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담배를 물고 불안으로 늙고 있었다
섬에서 늙는다는 건 비밀이 될 수 없다
덜 먹고 덜 기대하고 덜 꿈꾸는 것이 비밀이었다
비밀을 없애기 위해 물에 드는 여인들의 노래는
바다의 상상이었다
여인들의 얼굴은 눈이 부시었다가 흐릿해졌다
--- p.17 「허유미, 첫물질」 중에서
난 그저 하루를 조용히 보내고
밤에는 당신과 대화를 하고 싶을 뿐이에요
--- p.25 「고주희, 란제리 곶자왈」 중에서
저에게는 혼자 보낸 그 유년의 시간이 최대의 불안이면서 최대의 안전입니다.
놀기라고 썼지만 울음이라고 바꿔서 읽어도 될 것 같습니다. 놀기와 울기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둘 다 실컷 보내고 나면 행복하고 어느 순간 몸 깊숙이부터 지치고 그런데도 중독성이 있어 다시 찾습니다. 놀기 울음 시가 겹쳐지면 빛이 됩니다. 빛은 영원과 순간의 양면성을 가집니다. 오래갈지 우연일지 시를 대하는 앞으로의 자세에 달려 있을 겁니다.
--- p.50~51 「허유미, 혼자이되 혼자가 아닌」 중에서
시를 쓸 때만큼은 과민한 기질을 탑재한 채 자유롭고 대범하며 때로는 죽음의 불가역성에 도전하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주파수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관통하고 있다는 것을 믿는 지금, 사라봉 정상에서 사람들이 주는 당근과 사과를 기다리는 흰 토끼들처럼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것들이 빈틈없이 움직인다.
--- p.82 「고주희 사라봉―한밤의산토끼」 중에서
당신과 나란히 걷지 못하는 나는
일부러 천천히 걷는 사람
그대만 모르게 그대를 사랑하는
느린 사람
--- p.93 「김애리샤, 모서리를 걸어요」 중에서
섬이란 게 그렇잖아요. 가도 가도 안이고 또 가도 가도 바깥이잖아요. 안에선 만질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할 수 없는 말들이 쓸쓸한 가시처럼 언제나 생겨나고요. 바깥에선 섬 내부의 온도를 부추기는 공기들이 들고 나기를 반복하죠. 그 경계에서 섬의 외로움이 철썩철썩 생겨나는 것 같아요. 매일매일 섬의 끝을 향해 걸어도 도착하는 곳은 결국 안이잖아요. 처음과 끝이 같은 곳, 섬. 나는 그 내부에서 미치도록 외롭고 도망치고 싶을 만큼 슬퍼도 행복합니다.
--- p.112 「김애리샤, 나의 사주는 섬」 중에서
맥박이 희미해지도록
왜 나만 그 추운 곳에 데려다 놓는지 알 수 없었다
아침이
죽어 가던 무릎뼈를 일으켜 세워
깨어나기 전 눈의 기슭으로 나팔을 불기 시작한다
크고 흰 치아를 가진 구름을 삽목하면
그 추운 곳에서도 따뜻한 기별이 온다
--- p.128 「김효선, 백합은 그렇게 분다」 중에서
나의 고백은 여전히 이 섬, 제주다. 고독이라고 해도 좋고 바다 너머로 그리워할 것들이 너무도 많은 이곳. 슬프고 아득한 것들이 좋았다. 섬엔 그런 것투성이니까. 여전히 내 시는 이 섬에서 태어나니까. 나와 함께 살고 성장한 서쪽의 심장처럼.
--- p.145 「김효선, 서쪽은 서쪽의 심장을 매달고」 중에서
시인들의 글을 읽으면 제주의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아요. 우도의 늙은 해녀들이 말하는 ‘마파람’을 꼭 닮았단 생각이 듭니다. 겨우내 얼었던 대지 위에 봄을 실어 나르는 부드럽고도 매우 섬세한 바람이에요. 저 멀리 바다를 건너 제주의 바람이 된 문장은 섬의 외로움을 가득 끌어안아 주고, 시린 마음을 뜨겁게 위로해 줍니다.
허유미, 고주희, 김애리샤, 김효선… 네 시인이 보내온 시에 기꺼이 마음을 다해 출렁이고 싶습니다.
--- p.153~154 「이의선 추천사, 마파람을 닮은 봄의 시」 중에서
시라는 말이, 일상의 속도로 인해 우리가 흘려보낸 삶의 풍경들을 더 자세히, 더 깊게, 그래서 더 잘 보고, 듣고, 이해하게 해 주는 언어라고 한다면, 이 시집은 제주를 여행하고 살아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제주의 삶과 풍경을 다시 보여 주는 또 다른 말의 여행입니다. 아마도 그건 시인의 내면으로 본, 더 깊고 다른 삶의 제주이겠지요. 그렇게 우리는 이 시집을 통해 시인 한 분 한 분이 살아낸 제주 삶의 자국들을 만져 볼 수 있습니다. (. . .)
이 얼마나 놀랍고 신비로운 일인가요. 제주를 담은 시라는 것이, 그 시를 한 올 한 올 풀어낼 당신의 마음이란 것이.
--- p.154~156 「이재호 추천사, 시로 만나는 제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