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나는 옛날 ‘미미네 떡볶이’에서 가장 맛있게 먹었던 것을 이제 영원히 먹을 수 없다. ‘분위기’ 말이다. 홀로 카페에서 커피나 차를 마시거나, 홀로 책방에서 시집을 고를 때, 혹은 홀로 술집에서 생맥주 혹은 싱글몰트 따위를 홀짝일 때,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분위기’ 하나를 같이 먹는다. 그 ‘분위기’를 먹으면서 간단하게 정의 내릴 수 없는 이런저런 생각이라는 것을 하거나 혹은 그 어떤 생각도 필사적으로 하지 않으며 얼마간의 시간을 보내고, 그러고 나면 우리는 어찌 됐든 결국 더욱 자신다움으로 단단해진 채 거리로 나오게 된다. 그런 경험이 과연 떡볶이집에서도 가능할까.
--- 「떡정, 미미네」중에서
백기녀는 분식집 주인장을 찾았다.
“지금 이걸 떡볶이라고 해주신 거예요? 완전 퉁퉁 불었잖아요.”
아주머니가 항의했다.
“그거 만든 지 얼마 안 된 거예요.”
“이게 얼마 안 된 거예요? 지금 장난해요? 얼마나 오래됐으면 떡이 이렇게 퉁퉁 불어요? 직접 한번 드셔보세요, 이게 만든 지 얼마 안 된 떡인가. 이런 거 팔면서 바깥에 ‘즉석’이라고 써 붙입니까? 애만 먹는다고 하니까 이따위로 주는 거예요? 얼른 다시 해주세요. 다시 제대로 만들어주세요, 얼른!”
백기녀와 분식집 주인장이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백기녀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맛있게 먹고 있었는데 왜 빼앗아간 거지, 떡이 분다는 게 무슨 말이지, 즉석이 무슨 뜻이지, 이미 절반 정도나 먹어버렸는데 다시 해오라고 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백기녀가 나쁜 사람이다.
--- 「단란한 기쁨」중에서
아주머니는 “응” 하더니 그 초라한 철판 안을 국자로 슬슬 몇 번 젓고 떡 몇 조각과 오뎅을 그릇에 담아주었다. 떡은 가래떡이었고 길이가 몽당했다. 양념이 굉장히 붉어서 입에 넣는 순간 아주 매울 것 같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나는 인사하고 이쑤시개로 하나를 집어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이혜연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똑같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거… 뭐야?’
색깔에서 연상되는 강렬한 매운 기운은 전혀 없었다. 양념은 정 많은 사람처럼 진득하고 달큰했다. 다만 아주 깊은 심연에서 “얼마든지 너네를 보내버릴 수 있지만 참겠어”라고 말하는 듯한 매운 기운이 있었다. 결코 먹는 이를 공격하지 않았으나 먹는 사람은 절로 알아서 제압이 되어버리고 마는 매운 맛이었다.
--- 「어떤 인력(引力)」중에서
그 떡볶이집의 가장 큰 개성은 일하는 직원을 부르는 호칭에 있었다. “저기요”랄지, “여기요”랄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 그곳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박군아”라고 부르는 것이 그곳의 규칙이었다. 대놓고 아랫사람 부리듯이 “박군아”라고 부르는 게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거기서는 무얼 먹을지 다 정해놓고도 차마 “박군아” 하고 부르지 못해서 안절부절못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나도 진땀을 흘리면서 “바, 바, 박군아 여기 주문할게요…”라는 앞뒤가 맞지 않는 화법을 구사했다. 그래도 제법 재미가 있었다. 그것은 “박군아”라고 부르는 재미라기보다는 다들 쩔쩔매는 모습을 구경하는 재미라고 해야 할 것이다.
--- 「오래오래 살아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중에서
얼마 동안이나 그곳을 들락거렸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정말 표현 그대로 ‘미친 듯이’ 갔다. 생각이 날 때마다 갔다. 한낮에 가도, 해가 뉘엿뉘엿 지는 늦은 오후에 가도 한 번도 닫혀 있던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가게는 어느 날 거짓말같이 사라졌다. (…)
눈물을 줄줄 쏟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말도 없이 가게가 사라진 것에 큰 배신감을 느꼈다. 알면서, 내가 미친 듯이 갔던 걸 다 알면서 아주머니는 언질 한번 주지 않았다. 그걸 중학생 신수진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 나는 정말이지 그때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 「제보를 기다린다」중에서
김상희는 싱어(singer)가 아니라 싱어송라이터(singer-songwriter)의 정체성을 지켜나가고 싶은 신수진에 대해 잘 몰랐다. 여성의 쓸모를 ‘나이’와 ‘결혼’에서 찾게끔 설계되어 있는 직장이라는 사회조직 속에서 살아가는 김상희에 대해 직장생활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내가 알지 못하듯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관계 안에는 구심이 있었다. 그 하나의 구심 때문에 점점 멀어지는 각자의 삶 속에서 서로를 점점 몰라가면서도 태연하게 상대방을 가장 오래된 친구라고, 나를 가장 잘 아는 친구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그 구심은 떡볶이집이다.
--- 「영스넥이라는 떡볶이의 맛의 신비」중에서
제하는 불쾌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키가 크고 나이 든 사람들이 모일 때마다 자신을 내려다보면서, 허락 없이 머리통을 쓰다듬어 자기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면서 제가 못 알아듣는 줄 알고 이러쿵저러쿵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 한심하고 귀엽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앞에서 어떤 미소를 짓는 것이 짜증나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도 밥 먹는 일이 서툴러 옷에 음식 얼룩을 흠뻑 묻히는 어설픈 작은 몸을 가지고 있지만 제하는 내가 짐작한 것보다도 더 빨리, 더 많이 자랐다는 걸 알았다.
“음, 제하야. 제하는 공룡 무지 좋아하잖아. 요즘은 어떤 공룡 제일 좋아해?”
화제를 돌려보려고 공룡 이야기를 꺼냈다.
“이제 안 좋아해. 그건 너무 유치해.”
제하가 이렇게 대답했을 때, 나는 공룡도 아니면서 상처를 받았다.
--- 「‘난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중에서
삶에는 의미가 있다, 아니다 의미 같은 거 없다, 팽팽하게 대척하는 이 똑똑한 사람들의 오백 쪽 넘는 주장들 앞에서 내가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는 말장난 같은 생각이 저절로 든다. 의미와 무의미는 정말이지 뫼비우스의 띠 같다. 경계를 도무지 나눌 수가 없다. 무의미한가 싶으면 의미하고 의미한가 싶으면 무의미하다. 제하(달리는 콘치즈박사)에게 완벽하게 무의미해진 공룡들이 제하(달리는 공룡박사)의 어린 시절을 증거하는 의미인 것처럼. 의미에 집착하는 의미 중독자라고 나를 설명하지만 정작 내가 아침마다 경험하는 것은 생의 무의미함인 것처럼.
--- 「‘난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