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이 제일 힘들다고 한다. 그러나 다시 출발하는 건 더욱 힘들다. 이틀 전 다시 사마르칸트를 출발해, 2년 전부터 날 사로잡고, 유혹하고 또 고통스럽게 했던 실크로드 여행길에 올랐다. 내 몸은 아우성치고 있다.
--- p.15
자기 머릿속에 든 지식만으로도 충분해서 굳이 지식을 찾아 세계를 횡단할 필요가 없는 친구 마르셀 르메트르의 도움을 받아 윌리스를 만들었다. 창고에서 굴러 다니던 오래된 골프 가방이 바퀴 두 개 달린 여행의 동반자로 변신해 에브니〔저자가 2차 여행시 짐을 나르는 데 사용한 수레〕를 대체했다.
--- p.21
풍경은 단조롭기만 했다. 과거의 ‘비참한 스텝’은 촘촘한 관개시설망을 갖추면서 풍요로운 곳으로 변해 있었다. 살구나무가 과일 무게 때문에 휘청거렸다. 땅에 떨어진 수많은 살구는 나무 주위에 노란색 양탄자를 수놓았다.
--- p.31
정오에, 윌리스의 축이 갑자기 부러졌다. 갖고 있던 막대기로 고쳐보려 했지만 허사였다. 방법이 없었다. 식사시간이 다 되어, 300미터 떨어진 차이하나에 들어가 주문을 했다. 우선 허기부터 채우고, 갑자기 닥친 일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싶었다.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 p.49
결국 비자 만료일보다 하루 전에 도착했지만, 사마르칸트를 떠난 이후 실크로드의 흔적을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는 사실에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사원을 제외하고는 실크로드의 흔적을 지워버렸다.
--- p.78
산은 세 가지 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햇볕 때문에 갈색으로 변한 둥근 형체, 거의 물이 말라버린 강물이 이따금 졸졸거리는 초록의 계곡, 저 위 흐릿한 구름이 걷힌 산 정상에서 살짝살짝 보이는 순백의 눈과 광채가 번득이는 얼음덩어리.
--- p.88
바람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날아가는 독수리를 따라가다가, 이 굴곡진 배경 속에서 놀랍게도 수평으로 고원 같은 것이 나타났다. 멀리 푸르스름한 빛 속에 잠긴 봉우리가 눈으로 덮여 있었다. 어떤 기사가 언덕 쪽으로 다시 내려가면서, 커다란 협죽도夾竹桃를 밟으며, 파란 꽃이 달린 소관목 사이를 헤치고 전속력으로 내 쪽으로 왔다.
--- p.104
나는 천천히 가면서, 이스탄불을 출발한 이후 여섯 번째로 발을 들여놓은 이 나라를 살펴보았다. 어제 계산을 해보았다. 나는 중국에서 올해 1,500킬로미터를, 내년에 3천 킬로미터를 횡단할 준비가 되어 있다. 국경에서 제국의 도시 시안까지는 실크로드 전체 거리의 3분의 1 이상이다.
--- p.139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자초한 고독 속에서 캠핑하는 것이 좋아졌다. 주위를 살핀 다음 텐트를 세우고, 갑작스런 폭풍우를 대비해 커다란 돌로 이중지붕을 단단하게 고정하고, 나무를 주워 모아 불을 피우고 밥을 하는 생활이 계속 이어졌다.
--- p.169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자문하기 전에, 사마르칸트를 떠난 이래 오랫동안, 매일매일 짧은 여정 속에서 떠난 이유를 내 자신에게 물었다. 무엇보다 시급히 알아야 할 것은 내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깨닫는 것이다. 나를 떠나게 부추긴 것은 우선 너무 오래도록 얌전히 생활하면서 억눌러온 모험에 대한 갈증이었다.
--- p.183
길 끝이 보이면 두 가지 감정이 교차된다. 꿈이 끝났다는 데서 오는 섭섭함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볼 수 있다는 데서 오는 행복감……. 머릿속에는 오만 가지 계획들이 부글거리고, 수많은 결심과 밑그림을 그리는 데 앞으로 며칠, 몇 달, 몇 년을 투자할 생각을 한다.
--- p.247
이 대장정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아마도 최종 목적지까지 갈 수 있을 거라고 믿기 시작했다. 하지만 경계를 늦추면 안 된다. 고비 사막을 횡단하는 데 3천 킬로미터가 남아 있고, 중국은 그리 호의적인 곳이 아니다.
--- p.265
난 혼자이고, 힘도 미약하니 상황에 따라서 여행 거리를 결정하자. 파리에서 비행기에 올라탈 때도 이런 상황에 놓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막과 사막의 공허감과 슬픔과 바람보다 내가 더 강할 것이라는 데 내기를 걸기로 했다. 이제 우리 둘이다. 고비 사막아.
--- p.279
68킬로미터라는 기록을 세우고도 지칠 줄 몰랐던 내 신체조직이 이제 더는 할 수 없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신호는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커다란 물집이 두 개나 잡혀 입술 모양이 일그러져서 농어 아가리처럼 되어버렸다.
--- p.324
시안까지 비자 기한 내에 가려면, 한 달에 1천 킬로미터의 속도로 걸어야 하는데, 작년에 타클라마칸을 걸을 때까지 한 번도 이 정도의 속도를 내본 적이 없었다. 새 비자가 거부된다면, 다른 방편이 있기는 했다. 비자 발급이 쉬운 홍콩에 갔다가…… 재빨리 중국으로 돌아와 여정을 끝내는 것이다.
--- p.350
겉으로 보기에는 약해보이지만 아주 견고한 이 벽은 나를 몽상에 잠기게 했다. 저녁에 이 근처에 텐트를 치기로 했다. 그리고 실크로드의 신령에 사로잡힌 텐트 안에서 낙타를 타고 느릿느릿 가는 대상을 상상했다.
--- p.364
“부모님은 현명하세요. 자식은 부모님 말씀을 들어야죠.” 얼마나 멋진 말인가! 내 아이들에게 이 얘기를 해주어야겠다. 부모가 현명하다고 믿는 것! 정말이지 중국 사람처럼 되어야겠다…….
--- p.413
평원을 향해 계속 내려갔다. 고도계는 900미터를 가리키고 있었는데, 고도를 정확히 알고 나니 더위가 덜 느껴졌다. 계곡이 좁아질수록 숨 쉴 공기가 부족하다. 어떤 지역에서는 웨이허가 지역을 온통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옛날 여행자들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강물을 따라 내려가야만 했다.
--- p.446
이미 예감했던 것처럼, 나는 바로 자신 앞에 있었다. 그리고 내 자신을 발견했다. 지쳐서 닳아 없어진 것이 아니라 새로 태어났다. 마르코 폴로의 귀환을 지켜보았던 베네치아의 밀리오네 광장에서, 4년 전 나는 내 제 3의 인생, 세상의 상식으로는 이만 은퇴해야 할 나이에 다시 시작한 이 삶이 과연 어떤 것일지 자문했다.
--- p.4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