은 아저씨를 본 기억. 참 별것에도 다 명품 이름을 새겼는가, 우스웠던 그 날의 기억이 책을 처음 펼쳤을 때 든 생각이라면 이 또한 참 엉뚱하지만, 책에도 문장에도 명품이 있다면 이 책, 이 문장이지 않을까.
수려한 문장을 따라 필사도, 읽은 후기도 적어본 오늘.
저자가 더욱 궁금했던 오늘.
감상문을 쓸 때 여러 번 다시 보는 걸 최대한 지양한다.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차근차근 다 읽었을 때의 감상과 글을 쓸 때 발췌하며 읽을 때 감상이 달라지는 게 되고, 결과적으로 글을 쓸 때의 감상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비슷한 이유로 글에서 발췌할 법한 문장을 표시해두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 다음에 책을 읽을 때 나도 모르게 그 부분만 읽어 놓고 다시 다 읽었다고 생각하는 게 맘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독서 중의 자세는 '감상문을 써야 겠다'고 생각한 후라면 작성의 난이도를 높이는 원흉이 된다. 필기를 하면서 읽으면 읽는 속도가 나지 않고, 필기 없이 읽으면 감상이 막연해서 구체적으로 묘사하기 어려워지는 까닭이다. 가령 감상에 대해 키워드 몇 가지를 뽑아 내는 것은 필기 없이 글을 읽으면서도 가능하다. 문제는 그렇게 된다면 단순한 단어들의 나열일 뿐이라 사람들이 그 글을 보고 무슨 소리인지 당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해되도록 문장과 자체 논리를 만들어 개연성 있게 엮어내는 것은 글을 읽은 이후 시간을 들여야 하는 일이다.
문제는 글을 쓰고 엮어내는 데 걸리는 시간만큼 순간의 직관은 망각되고, 퇴화된다는 데 있다. 감상문을 작성하면서 떠올랐던 감상을 적지 못한다면 글의 의미가 없으니 글을 쓰는 동안 머리를 긁으며, 머리카락을 쥐어 뜯으며, 날아가고 흩어지는 감상을 쥐어 잡으려 애쓴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감상은 유유히 내 머리 속에서 빠져 나가고 있다.
그나마 나의 감상문은 쉬운 편일 것이다. 아마추어의 시각에서 바라보기에 깊이나 전문성을 기대할 수 없고, 비판의 칼날을 예리하게 갈아서 내게 들이댈 반론도 맞닥뜨릴 필요가 없을 것이기에. 그럼에도 완결된 감상문에서 원하는 바를 온전히 전달하지 못한 것에 아쉬움을 느낀다.
하물며 이 일에 더 깊숙이, 더 전문적으로 들어와 있는 사람의 어려움은 오죽할까. 그의 많은 경험은 감상을 더 빠르게 분류해 주는 해주는 장점일 수도 있지만, 더 비교를 세세히 하지 않으면 특성을 알아차리기 버겁게 하는 단점일 수도 있다. 이 책의 서문 「뒤늦게 쓰인 비평」이 내 무릎을 치게 만든 것은 그 때문이었다.
좋은 작품을 보고 나면 집으로 돌아가 글을 쓰고 싶어진다. (...)
작품을 다 본 순간 그것은 이미 세상에 없다. 그것은 사라졌다.
남는 것은 기억뿐이며, 기억도 금세 바스라진다.
그러므로 대개 공연에 대한 글을 쓰는 일은 가쁜 호흡으로 이루어진다.
흐릿해지기 전에. 영영 지워지기 전에.그러나 아무리 현재적이어도 그 글쓰기는 공허를 면할 수 없다.(5-6p)
이 서문 덕분에 공연 예술에 큰 관심이 없었음에도 책을 읽을 결심이 들었다. 감상에 대한 글을 작성하는 과정에서의 어려움을 공감받는 경험을 공감받으면서 시작하다 보니 이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해졌던 까닭이었다.
이 책은 작가가 프랑스에 유학을 가서 자신이 겪고 경험한 공연 예술을 다룬다. 주로 다뤄지는 공연 예술은 무용과 연극인데, 이 둘의 공통점은 언제나 관객들에 실황으로 보이는 예술이라 100% 반복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같은 동작이라고 할 지라도 다른 시간대의 예술에서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체적 특성 차이나 타이밍, 신체 상태 등의 차이로 온전히 모방하지 못하고 미세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는 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영화나 TV 드라마 같은 예술이 편집을 통해서 오류를 수정하고 최선의 판본을 복제하며 보여줄 수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 책에서 그걸 잘 느낄 수 있는 챕터는 「봄의 제전」이었다. 무용가 바슬라브 니진스키의 세 번째 작품이었던 봄의 제전은 당시의 괄시와 후대의 재평가가 겹치면서, 원작을 기리면서도 원작을 볼 수 없는 아이러니에 놓여 있는 작품이다. 구전으로 전해오는 봄의 제전, 그 원작을 재현하고자 하는 무용가들에겐 원작의 영상이나 문헌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원작자는 그나마 원작을 보고 그린 크로키가 존재하긴 했지만, 크로키 만으로는 그 동작과 동작 사이의 흐름을 알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복원 시도한 작품들은 그 크로키를 기반으로 한 변주작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변주작들은 원작을 모방하고자 한 목적으로 인해 원작만큼의 평가를 받지 못한 열화본이 되고 만다. 오히려 그 의미를 살리고자 한 재해석 작품을 작가가 더 고평가하는 걸 볼 수 있는데, 이는 작가가 무용이란 공연 예술에 대해 온전한 복제란 불가능하다는 자세를 견지하는 걸 감안했을 때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책은 이런 식으로 무용, 연극에 대해 작가가 겪어냈던 각각의 경험들을 토막글로 써서 엮었다. 작가가 쓴 글에서 공통적으로 예술의 마멸에 대한 감상이 느껴졌다. 첫 챕터에서부터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몸을 떠나는 소리는 어디로 흩어지나.
소리는 나로부터 나와, 나를 떠나서, 공간(空間) 속으로 간다.
그랬다가 그곳으로부터, 다시 영영 사라진다.(15p)
여기서 소리와 공간이라는 부분은 시연자와 감상자의 비유로 보인다. 실제로 치환하여 말하더라도 아무런 지장이 없는 것이 시연자의 몸에서 출발한 몸짓이나 말들이 감상자에게 도달하고, 그 도달한 감상자의 기억에 머물다가 천천히 사그라드는 점에서 그렇다.
언어는 이 감상을 새롭게 가공시켜 보존하는 역할을 담당할 뿐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소실되어가는 것들이 없을 순 없다. 기억의 한계일 수도 있고, 일목요연한 논리를 위해 희생되는 부분도 존재하게 된다. 그렇기에 글이라는 도구만으론 감상을 오롯이 담아낼 수 없다는 패배감이 덮쳐오곤 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소실되는 감상을 그럼에도 남겨야 하는 까닭은 어디에 있는 걸까? 나의 오독으로 인해 왜곡되거나 와전될 가능성을 감수하면서 말이다. 그것은 남기는 행위 자체와 그 과정 자체가 나를 변화시키고, 나를 강화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것을 영화 <컨택트>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다. 영화 속 외계인의 생태에는 시간이 겹쳐져 존재하기에 언어에도 시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외계인과 협상하며 그들과 소통하던 언어학자는 이일이 있고 나서 #미래 에 일어날 불행한 일을 알면서도, 그 단초가 될 수 있는 일을 택한다. 그러나 이것이 자유 의지의 박탈이 아닌 것은, 미래를 아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미래를 강화시켜 나가고 자신이 인지하는 미래로 변화하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SF 영화 내의 예시에 국한되지 않는다. 존 오스틴 이라는 학자가 1962년에 출간했다는 <어떻게 말로써 행할 것인가>에 따르면, 인간의 발화는 크게 확증적 발화와 수행적 발화로 나뉘는 데, 이중 수행적 발화는 행동을 구현하는 역할을 한다고 책에서는 전한다. 우리가 타인에게 거는 약속이나 맹세가 우리의 행동을 하지 않았을 때보다 더 이행을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후속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하는 수행적 발화는 우리의 정체성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거는 암시는, 우리가 스스로를 규정하는 또 하나의 내가 된다. 그렇기에 이 모든 과정이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 무의미하더라도 나에게는 유의미한 일이 되는 것이다.
분명 감상했던 것들이 점차 나의 기억 너머로 소실되어 가는 와중에도, 글로 남긴 감상이 그 원래의 작품, 심지어 나의 원래 감상과 다른 차원으로 사라진다고 해도, 감상을 남겨야 하는 까닭이 어디에 있을까? 글을 읽으며 느낀 감상을 언급하는 그 자체가 나를 풍요롭게 하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아울러 감상문만이 아니라 살면서 겪는 많은 생각이나 공상도 소실되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고 최대한 많이 꺼내며 적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것이 쌓여서 '나'를 만들고 강하게 해 줄 것이기에.
이처럼 아름답고 유려한 글을 만나기가 쉽지않다. 삶과 예술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더 나아가 인간애 대한 애정이 없다면 이런 글을 만날수가 있을까? 작가가 세밀하게 묘사한 연극은 읽는 내내 빠져들지 않을수 없고 그 연극을 상상하며 보러가고 싶게 만들었다. 내가 느낀 감정은 실제 앞에서 어쩌면 글보다 덜하지 않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꼭 한번 보고싶게 만들었다. 그가 일상을 사유하며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인간에 대해 삶에 대해 예술에 대해 꾹꾹 눌러쓴 글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소중함을 느낄수 있었다. 당분간 이 같은 글을 만나기도 힘들 뿐더러 작가 역시 많은 것을 쏟아낸 듯한 느낌을 글 읽는 내내 받을수 있었다. 그간 자신의 많은 이야기가 책에 녹아 있었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