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태원에 사는 여자다. 한국에서 가장 다양한 색을 가지고, 가장 화려하고, 또 자유로운 곳. 내 곁에는 늘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 이웃들이 있고, 내 눈 앞에는 항상 세계 곳곳의 맛있는 먹거리가 가득하다. 동네 초등학교 앞은 저마다 얼굴색과 말투가 다른 어린 아이들이 뛰어놀고, 자주 가는 마트와 식당은 외국인 손님들로 가득하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카페 안에도 익숙한 외국인들이 저마다의 언어로 토크를 하는 중이다. 한 마디로. 아주 글로벌한 여자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나의 영어 실력은 왕 초보.
처음으로 국제선을 타고 타국의 땅을 밟은 건, 무려 서른 둘.
굉장히 한국적으로 이태원을 살아온 평범한 주민일 뿐이다.
--- 「이태원 : 이태원에 사는 여자」 중에서
전 세계 인류 중, 1%밖에 없다는 MBTI 유형. ‘선의’와 ‘옹호자’로 표현되지만 ‘고독’과 ‘집착’, ‘근심 걱정’과 ‘의미’가 따라붙는 ‘혼자가 편한’ 사람. 나는 인프제(INFJ)다.
인프제들은 늘 완벽을 추구하면서도 앞에 나서는 걸 꺼리기 때문에 어찌 보면 ‘여행자’ 라는 단어가 안 어울릴 수도 있다. 특히 나와 같이 여행을 막 시작한 사람이라면 모든 게 낯설고, 걱정 투성이 일 수 밖에 없다. 꼬리의 꼬리의 또 꼬리를 무는 생각 덕에 여행 계획을 세우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리고, 누군가와 맞추기 보단 홀로 걷는 쪽이 편하니 여행에 제약도 많다. 그러나! 덕분에 인프제의 여행은 더 버라이어티 하게 바뀐다.
--- 「인프제의 여행」 중에서
항상 늦게 배운 도둑이 더 무서운 법이다. 늦게 여행을 배운 나는 프로그램을 하나 마치고 쉬는 시간이 생길 때면 계속 떠났다. 오히려 남들이 여행을 시작하던 때보다 주머니가 살짝 더 넉넉해졌다고 틈만 나면 지르고, 틈만 나면 새로운 걸 찾았다.
게다가 나는 방송작가 아닌가. 이 엄청난 직업은 나의 여행질에 자꾸만 불을 붙였다.
여기서 방송작가들의 작가병을 살짝 언급해보겠다. (아주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이 병의 확진자들이 꽤 많다.)
1. 잘 상상한다.
2. 잘 쑤시고 다닌다.
3. 잘 들이댄다.
4. 잘 적응한다.
5. 잘 적어댄다.
나의 작가병은 인생에서 여행을 만나고, 걷잡을 수 없이 중증이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여행자로 살아가겠다는 나의 결심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게 된다.
--- 「늦게 배운 여행질」 중에서
바르셀로나에서 크루즈는 출항했고, 7박 8일간 아름다운 지중해를 돌며 촬영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엄청난 촬영 스케줄과 수많은 복불복 탓에 나의 영혼은 지중해 위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올라’, ‘봉주르’, ‘본조르노’, ‘헬로우’를 외치며 센 척하던 촬영지들을 떠나고 나니, 그제야 내가 유럽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는 사실에 얼떨떨해졌다. 불과 1년 전만해도 처음 타본 국제선 비행기 안에서 손이 땀으로 흠뻑 젖었는데... 방송 덕분이지만, 마치 유럽 여행을 털어낸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내가 이곳들을 촬영이 아니라 여행으로 왔다면 어땠을까? 보다 천천히 누비고 머물렀다면 더 좋았겠지? 아쉬움이 밀려왔지만, 내가 느낀 건 아쉬움뿐이 아니었다.
눈으로만 바라본 로마는 나에게 다시 찾을 마음을 저절로 선물했다.
다시 찾았을 때, 그 감동은 또 어떠하겠는가.
나는 이 마음을 깨달은 순간, 더 이상 ‘조금 늦은 초보 여행자’가 아님을 깨달았다.
--- 「로마 : 아쉬움과 설렘 사이」 중에서
이탈리아 촬영을 위해 사전 답사를 왔을 때의 일이다. 우리는 촬영 장소인 ‘미라노’ 근처에 있는 베네치아의 ‘리알토 시장’에서 장을 봐야했는데, 미리 물건을 살 가게들을 섭외하고 동선을 체크하기 위해 베네치아로 향했다.
내 눈으로 만난 베네치아는 소문대로 정말 완벽했다. 가운데 넓고 길게 흐르는 베니스 강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골목마다 영화에서 본 듯한 비주얼의 건물들이 가득했고, 곤돌라를 타고 강을 달리는 여행자들과 기념품 상점에서 화려한 가면을 고르는 여행자들의 얼굴마다 행복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물론 내 얼굴엔 섭외 걱정, 기록할 걱정에 한숨만이 따라다녔고 말이다.
그리고 본 촬영을 위해 다시 베네치아를 찾았다. 답사를 다녀온 나는 선발대로 먼저 이곳에 도착해 모든 체크를 마친 뒤, 아주 운이 좋게도 출연자들이 올 때까지 카푸치노 한 잔을 마실 시간이 있었다. 나는 출연자들을 기다리며 카페 앞으로 나있는 이른 아침의 베네치아를 보러갔다. 새벽이라 살짝 어둑했으나 여전히 예쁘고, 고요한 그 강에게 웃음을 건넸다.
--- 「베네치아 : 어떻게 답사까지 사랑하겠어, 여행을 사랑하는 거지」 중에서
정말 손님이 없었는지 그날 BAR 안에는 나 뿐 이었다. 조용히 오늘의 글을 마무리 하려는데, 갑자기 라이브 밴드가 나타났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아마도 내가 와서 출근을 한 모양이다. 싱어는 라이브 한 곡을 마치고 내 이름과 국적을 물어보더니 급기야 ‘백만송이 장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고독을 즐기는 인프제에게 지나친 관심은 최악이지만, 그 순간 나의 알파벳은 바뀌고 말았다. 엄청 부담스럽고 민망해서 얼굴까지 빨개지고 어쩔 줄 몰라 했으나, 왜인지 방으로 돌아가기는 싫었다. 낭만에 가득 찬 나는 그곳에서 가장 비싼 칵테일 한 잔을 주문해 마시며, 오직 나를 위한 밴드의 공연을 즐겼다. 아주 여유롭게. 마치 여행을 떠나올 때마다 BAR를 늘 찾았던 베테랑처럼 말이다.
‘종일 햇살이 뜨겁고, 땀이 흐르는 이 곳. 그런데 마법같은 저녁이 다가오니 바람이 분다. 내 앞에는 놀랍게도 칵테일과 BAR. 그리고 날 위해 노래하는 밴드가 있단다. 놀라운 나는, 방금 여기서 가장 비싼 시그니처 칵테일을 주문했다. 취하면 더 맛있으려나, 한 잔 더 마실까. 다 마시고, 별 보러 가야지!‘
무이네에 서 있는 내 존재의 이유가 충분히 설명되는 밤이었다.
--- 「무이네 : 여행의 이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