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겨울정원을 가꾸는 일도 이와 비슷하다. 당장 겨울에만 보기 좋게 하려고 정원을 꾸미는 것이 아니다. 겨울 경관이 보기 좋으려면 정원의 기본 골격과 바탕을 탄탄히 다듬어줘야 하므로, 겨울이 아름다운 정원은 다른 계절에는 훨씬 아름다워진다. 그러므로 사계절 아름다운 정원을 만드는 일은 겨울정원을 가꾸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 p.7 서문
정원사인 내게는 ‘좋은 정원에는 그 계절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이 오롯이 담겨야 한다’는 믿음이 있다. 봄의 정원에는 생명이 움트는 기운과 설렘이, 여름의 정원에는 혈기왕성한 역동적인 에너지가, 가을의 정원에는 원숙한 색채감과 여유가 잘 담겨야 계절에 맞는 좋은 정원이 된다. 마찬가지로 겨울날의 정원은 자연이 이 계절에만 보여주는 아름다움을 잘 담아냈을 때 비로소 아름답다 말할 수 있다. | p.12 겨울을 정원에 담다
정원의 나라 영국에서도 꿈꾸던 윈터가든을 구현하게 된 것이 그리 오랜 일은 아니다. 윈터가든이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19세기 초였지만 지금의 윈터가든과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 빅토리아 여왕이 통치하던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윈터가든은 연회를 위해 만든 커다란 관상용 온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당시 런던, 브라이턴, 에든버러, 셰필드 등 많은 도시에서 온실을 지어 이국적인 식물들로 실내 정원을 연출하고 거기서 밴드 공연이나 무도회 등의 연회를 여는 것이 크게 유행했다.
| p.24 영국의 윈터가든
나뭇가지는 겨울에 더 아름답게 보인다. 무성했던 푸른 잎을 미련 없이 내려놓고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뒤에야 그제껏 잎에 가렸던 나무의 진면목, 수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자기가 선 자리에서 꼼짝없이 추위를 맞고 있는 앙상한 겨울나무는 한편으로는 안타깝고 측은해 보이지만 실은 나무 본연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드러낸 당당한 모습이다. | p.48 수형: 겨울날 드러나는 나무의 진면목
나무들의 다양한 수피를 관찰하고 있으면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그 무늬 때문에 아름다운 패턴화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세월의 흔적이 오롯이 새겨진 초상화를 보는 듯도 하다. 실제로 수피의 개성적인 문양에서 착안해 섬유나 벽지 패턴을 개발한 경우도 종종 있었다.
| p.62 줄기: 시간을 새긴 나무의 맨얼굴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롱우드가든의 정원사인 판도라는 해마다 11월이면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야생동물들을 위한 크리스마스트리인 야생동물나무(Wildlife Tree)를 만든다. 추운 겨울에 먹이가 부족한 야생동물을 위해 조, 수수, 콩 등의 열매를 활용한 장식물을 만들어 나무에 걸어주는 것이다.
| p.78 열매: 온기를 품은 겨울나무의 꽃
모두가 간과했던 갈색을 정원에 적극적으로 활용해 가치를 알린 사람이 있다. 네덜란드의 정원 디자이너 피에트 우돌프(Piet Oudolf)다. 조경 디자인 분야의 슈퍼스타로 여겨지는 그를 소개한 다큐멘터리의 첫 장면은 늦가을 정원을 바라보는 그의 그윽한 시선으로 시작된다. “이 갈색의 정원에서 나는 아직도 아름다움을 찾고 있다.” | p.92 마른 풀: 갈색은 겨울 색이다
갈색 정원 문화가 발달한 외국에서는 마른 나뭇잎을 겨울정원에 잘 활용해왔다.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형태는 유럽너도밤나무를 생울타리로 이용한 경우다. 유럽너도밤나무는 마른 잎을 달고 겨울을 나는 대표적인 나무이며, 이 나무를 생울타리로 활용하면 겨울에 갈색 수벽을 연출할 수 있다. 겨울철에 수벽이라고 하면 주로 주목이나 회양목을 활용한 상록성 수벽을 생각하기 쉬운데, 마른 잎이 잔뜩 달린 유럽너도밤나무가 만들어내는 갈색 수벽은 독특한 매력이 있다.
| p.120 마른 나뭇잎: 마지막 잎새까지 정원에 담다
침엽수가 겨울에도 푸른 잎을 달고 있는 데도 다 이유가 있다. 긴 겨울에 비해 여름이 너무 짧은 한 대지방에서는 에너지를 많이 들여 매해 잎을 새롭게 만들기보다 이전의 잎들을 단 채로 겨울을 버티는 것이 유리하다. 심지어 가문비나무의 잎은 수명이 15년 정도나 된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침엽수들은 참 참을성이 많은 나무가 아닌가! 아니, 똑똑한 나무라고 해야 할까?
| p.128 상록침엽수: 겨울에 더욱 빛나는 푸르름의 가치
상록수의 한결같은 모습은 역설적으로 변하는 것의 아름다움에 관해서도 생각하게 한다. 정원에 변화가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훌륭한 정원은 갈 때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매월, 매주, 심지어 매일 찾아가도 조금씩 달라 보인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자연의 변화가 오롯이 느껴지는 정원이야말로 잘 만든 정원이고, 그 변화가 궁금해서 또 가고 싶어진다.
| p.225 상록활엽수: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짧은 사색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이른 봄에 꽃피는 구근을 잘 활용한 정원을 별로 보지 못했다. 아마도 꽃을 틔우기까지 깊숙이 묻어두는 기다림의 시간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당장 눈에 띄지 않고 수개월 뒤에나 확인할 수 있는 불확실한 아름다움을 위해 정원의 한편을 내어주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가드닝의 깊은 맛은 그런 기다림에서 온다. 작은 나무를 심으며 수년 후 크게 자란 모습을 상상하는 것, 가을에 심는 구근으로 봄 정원이 얼마나 아름다워질지를 그려보는 것. 그런 상상을 할 때가 정원사는 가장 행복하다. | p.175 겨울에 꽃피는 구근: 겨울과 봄 사이를 잇는 정원의 마법사
좋은 향기는 그 정원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하는 요소이다. 우리는 정원을 눈으로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오감으로 느낀다. 때로는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나 풀숲에 살갗이 스치던 촉감으로 정원을 기억하기도 한다. 영국 세빌정원의 좁다란 겨울 산책로를 걸으면 네팔서향의 향기가 확 풍긴다. 누구든 ‘와, 이게 무슨 향기지?’라는 생각과 함께 얕은 탄성을 내지르지 않을 수 없다. 내 기억 속의 천리포수목원도 12월 말부터 꽃피는 그윽한 납매 향기로 남아 있다.
| p.182 겨울에 꽃피는 나무: 추울수록 더욱 진한 향기를 품는다
어떤 생태학자는 이맘때 숲의 모습을 ‘기회의 창’이라고 했다. 아직 나무들에 잎이 돋지 않아 숲의 지붕이 열려 있고, 그 사이로 걸러져 내린 빛이 숲 바닥에 깔린 작은 식물들에게 적당히 밝은 광도로 비친다. 이 시기를 지나면 무성한 나뭇잎에 가려 숲 바닥까지 충분한 빛이 닿지 않는다. 서둘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작은 풀꽃들이 용케도 우르르 고개를 내민다. 그래서 초봄은 작은 풀꽃들을 위한 시간이다. | p.194 겨울 풀꽃: 정원의 봄은 어디로부터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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