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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4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206쪽 | 290g | 140*210*15mm
ISBN13 9791190526753
ISBN10 1190526751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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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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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을 빙자한 남편의 실없는 소리는 차곡차곡 분노로 쌓여갔다. 반복되는 언어를 듣고만 있어야 한다는 게 화가 났다. 남이라면 안 보면 그만이다. 눈만 뜨면 마주치는 남편과의 대화는 듣는 횟수만큼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비됐다. 분노에 노출됐던 내가 J로부터 위로를 받게 되었다. 남편 때문에 생겨난 아드레날린은 J를 만나면 노르아드레날린로 바뀌었다. 한쪽은 절망감에 몸부림치게 만들었다면 다른 한쪽은 생기와 활력을 솟아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과도해진 감정은 갈증만 더할 뿐이었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면 되지만 사람으로부터의 갈증은 물로 채워지지 않았다. 실은 어느 누구부터로도 채워진 것은 없었다. 마음은 늘 허했고 더 외로웠다. J의 등허리를 마주하고 누웠을 때도 어디선가 냉기가 새어 들어오는지 발이 시렸다. 자신의 욕정을 해결하자마자 등을 돌리고 잠을 자는 J의 등허리는 서글펐다. 나는 그제야 잘못된 길에 들어섰음을 알았지만 나의 객기는 고장 난 브레이크였고 속도를 줄일 수 없었다.

알록달록한 종이에 적힌 글들은 오달졌다. 야무진 젊음이 느껴진다. 꽃무늬엽서에나 어울릴 작디작은 글자가 품고 있는 의미는 대범했다. 글씨체를 보면 글쓴이의 성격까지 알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그 메모지 주인공의 가녀린 손가락을 떠올렸다. 나처럼 뻣뻣한 손마디로는 이런 글씨를 쓸 수는 없다. 성추행 고소를 응원하는 사각의 울긋불긋한 메모지가 기관조직 내에 비치된다는 성추행 지침서보다 더 힘이 있어 보였다.
한 자 끼적일까 말까, 잠시 머뭇거렸다. 어떤 말을 적을까? 마땅히 쓸만한 구절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들 그러려니 짝을 만나고 덜컥 자식을 낳다가 무심하게 할머니가 되어갔다. 애정의 깊이도 모른 채 할머니가 된 늙은 여자는 까칠한 손바닥으로 여자들의 등짝을 때리고 남자들의 시선으로 세상의 여자를 바라봤다. 뫼비우스 띠처럼 이어졌던 성문화에 대한 관행을 지금부터라도 바꾸겠다니 기특하다. 하지만 슬프게도 가축이 되어버린 들개처럼 여자는 남자의 지배 아래 생활하도록 오랜 세월 동안 길들여져 왔다. 남성으로 쌓아진 단단한 사회, 꽃다운 나이의 여자들이 쓴 메모지들로 바뀔 세상이 아니다. 나야말로 부당함을 겪고도 항변도 못하고 있다. 나도 잘 안다. 나라는 존재는 어느 누가 관여하거나 조종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좋으면 선택하고 싫으면 자신의 의지로 뿌리쳐야 한다는 걸 이론적으로는 잘 알고 있었는데 나는 J를 거절하지 못했다. 감정적으로 얽히지 않을 때나 나를 관리하고 조종할 수 있는 일이다. 육감으로 엉켜버린 육체를 떼어낸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J의 입성과정은 치밀했다. 오랜 시간 신뢰라는 공을 쌓았다. 시민운동을 시작해서 정치판에 입성하는 다른 정치인처럼 사단법인을 만들었다. 재단을 만들고 사회 명망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이사들을 모아 재단을 설립했다. 재단이 설립되면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 있어 다음 단계의 진행이 아주 수월해진다. 이사회를 구성할 때 나는 제외됐다. 제외된 게 아니라 애초부터 J는 나를 그 판에 끌어들일 생각이 없었다. 나는 속으로 무척 서운했지만 자격미달이라고 애써 서운함을 달랬다. 웹사이트도 제작한 재단이 그럴듯하게 외형이 갖춰지자 사람들이 J 주변에 모여들었다. 뜻이 보태지고 후원금의 규모가 커져갔다. 재단에 들어온 후원금은 체류비만 해결하면 됐던 경비 수준이 아니라 이제는 사업을 벌여도 좋을 금액이 들어왔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후원한 돈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궁금해했다. 아니, 모여든 사람들을 위해서 뭔가 사업을 추진해야 했다. 하지만 재단에서 벌이는 사업은 눈속임용이었다. 후원금이 들어와도 후원금은 재단을 위한 재산으로 저축될 뿐이다. 사업이라고 해봐야 그 돈의 쓰임새는 모금행사를 위한 용도로만 사용되었다. 모금행사는 그들만의 잔치로 화려하고 요란했다. 그 모임에 소속되는 걸로 존재감을 느끼려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자 J는 서서히 버려질 사람, 버려야 할 사람, 그리고 의도적으로 끌어들일 사람들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J의 용의주도한 행각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들도 나처럼 인생의 한 부분을 뜻깊은 일에 동참해야 한다는 선량한 마음을 내었을 것이다. J가 거머쥔 권력이 순수하고 양심이 밝은 사람들의 영혼에서 출발했음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기가 찼다. 이거였나? 일탈의 결말은 지저분하고 추잡했다. 뻔뻔한 건 기본이고 상대방에게 책임 떠넘기기는 필수였다. 불륜의 마지막은 상대방의 민낯을 체득하고 나서야 끝이 난다. 민낯을 보고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면 지금처럼, 흉측하게 마음의 흉터를 갖게 된다. 불경스런 내가 된 그날, 나는 좀처럼 잠을 자지 못했다. 협상의 기술이 없던 나는 섣불리 J에게 따졌다가 헤픈 여자 취급만 받았다. 그 스트레스 때문인지 5일 동안 약을 먹어도 물집은 가라앉기는커녕 더 번져만 갔다. 내가 촬영한다고 LA에 머무는 동안 방위산업을 추진한답시고 ‘한민족역사연구소’ 소장이라는 직함은 치워버리고 ‘새론전략연구소’라는 공공기관의 직함을 앞세웠다. 그리고 각국의 무기상들을 만나며 협상하느라 소진해버린 에너지를 채우기 위해 자동차에 기름을 넣듯 여자를 품었을 J였다. 자기는 바이러스 제공자가 아니라며 오히려 나에게 다른 남자에게서 옮은 거 아니냐며 뒤집어씌울 줄은 몰랐다. 나를 얕잡아보고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아는 J였다. 오리발을 내미는 J의 태도가 분했어도 그걸 맞대응할 카드는 없었다. 대응을 한다면 뭘 어쩌겠는가. 피해보상? 정신적 피해? 그걸 증명하려면 어떤 법적 절차로 피해보상을 청구해야 하는지 내 소양으로는 능력 밖이다. 희열이었다가 지금 절망의 바닥을 핥고 있는 나로서는 앙갚음이라는 복수의 감정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이었다.

“기득권을 갖고 있는 건 남자들이었잖아요? 그 불합리를 어떻게 맞서겠어요? 그래도 요새 젊은 여자들은 용기가 좋아요. 예전에 나 젊었을 때는 꿈도 꾸지 못할 행동이지요.”
용기도 사회가 맞춰주지 않으면 발휘할 수가 없는 일이라며 산장주인은 뒷정리를 시작했다. 나는 그녀에게 원한을 품고 살면 어떻게 되는지 묻고 싶었으나 끝내 입을 열지는 않았다. 산장식당은 문을 닫아야 했으니 나도 둘레길 아래를 내려가야 했다. ‘자고 가’라는 주인의 배려에 자칫 마음이 쏠릴 뻔했다. 아니, 그곳에 머물다가는 밤을 지새우며 감추고 싶은 비밀을 털어놓게 될 것 같았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정의를 부르짖고 무턱대고 불의에 흥분하며 한 번 마음을 정하면 절대로 마음을 바꾸질 못하는 나는 J의 밥이 되기에 딱 적합했다. 그런 내 이야기를 듣는다면 산장 주인이라 할지라도 내 편을 들어주진 못하리라. 제 발로 걸어가 목을 내놓았는지 타인에 의해 호구가 됐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무엇이 됐던 죄책감이라는 뜨거운 돌덩이를 껴안은 채 부정의 길에 들어서고 말았다. 명치끝에 뭉쳐 비걱대는 비밀의 무게를 덜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두발장이는 결국 대나무 숲에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고 말았지만 나는 끝내 입을 다물었다. 부정한 것과 불의한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에.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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