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허, 짝짝’ 소리가 난다.
아, 벌써 와카야마 보쿠스이가 산책을 하는구나. 나는 덧문과 미닫이문을 연다. 그러고는 다시 이부자리 속으로 파고든다. 드러누워 도야마학교를 둘러싼 신록을 바라본다. 어느덧 모자를 쓰지 않은 기모노 차림의 땅딸막한 소년이 입을 벌린 채 양손을 짝짝 치며 앞쪽 빈터를 걸어간다. 까맣고 빳빳한 허리띠 매듭이 엉덩이 위에 처져 있다.
‘어허, 짝짝.’
바람이 햇빛과 함께 반짝이며 불어온다. 하숙집 대나무 울타리 안쪽에서 닭 두세 마리가 먹이를 찾아다닌다. 오늘 있는 영작문 수업은 딱 질색이다.
“어이, 와카야마.”
“여! 일어났네? 짝짝.”
나도 문지방 너머 마당 쪽으로 양발을 늘어뜨린다. 어허, 짝짝. 좀처럼 잘 되지 않는다.
“오늘도 도망칠까?”
“어디로?”
“어디라도 좋아. 영작문은 질렸어.”
“에헹.”
그가 묘한 소리를 낸다. 아침밥을 먹고 나서 보쿠스이는 호주머니에 구니키다 돗포의 『무사시노』를 집어넣고, 나는 맨손으로 훌쩍 길을 나선다. 초여름의 무사시노 들판, 어딜 가든 들길은 가로세로로 뻗어 있다. 어린잎 푸르른 상수리나무 숲에 짐수레가 삐거덕댄다.
--- p.19~20 「동네 산책 _ 기타하라 하쿠슈」 중에서
풀을 향한 이 친밀감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내게 풀이란 아무리 작고 덧없을지라도 땅속에 숨어 있는 생명의 눈이다. 촉각이다. 온각이다. ‘생명’이란 아무리 변덕스럽고 헛된 표현을 하더라도 아름다움이 있고 힘이 있고 광채가 있다. 수많은 물질 가운데 풀에 드러난 생명만큼 겸손하고 소박하며 정직하고 참을성 강한 것은 없다. 풀이야말로 내게는 ‘언어’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신기한 존재다. 발굽이 없는 탓에 한곳에 멈춰 선 작은 짐승이다. 성대가 없기에 평생 침묵을 지키는 작은 새다.
--- p.65~66 「풀밭 산책 _ 스스키다 규킨」 중에서
아무리 앞으로 걸어가도 나쓰메 선생의 묘는 보이지 않았다.
“하나 더 앞에 있는 길이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왔던 샛길을 되돌아가며 매년 선생의 기일인 12월 9일에는 신년호 원고 마감에 쫓기느라 거의 성묘하러 오지 못했음을 떠올렸다. 이 계절에 몇 번 오지 않았다고 해서 위치를 잊어버리다니,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다.
그다음 약간 넓은 샛길에도 묘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되돌아가는 대신 산울타리 사이에서 왼쪽으로 돌았다. 그래도 안 보였다. 뿐만 아니라 내가 기억하는 몇몇 빈터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물어볼 사람도 없고…… 난감하네요.”
K 군의 말에서 냉소에 가까운 감정을 분명히 느꼈지만, 알려주겠다고 말한 주제에 화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 p.76~77 「나쓰메 소세키 묘지 산책 _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중에서
나는 대합실 벤치에 걸터앉아 히쭉 웃었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 도쿄에 와도 소용없다고 그토록 충고했잖아. 아가씨, 아저씨, 청년 모두 생기를 잃고 멍하니 자리에 앉아 둔하고 탁한 눈으로 대체 어디를 바라보는가. 허공에 뜬 환상의 꽃을 좇고 있다. 다양한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갖가지 실패를 기록한 두루마리 그림이 공중에 펼쳐지리라.
벌떡 일어나 대합실에서 도망쳤다. 곧바로 개찰구 쪽으로 걸었다. 7시 5분 도착 급행열차가 플랫폼에 지금 막 들어온 참이었다. 흑색 개미들이 서로 밀치락달치락하거나 또는 대굴대굴 구르며 개찰구를 향해 돌진한다. 손에는 트렁크. 손바구니도 드문드문 보인다. 아, 봇짐이란 물건이 아직 이 세상에 있었다. 고향에서 쫓겨나기라도 했나.
청년들은 꽤 멋쟁이다. 그리고 예외 없이 긴장감 속에서 들떠 있다. 가련하다. 어리석다. 아버지랑 싸우고 뛰쳐나왔겠지. 바보 같은 녀석들.
--- p.107~108 「역전 산책 _ 다자이 오사무」 중에서
밖으로 나오자 4미터 가까이 앞은 보인다. 4미터쯤 걸어가면 다시 그만큼 앞이 보인다. 세상이 사방 4미터로 줄어들었나 싶다가도 걸을수록 새로운 사방 4미터가 드러난다. 대신 지금 막 지나온 과거 세계는 그대로 사라진다.
네거리에서 2층 승합마차를 기다리는데 쥣빛 안개를 가르며 갑자기 눈앞에 말 머리가 나타났다. 위층에 탄 사람이 미처 안개를 빠져나오지 못했음에도 나는 안개를 헤치고 올라탔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말 머리가 으스름하게 보였다.
승합마차가 달려가다가 마주치는 풍경은 딱 마주치는 순간에만 아름답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색채를 지닌 모든 것이 탁한 공중으로 사라져버린다. 아득한 무색 가운데 포위된다.
웨스트민스터 다리를 지나는 동안 새하얀 물체가 두세 번 눈을 스치며 나부꼈다. 눈을 크게 뜨고 행방을 쫓으니 안개에 갇힌 대기 속에 갈매기가 꿈결처럼 아스라이 날고 있었다. 그때 머리 위에서 국회의사당 대형 탑시계가 엄숙하게 10시를 알렸다. 하늘을 올려다봐도 허공에서 그저 소리만 들려왔다.
--- p.210~211 「런던의 안개 산책 _ 나쓰메 소세키」 중에서
도시의 밤을 사랑한다. 불빛 찬란한 항구를 사랑한다. 하코네 밝은 달이나 오이소 바다 물결보다 긴자에 깃든 황혼이나 요시와라 유곽 한밤이 더 멋지기에 무더운 계절 홀로 도쿄 집에 머무를 때도 누구나 알다시피 그곳에 간다.
그러니 일단 뉴욕에 도착한 이래 가는 곳마다 온통 불이 꺼지지 않는 이 신대륙 대도시의 밤이 얼마나 즐겁겠는가. 새삼 말하지 않아도 알리라. 뉴욕은 실로 놀랄 만큼 불야성중의 불야성이다. 일본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환하고 눈부신 전등의 마계다.
해가 져서 밤이 온다 싶으면 거의 무의식적으로 집을 나선다. 대로, 골목, 극장, 레스토랑, 정거장, 호텔, 댄스홀…… 어디든 상관없다. 찬란한 불빛이 가득한 세계를 보지 못하면 적막하기 그지없고 슬프기 짝이 없다. 마치 살아 있다기보다 격리된 듯한 절망을 느낀다. 전등 빛깔은 마침내 내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 되었다.
--- p.241 「뉴욕의 밤 산책 _ 나가이 가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