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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사는 논쟁 중

프랑스혁명사는 논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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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5월 09일
쪽수, 무게, 크기 644쪽 | 928g | 152*224mm
ISBN13 9791156122180
ISBN10 115612218X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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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민중봉기에 뒤이어 농민봉기가 ‘대공포’와 함께 전국으로 확산되자 사태를 진정시키고 혁명을 진전시키는 것이 시급했다. 8월 4일 밤, 의회는 봉건제를 비롯한 모든 특권의 폐지를 선언했으며, 미국의 예를 따라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헌법에 앞서 공표하기로 결정했다.
---p.40

인간은 평등하다. 그러나 자연적으로 평등한 게 아니라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다(제1조). 다시 말하면 자연적으로는 불평등하지만 사회 속에 들어가 시민이 됨으로써 “권리에 있어서 평등”해진다. 이러한 권리에 속하는 것은 “자유, 소유, 안전, 그리고 압제에 대한 저항”이다.
---p.43

1791년 교황 피우스 6세는 인권선언이 인간의 ‘권리’만 선언했지 ‘의무’는 선언하지 않았음을 지적했으며, 신을 ‘최고 존재’라는 이신론적 신 개념으로 대체하여 종교를 이신론 수준으로 격하시켰다고 비판했다. 여류작가이자 혁명가인 올랭프 드 구즈는 인권선언이 남성 중심인 것을 비판하며 〈여성과 여성 시민들의 권리선언〉을 작성했다. 후일 사회주의자들은 소유권을 신성불가침한 자연권으로 규정한 것을 비판했다.
---p.45

콩도르세 헌법안의 핵심은 입법부를 약화시키고 행정부를 강화하며, 파리의 힘을 축소시키고 지방의 힘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 이러한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서 의도한 것은 과격한 소수파가 지배하는 것을 차단하고 평화적이고 근면한 시민들의 의사가 반영되는 것이었다. 직접적으로는, 과격한 파리 민중이 직접 국민주권을 행사하려는 시도를 막아 대의제를 지키려는 정치적인 의도가 기저에 깔려 있었다.
---p.49

로베스피에르는 1793년 5월 10일 의회 연설에서 “인간은 행복과 자유를 위해 태어났다”고 말했는데 이것이 제1조에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년 후 생쥐스트는 “행복이란 유럽에서 새로운 사상”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혁명의 기본 이념은 이제 자유가 아니라 행복이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개인의 행복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행복, 사회적 행복이었다.
---p.52

프랑스혁명의 민중적 혁명 단계에서 흘린 ‘평등’의 대가는 너무나 컸다. 대내외 전쟁이라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실시된 공포정치는 인권선언의 모든 가치를 침해했다. 1795년에 혁명이 다시 부르주아 단계로 복귀하면서 “자유, 평등, 안전, 소유”의 가치가 재천명되었으나 혁명은 동력을 상실했다. 혁명은 대책 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좌절한 혁명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나폴레옹의 독재였다. 나폴레옹 헌법에는 ‘인권선언’이 없다.
---p.62

방데 전쟁이란 프랑스혁명이 한창이던 1793년 3월에 프랑스 서부의 방데 지방에서 일어난 반혁명 전쟁을 말한다. 방데의 농민군은 …… 최종적으로 1793년 12월 말 사브내 전투에서 와해되었다. 엄밀한 의미의 전쟁은 이 9개월간의 내전을 말한다. …… 전쟁포로는 물론이고 여자, 어린이, 노인들과 같은 비무장인들, 나아가 공화파 주민들, 즉 “전 주민”을 대상으로 야만적이고 체계적인 학살이 자행된 것이다. 내전과 내전 이후의 ‘최종 해결책’으로 전체 주민의 20퍼센트인 17만 명 정도가 희생된 것으로 추산된다.
---p.64

레날 세셰는 1793년에 방데인들이 봉기를 일으킨 것은 프랑스혁명의 〈인권선언〉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와 저항권을 천명한 것으로, 방데 전쟁은 반란이 아니라 “개인의 자유, 인신의 안전, 재산의 보존을 위한 십자군”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그의 책에서 충격적이었던 것은 방데 전쟁의 전후처리를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같은 성격의 ‘제노사이드’로 규정한 것이었다.
---p.65

방데 전쟁은 강제징집에 반대하는 농민들의 봉기로 시작되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귀족들의 반혁명 음모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 그러나 파리의 혁명가들은 방데 전쟁을 단순한 농민봉기로 여기지 않고 국내외의 왕당파 및 내부의 배신적인 온건 혁명파와 연계되어 있는 반혁명 전쟁으로 규정했다.
---p.69

같은 날 튀로는 다음과 같이 명령을 내렸다. “무기를 지참하고 있는 모든 비적은 총검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 소녀들, 여자들, 어린아이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수상한 자들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마을, 농가, 숲, 꽃밭 등 불태울 수 있는 것은 모조리 불태워야 한다.” “다시 반복한다. 도시, 마을, 농가를 불태우는 것은 필수이다.”
---p.77

혁명정부의 폭력이 진정된 것은 1794년 7월의 ‘열월 정변’으로 로베스피에르가 제거되면서이다. 열월파 국민공회는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공안위원회의 결정들을 무력화시켰고, 학살에 관련된 장군들을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했으며, 방데인들에게 사면을 선포했고, 1795년 2월에는 샤레트와 5월에는 스토플레와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 최종적으로 나폴레옹은 1799년 12월에 “부당한 법이 공포되었고 집행되었다”고 인정함으로써 방데 전쟁을 끝냈다.
---p.86

프랑스혁명의 기본 정신은 국민의회가 8월 26일 발표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은 ‘인권선언’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혁명가들 자신이 인권선언을 침해했다. 그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인권선언은 말 그대로 하나의 ‘선언’이자 지향이었지 현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p.89

10월 9일 리옹은 항복했다. 이렇게 해서 5월 29일 시작된 리옹 시민들의 항전은 끝났다. 양측에서 수백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전후처리는 방데 전쟁의 경우 못지않게 잔혹했다.
---p.107

리옹의 혁명재판소는 이렇게 11월 27일부터 4월 13일까지 20주 동안 1,673명을 처형했다. 그 이전 8주 동안 처형된 213명을 합치면 모두 1,876명 내지 1,907명이 처형되었다. 이 수치는 공포정치 기간 동안 프랑스 전역에서 정식 재판을 받고 처형된 사람들의 11퍼센트 정도이다.
---p.111

프랑스혁명력 2년 열월熱月(테르미도르) 9일(1794년 7월 27일) 로베스피에르는 국민공회에서 법외자로 단죄되었고, 다음 날 생쥐스트, 쿠통 등과 함께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 열월파는 마지막 산악파와 마지막 상퀼로트의 저항을 물리친 후 1795년 8월 22일 ‘혁명력 3년의 헌법’을 제정하고 그해 10월 총재정부Directoire를 출범시킴으로써 혁명력 2년의 공포정치에서 벗어났다. 이로써 혁명은 민중혁명으로의 궤도이탈에서 벗어나 부르주아 혁명으로 복귀했다.
---p.173

‘반동’이라는 용어는 특정 시기를 이해하는 데 적절한 용어가 아니다. 우선 그것은 이념적인 색채가 강한 용어여서 열월 9일 사건으로 실각한 로베스피에르를 영웅으로, 로베스피에르의 시대를 혁명의 심화기로, 그 로베스피에르를 실각시킨 열월 9일과 열월파 국민공회를 퇴행적인 수구반동으로 바라보게 만들 위험이 있다.
---p.176

산악파는 지롱드파에 비해 민중 친화적이었고(로베스피에르는 “나는 민중이다!”라고까지 말했다), 민중(상퀼로트)의 지지를 받아 권력을 장악했지만, 산악파와 민중은 상이한 이념을 가진 집단이었다. 도식적인 구분이지만, 산악파는 의회민주주의를 지지한 반면 상퀼로트는 인민주권론에 입각하여 직접민주주의를 열망했다. 산악파는 ‘법’을 내세운 반면 상퀼로트는 ‘정의’로써 법을 재심再審하려 했다.
---p.187

라파예트는 오베르뉴 귀족 대표로 선출되어 삼신분회에 진출했다. 삼신분회는 스스로 ‘국민의회’임을 선언하고 헌법 제정에 착수했다. …… 자유와 평등, 자연권, 법치, 국민주권, 삼권분립 등을 골자로 한 라파예트의 안은 그해 8월 24일 확정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p.222

1790년 초 라파예트는 …… “혁명을 위해서는 무질서가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구체제는 예속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경우에 봉기는 인간의 권리 가운데 가장 신성한 권리입니다. 그러나 헌법을 위해서는 새로운 질서가 확립되어야 하며 법이 존중되어야 합니다.”
---p.224

6월 16일 라파예트는 …… 자신이 입헌군주주의자임을 천명한 후, 헌법이 보장한 왕의 권리를 존중할 것과 내부의 폭군인 자코뱅파로부터 나라를 구할 것을 의원들에게 요청했다. …… 자코뱅파는 분노했다. 당통은 “라파예트는 유럽의 폭군들과 손잡은 귀족들의 괴수”라고 비판했으며, 로베스피에르는 “라파예트를 쳐라, 그러면 나라를 구할 것이다!”라고 외쳤다.
---p.229

라파예트는 정치적으로는 나폴레옹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는 상원의원직과 미국 외교사절직을 모두 거절했으며, 나폴레옹의 종신 통령 투표와 황제 투표에서 반대표를 던졌다.
---p.232

시에예스는 제3신분이 국민이요, 최고법이라고 말함으로써 귀족에 대한 투쟁에서 제3신분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철저히 부르주아적인 관점을 지니고 있었다. 혁명이 정치혁명을 넘어 사회혁명으로 심화되고 부르주아 혁명을 넘어 민중혁명으로 발전할 때 시에예스는 점점 소외되었다.
---p.254

시에예스는 프랑스가 혁명의 피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르봉 왕조로의 복귀나 공포정치로의 복귀도 안 될 일이지만 무능하고 무질서한 총재정부의 지속도 안 될 일이었다. 시에예스는 혁명을 끝내기 위해서는 쿠데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쿠데타의 성공을 보장할 ‘칼’을 물색했다. …… 시에예스와 보나파르트는 모든 면에서 달랐지만 상황 진단만큼은 일치했다. 프랑스는 지쳤고 혁명 열정은 식었으며 아나키를 조장하는 헌법을 끝내야 한다는 인식을 공유했다.
---p.265

시에예스는 1789년에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로 혁명을 열었으며 1799년에 보나파르트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혁명을 끝낸 사람이다. 프랑스혁명사에서 그의 이름은 무엇보다도 ‘국민의회’의 탄생에 뚜렷이 새겨져 있다. …… 그는 “제3신분은 모든 것이다”, “제3신분은 국민이다”, “국민이 법이다”라는 유명한 공식이 주는 선입견과는 달리 민중을 인정하지 않았다.
---p.269

미국 독립혁명은 영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공화국을 세우는 정치혁명으로 그쳤으나, 프랑스혁명은 전제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전제정을 떠받치고 있던 귀족들과 교회의 지배로부터도 벗어나는 사회혁명으로 치달았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전제정과 연대하고 있던 유럽의 전제군주들의 간섭과도 싸워야 하는 일종의 국제혁명으로 확대되었다. 프랑스혁명은 인간정신의 진보에 크게 기여했다.
---p.299

콩도르세는 …… 저명한 계몽사상가 가운데 유일하게 프랑스혁명에 투신한 사람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는 볼테르처럼 “편견, 불관용, 미신”을 타도하기 위해 투쟁했고, 여성, 유대인, 흑인노예 같은 약자들의 권리를 지지했으며 …… 프랑스에서 가장 먼저 공화주의를 지지했고, 민주적인 헌법안을 만들었으며, 교육을 통해 평등사회를 건설하려 했다.
---p.301

당통은 1789년 인권선언에 명시된 권리의 평등을 넘어 “재산의 평등”으로 나아가려는 과격한 사회혁명 요구를 “불가능한” 요구라고 선을 그은 것이다. 당통은 온건, 중도, 유화, 타협의 길을 선택했다.
---p.312

당통은 불신과 증오심에 사로잡혀 있던 코뮌이나 무기력한 지롱드파보다 전쟁 수행 의지와 혁명적 통합의 열정을 상징했다. 당통은 임시행정위원회의 진정한 리더였다. 전쟁을 일으킨 것은 지롱드파였지만 전쟁을 수행한 것은 당통이었다. 미슐레에 의하면, 이 시기의 당통은 “가장 강력하고 가장 통찰력 있는 혁명가”였다.
---p.314

11월 26일 당통은 파견의원들이 자행하는 공포정치를 고발했다. “우리는 배신자들을 끝까지 추적하되 실수와 범죄를 구분해야 한다. 민중의 의지는 공포정치가 실시되어야 한다는 것이지만, 그것은 공화국의 진정한 적들에게만 향해야 한다. 혁명적 열정이 부족한 사람을 죄인인 양 다루는 것은 민중의 의지가 아니다.”
---p.327

로베스피에르는 전적으로 민중의 편에 섰다. …… 로베스피에르에게 민중의 폭력은 정당했다. 그것을 단죄하는 것은 민중을 단죄하는 것이며, 7월 14일의 민중폭력이 없었더라면 성공할 수 없었던 혁명을 단죄하는 것이었다.
---p.343

제헌국민의회 시기에 로베스피에르는 민중과 민주주의 원칙에 충실했고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다. 1791년 6월 무렵부터 로베스피에르는 ‘청렴지사l’incorruptible’라는 별명을 얻었다.
---p.349

로베스피에르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인정하지 않고 이상과 원칙을 고수했으며 타협을 거부했다. 민중은 그의 원칙주의와 ‘청렴함’에 열광했으나 동료 혁명가들에게서는 지지와 우려가 교차되었다. 그는 시종일관 완전한 개혁을 요구했고, 그럴수록 그의 수사학은 이분법적으로 단순화되어 적을 만들어내고 적의 음모를 고발하는 무기가 되었다. 1794년 7월 27일(열월 9일) 로베스피에르는 국민공회에서 ‘폭군’, ‘독재자’로 몰려 체포되었다.
---p.372

마라는 민중, 즉 빈자들과 약자들의 친구를 자처했으며 공화주의 이념을 지니고 있었다. 《민중의 친구》는 제8호와 제9호(9월 18일과 19일)에 처음 쓴 사설에서부터 국민의회의 숙정을 요구했다. 주권자 민중은 ‘민중의 적’에게 저항하여 ‘정의’를 행사할 권리를 가진다는 것인데 그 구체적인 수단은 폭력과 학살을 넘어 ‘절멸’로 치달았다.
---p.379

코르데는 바르바루를 찾아가 만났다. 바르바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새로운 잔다르크가 없다면, 하늘이 보낸 해방자가 없다면, 프랑스는 끝장이다.” 코르데는 레날 신부의 책을 읽고 폭군 살해는 정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라 살해는 정당한 행동일 뿐만 아니라 구국의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p.388

마라를 가장 잔인한 혁명가로 꼽는 데 역사가들 사이의 이견은 없다. 당통은 민중의 폭력 행사를 막기 위해 의회가 대신 폭력을 행사하자고 말했으나 마라는 민중의 직접 폭력을 촉구한 인물이었다. 마라는 전쟁과 반혁명으로 상황이 급박해짐에 따라 극도로 과격해졌고, 학살 대상도 처음에는 궁정, 의회, 교회, 군 같은 공식 기관의 공적 인물로 제한했으나 점점 모든 반혁명파, 모든 혐의자로 확대했다.
---p.406

버크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으로 빛나는 프랑스의 왕정 체제가 혁명에 의해 붕괴되는 것을 보고 대중독재와 전쟁, 그리고 장군의 지배를 예견했다. 버크의 예언은 정확했다. 페인은 미국에서 일어난 공화주의 혁명을 프랑스를 넘어 전 유럽에 확산시키려 한 이상주의자였다. 그는 프랑스혁명이 정치혁명에서 사회혁명으로 비화되어 파국을 맞이할 것을 내다보지 못했다.
---p.443

미슐레는 …… 프랑스혁명에서는 빈곤문제나 사회문제보다 관념문제가 더 중요했다고 말한다. 혁명은 “결핍의 자식이 아니라 철학(계몽사상)의 자식”이었다는 것이다. 의회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빵집 앞에서도 사람들은 기근보다는 거부권, 미라보의 최근 연설을 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말한다.
---p.459

민중은 언제나 선하고 언제나 옳다는 그의 민중관은 다분히 낭만적인 인식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9월 학살의 민중은 7월 14일의 민중이나 8월 10일의 민중과는 다른 민중이었다는 미슐레의 변론은 역사적이지 못하다. 민중은 처음부터 폭력적이었다.
---p.465

프랑스혁명이 미국혁명과 다른 경로를 취하게 된 것은 아렌트에 의하면 빈자들이 개입하여 사회적 평등을 요구했기 때문인데, 이러한 ‘사회혁명’을 위해 제시된 개념이 ‘행복’이다. …… 18세기에 ‘행복 추구’는 일종의 ‘강박 현상’이었다. ‘행복의 추구’가 정치적인 의미를 가지고 제시된 것은 1776년 7월 4일의 미국 〈독립선언문〉이다.
---p.481

소불이 근대의 농민을 중세의 농노처럼 묘사한 것, 귀족의 특권을 과장한 것, 부르주아 혁명의 성과에 대해 지나치게 인색한 것, 민중혁명의 폭력성에 대해 둔감한 것 등은 바로 이념적 편향성에서 나온 것이다.
---p.505

퓌레에게 있어서 상퀼로트의 무기는 폭력이었고, 그들의 행동은 “지나간 ‘황금시대’에 토대를 둔 고래의 유토피아와 연결된 반동적인 행태”였다. 상퀼로트의 운동에 초점을 맞추어 프랑스혁명의 성격을 규정하면 그것은 부르주아 혁명이 아니라 반부르주아 혁명이다.
---p.516

장클레망 마르탱의 전략은 ‘공포terreur’는 인정하되 ‘공포정치Terreur’는 부정하는 것이었다. 방데 전쟁에서 학살은 있었어도 제노사이드는 없었듯이, 공포는 있었어도 정부 차원의 체계적이고 법적인 공포, 즉 ‘공포정치’는 없었다는 것이다.
---p.543

역사가는 이들을 포함하여 공포정치의 희생자를 3만 5,000명에서 4만 명으로 추산한다. 공포정치 기간에 감옥에 수용된 혐의자의 수는 50만 명으로 추산된다.
---p.570

이들이 원한 혁명은 ‘자유’의 혁명이었다. 반면에 …… 로베스피에르 같은 과격 혁명가들은 정치혁명을 넘어 사회혁명으로 나아가려 했으며, 의회제가 아니라 직접민주주의를 요구했다. 소유권을 제한하고 재산을 몰수하고 재산을 분배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 민중이 혁명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평등’을 요구함에 따라, 버크가 우려한 “자연적 질서의 전복”이 벌어졌다.
---p.577

민중이 계몽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진행된 혁명은 엄청난 부작용을 낳는다는 것을 프랑스혁명은 잔인하게 보여주었다. 혁명, 그것은 순수, 선함, 독선, 위선, 오만, 광기가 용솟음치는 거대한 소용돌이이며, 잔혹한 격전장이다. 혁명은 전쟁이고 폭력이다. …… 혁명은 미래를 위해 희망의 이념을 제시했지만 현실에서는 엄청난 희생자를 발생시켰다. 프랑스혁명의 실상은 프랑스혁명을 “자유, 평등, 박애”의 모범적인 시민혁명으로 동경하고, 혁명을 이상적인 사회 변혁의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이상주의자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p.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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