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였다.
“어?”
은지는 얼빠진 소리를 내며 눈을 껌벅였다.
잘못 봤나 싶어 눈에 힘을 주고 다시 봤다. 건너편, 그러니까 서울 북쪽에서 남쪽으로 달리는 도로 위에 이상한 게 보였다. 시커먼 그림자 같은 것이 도로 위를 달리는데, 움직임이 사뭇 튀었다. 자동차라기보다는 네발짐승이 달리는 것 같다.
“……멧돼지?”
하지만 실제 멧돼지라기에는 너무 컸다. 사륜구동차만 한 크기의 검은 멧돼지라니, 한국에 그런 큰 멧돼지가 있을 리가 있나. 몇 년 전 애니메이션에서 본 재앙신을 닮은 모양새와 크기였다.
강은지는 인상을 쓰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가, 저도 모르게 그 멧돼지가 달리는 방향을 따라 뒷걸음질을 쳤다.
철컹, 철컹, 철컹 소리를 내며 전철이 동작역 쪽으로 들어가고, 그 소리에 묻혀 있던 끼이이익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은지는 반사적으로 귀를 막으며 몸을 웅크렸다.
멧돼지가 택시 한 대를 들이받았다. 택시는 퉁 튕기듯이 앞으로 튀어 나가서 속도를 올렸고, 멧돼지는 그 뒤를 씩씩대며 쫓아갔다.
길에 쪼그려 앉았던 은지는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어, 어떻게 해야 하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길에 자동차가 많지 않아서 연속 추돌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였다.
쫓기는 택시와 쫓는 멧돼지가 시야에서 사라지려 하자 은지는 벌떡 일어나서 그쪽으로 달려갔다. 옆으로 한 대씩 지나쳐 가는 차에 시야가 가려졌다가 다시 트이기를 반복했다. 다른 차들은 아무것도 모르는지, 보고도 도망치는 건지 휙휙 잘도 달리고 있었다.
쾅.
택시는 곧 따라잡혀 다시, 제대로 들이받혔다. 은지는 휴대폰을 꺼내어 손에 쥔 채로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다시 한번 눈을 의심했다.
이번에는 자전거였다. 북쪽에서부터 자전거 한 대가 미친 속도로 달려왔다. 체인에서 불똥이 튀고 뒤쪽으로 빛의 꼬리가 끌리는 것 같은 환각이 보일 정도로 미친 속도였다.
택시는 공중에 살짝 떴고, 그 택시를 검은 멧돼지가 그대로 밀고 달렸고, 그 뒤를 미친 듯이 달리는 자전거가 따라붙었다. 은지는 홀린 듯이 그들과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아마 실제 시간은 얼마 흐르지 않았을 것이다.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면서 그렇게 달리다가 어느 순간, 자전거가 체인에서 불똥을 우수수 쏟아 내면서 멧돼지를 들이받았다.
--- p.9~10
퍼뜩, 강은지는 지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왜 밤이 늦도록 산속을 헤매고 있는 것인지.
왜 이렇게 두려움에 떨면서 앞뒤 없이 뛰고 있는 것인지.
지금 이 산이 어느 산인지도 자신이 없어졌다. 북악산? 인왕산? 북한산? 아니, 혹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산했다가 다시 도봉산으로 올라갔을까? 미궁에 빠진 기분이었다. 혹시 아예 다른 세상에 떨어진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멀리서 무슨 짐승인지 모를 울음소리가 들렸다. 뼛속까지 얼어붙는다는 표현이 왜 있나 했더니, 정말로 그 소리를 듣자 몸 속이 얼어붙었다.
“아니, 아니야.”
은지는 걸음을 멈추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패닉에 빠지면 해결할 수 있는 일도 해결하지 못하게 된다. 정신부터 똑바로 차리는 게 우선이었다.
땀에 젖은 손바닥을 문지르는데, 손에 잡히는 소나무 껍질의 감촉이 이상했다.
머릿속이 헝클어졌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더라.
생각하다 보니 서서히 기억이 돌아왔다.
--- p.44~45
은지는 지도를 띄운 화면을 보며 감탄했다. 서울 한가운데에 있는 성곽은 더욱 새로웠다. 동대문과 남대문은 머릿속에 지하철역 이름으로, 큰 시장이 있는 곳으로 더 다가왔지 실제 성곽 문이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살았다. 그런데 그게 정말로 동서남북에 뚫어 놓은 대문이었다니.
‘흠. 마침 올해 서울 성곽길 전체를 시민에게 개방한다고? 나도 언제 한번 걸어 볼까.’
잠시 생각이 다른 데로 빠졌지만, 백악이 한양도성의 주신이라니, 그렇다면 서울을 지킨다던 말도 헛소리가 아닐지 몰랐다.
내사산이라고는 해도 낙산이나 인왕산 산신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고, 목멱대왕이라는 거창한 이름에 비해서는 남산의 산신도 별로 나오는 게 없었다. 일제가 남산에 조선신궁을 세우느라 산신각을 헐어 버려 인왕산으로 옮겨야 했다거나, 지금은 남산 와룡묘(제갈공명을 모시는 사당)에서 남산의 산신까지 모신다거나 하는 조금 씁쓸한 이야기 정도.
그리고 백악산신에 대해서는 전설이 하나 있었다.
은지는 미심쩍은 기분으로 화면을 보았다.
“정녀부인? 아까는 진국백이라고 하더니, 같은 신이야, 다른 신이야?”
〈천예록〉이라는 책에 수록된 이야기였다. 조선시대 백악산 꼭대기에 신당이 있어, 그 안에 걸린 정녀부인의 그림을 찾아기도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선조 때 유명한 문인이 된 권필이 어릴 적에 백악산에 놀러 갔다가 이 모습을 보고 분개하여, 여자 귀신 주제에 제멋대로 군다고 호통을 치며 정녀부인의 그림을 찢어 버렸다. 그날 밤 권필의 꿈에 흰 저고리에 푸른 치마를 입은 부인이 나타나서 복수하겠다고 했다. 이후에 권필이 화를 입어 고문당한 후 해남으로 귀양 가는 길에 죽었는데, 그게 정녀부인의 복수였다는 이야기였다.
“아니, 무슨 신이 이래?”
은지는 찌푸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산신령이 소원을 들어주는 동화는 봤어도, 자기를 홀대한다고 쪼잔하게 복수하는 산신령 이야기는 처음 보았다. 게다가 그런 힘이 있다면 당장 벼락을 칠 것이지 무엇 하러 몇십 년 후에 권세 잃고 귀양 가는 사람에게 복수를 한단 말인가. 여자 귀신 운운한 권필도 지질하지만 복수라는 내용도 쩨쩨했다.
“내가 너무 현대인 시각으로 보나?”
미심쩍은 기분으로 검색을 더 해 보니, 비슷비슷한 이야기가 몇 개 더 나왔다. 다만 역시 원본이 나오는 게 아니다 보니 요약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했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권필이 가한 모욕에 정녀부인이 격분하여 조선에 벌을 내리겠다고 하더니, 그다음 해에 임진왜란이 났다고 했다.
“이쪽이 더 신 같기는 하네.”
산신령이라기보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쪼잔하고 무서운 신을 더 닮긴 했지만 말이다.
--- p.5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