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짓고, 책을 만드는 데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나에 대한 변명을 하자면, 예수 본받기는 예수를 기억함이고(키에르케고어),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기록된 성경 공동체(뉴비긴)이기에 나는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예수의 공동체는 다름 아닌 예수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공동체다. 그것이 예수를 살아내는 방법이자 핵심이다. 교회는 예수를 살고 말할 뿐만 아니라 예수를 기록한다.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는 자신을 제자와 소자와 동일시했고, 교회와 자신을 일치시켰다. 성자는 성경이 되고, 성도가 되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을 ‘그 책의 사람들’(The People of the Book)이라고 하는가 보다.
--- 「프롤로그」 중에서
글쓰기는 개인의 내면뿐 아니라 타락한 세상도 변혁한다. 글쓰기에서 가장 해로운 적은 상투성이다. 그렇고 그런 이야기를 너저분하게 늘어놓으면 글을 망치고 읽기를 방해하고, 감동과 감흥은커녕 설득력도 떨어진다. 시인 안도현은 익숙한 것과 결별할 때 시다운 시를 쓸 수 있다고 충고한다. 예컨대, 가을을 주제로 낙엽, 코스모스, 귀뚜라미, 단풍잎 등의 단어를 연상하고 시를 쓴다면 상상력 제로의 형편없는 시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상투성은 시의 가장 큰 적이다”.
--- 「5. 글쓰기는 세상을 변혁한다」 중에서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책을 많이 읽어야 하지만 다독이 만사도 능사도 아니다. 읽어도 많이, 넓게 읽어야 하지만, 한 권을 읽어도 제대로 읽지 않으면 안 된다. 깊이 읽고, 바르게 읽어야 한다. 읽어도 생각하면서 읽어야 한다. 이것이 두 번째 독서 규칙이다. 독서는 생각하는 힘의 원천이지만, 생각과 더불어 가야 독서가 생각과 몸을 바꾸고, 인생 역전 드라마도 그린다. 이를 구양수는 ‘다상량’(多想量)이라 했고, 모티머 애들러는 적극적 독서라 했고, 나는 공격적 책읽기라 했다.
--- 「6. 읽고 또 읽으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