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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5월 17일
쪽수, 무게, 크기 640쪽 | 918g | 153*224*40mm
ISBN13 9791185393926
ISBN10 1185393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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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 노려보니, 눈동자가 시큰거린다. 멀리 떨어진 이탈리아 해안은 바닷물이 증발하며 옅은 안개구름이 천천히 일어나는 덕분에 약간 누그러져도, 다른 곳은 아니었다. 먼지를 덮어쓴 채 이글거리는 도로는 머나먼 산 중턱에서 노려보고, 계곡에서 노려보고, 끝없이 뻗은 들판에서 노려보았다. 도로변 주택 위로 머리를 내밀다 먼지를 뒤집어쓴 포도나무도, 대로변에서 단조롭게 타들어 가는 가로수도 땅과 하늘이 노려보는 눈빛에 축 늘어졌다. 짐마차에 매여서 방울 소리를 나른하게 울리며 내륙 쪽으로 줄지어 느릿느릿 기다랗게 나아가는 말도 축 늘어지고, 꾸벅꾸벅 졸다 가끔 깨어나는 마부도 축 늘어지고, 들녘에서 힘들게 일하는 일꾼도 축 늘어졌다. 살았거나 자라나는 생명체는 누구나 매섭게 노려보는 눈빛에 하나같이 사그라들었다. 울퉁불퉁한 돌담 위로 빠르게 지나는 도마뱀과 맴맴 소리를 메마르게 뱉어내는 매미만 예외였다. 흙먼지 자체도 갈색으로 그을리고, 흔들리는 대기는 공기조차 숨을 헐떡이는 것 같았다.

“나는 예민하고 용감합니다. 예민하고 용감한 걸 자랑하자는 게 아니라 성격이 그렇다는 뜻입니다. 집사람 처가 쪽 남자들이 속을 털어놓았더라면 나도 대화로 풀어갈 수 있었을 겁니다. 그들은 그걸 알면서도 은밀하게 음모를 꾸몄으니, 불행하게도 집사람과 나는 툭하면 충돌하고 말았습니다. 개인적으로 돈이 약간 필요할 때마다 충돌하지 않으면 돈이 손에 안 들어왔습니다…… 남을 지배해야 마땅한 성격을 가진 사내가 말입니다! 어느 날 밤에 집사람과 나는 연인 사이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사랑스럽게 산책하러 나갔습니다, 바다가 쑥 들어오는 절벽이었는데, 나쁜 별자리에 영향을 받아, 집사람이 처가 식구들 얘기를 꺼냈습니다. 나는 상식적으로 풀어가며, 처가 식구들이 남편을 질투하고 흉보는 말에 영향을 받는 건 부인으로서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는 걸 증명할 뿐이라고 충고했습니다. 집사람은 반박하고, 나도 반박하고, 집사람이 흥분하고, 나도 흥분해서 집사람을 자극했습니다. 그건 인정합니다. 나는 솔직한 성격도 있으니까요. 마침내 집사람은 내가 영원히 후회할 수밖에 없는 분노에 휩싸인 채 (상당히 멀리 떨어진 거리까지 들릴 정도로) 커다란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들어, 내 옷을 찢고, 내 머리칼을 움켜잡고, 내 손을 할퀴고, 두 발로 흙바닥을 쾅쾅 내려치더니, 결국에는 절벽 밑으로 뛰어내리고 바위에 부닥쳐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게 사고 경위로, 악의를 품은 사람들은 내가 집사람한테 재산을 모두 양도하도록 요구하고,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집사람과 몸싸움을 벌이다 살해했다는 식으로 왜곡한답니다!”

많은 사람이 캐스비 노인에게 기쁘게 수여한 명칭은 족장이었다. 동네 할머니 대부분이 캐스비 노인이야말로 ‘마지막 족장’이라고 말했다. 백발이 치렁치렁하고 더없이 느리고 조용하면서도 열정적이고 머리가 더없이 울퉁불퉁한 걸 보면, 족장은 캐스비 노인에게 딱 맞는 별명이었다. 거리에서 사람들이 인사하고, 화가와 조각가는 족장 모델을 해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마음을 다해 끈질기게 졸라대는 걸 보면 예술계도 족장의 특징을 떠올리거나 만들어낼 수 없는 것 같았다. 남자든 여자든 자선 사업을 좋아하는 사람은 저 노인이 누구냐 묻고, “예전에 데시무스 타이트 바너클 경의 런던 소재 부동산 대리인이던 크리스토퍼 캐스비 노인”이라는 설명을 듣는 순간에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아! 저런 표정을 지닌 사람이 왜 인류를 구원하는 자선 사업가가 아니란 말인가! 아, 저런 표정을 지닌 사람이 고아의 아버지가 안 되고, 외로운 사람의 친구가 안 되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라며 한탄했다. 하지만 저런 표정을 지닌 당사자는 크리스토퍼 캐스비 노인으로 남아, 부동산 부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저런 표정을 지닌 당사자가 지금 조용한 응접실에 앉아있었다. 캐스비 노인이 그런 표정 없이 그곳에 앉아있길 기대하는 건 불합리의 최고봉이 아닐 수 없었다.

클레넘 마님 방은 죽도록 단조로웠다. 변화라고는 이리저리 흔들리는 벽난로 불빛과 촛불 불빛이 유일했다. 길고 좁은 창문 두 개는 대낮에도 불빛이 음울하게 비치고 한밤중에도 음울하게 비쳤다. 클레넘 마님이 그런 것처럼 열정적으로 반짝일 때가 없었던 건 아니나, 대체로 클레넘 마님처럼 억눌린 채 자신을 천천히 조금씩 갉아먹는 불빛이었다. 하지만 낮이 짧은 겨울날 이른 오후에 어스름이 깔리면, 휠체어에 앉은 클레넘 마님도, 목이 옆으로 굽은 예레미야 노인도, 끊임없이 드나드는 애프리도 그림자가 뒤틀리며 입구 위 건물 담장에 어려, 환등기가 쏘아 올린 영상처럼 맴돌았다. 방에 갇힌 환자가 밤에 침대에 누우면 그림자도 점차 사라지지만, 애프리 그림자는 늘 마지막까지 촐랑대며 돌아다니다 공중으로 살그머니 사라지는 게, 마녀가 소풍이라도 가는 것 같았다. 그러면 촛불 혼자 가만히 타오르다 새벽녘에 희미하게 변하고, 마녀처럼 자다 일어난 애프리 그림자는 훅 부는 숨결에 죽었다.

귀부인은 자연의 손길을 받아서 젊고 생생한 건 아닐지언정 하녀의 손길을 받아서 젊고 생생했다. 크고 잘생긴 눈은 무감각하고, 까맣고 잘생긴 머리칼도 무감각하고, 크고 잘생긴 가슴도 무감각한데, 모든 부분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세세하게 살렸다. 감기에 걸렸는지 아니면 자기 얼굴에 어울리는지, 머리 위와 턱밑으로 하얗고 화사한 띠를 둘렀다. 잘생겼지만 무감각해서, 흔한 말로 남자가 손으로 “어루만진 적”이 한 번도 없는 턱이 있다면, 그건 레이스 띠로 고삐처럼 단단히 묶은 바로 그 턱이었다.

“그저 그래요. 솔직히 말해서 그런 편에 가깝지요. 나는 대단한 사기꾼이 아니거든요. 내 그림은, 단둘이니 하는 말인데, 돈을 내고 살만한 가치가 없답니다. 다른 사람 그림을 - 나는 상대도 안 될 유명한 교수 그림을 - 사는 건 돈을 더 낼 가능성이 크나, 사기를 당할 가능성 역시 크지요. 누구나 그러니까.”
“모든 화가가?”
“화가, 작가, 애국자,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 모두. 10파운드를 주면 그 액수만큼, 천 파운드를 주면 그 액수만큼 - 만 파운드를 주면 그 액수만큼 - 사기를 치지요. 크게 성공할수록 크게 사기 치는 거예요. 정말 멋진 세상이지요! 즐겁고 훌륭하고 사랑스러운 세상!”

그랑 생베르나르 고개에서 스위스 쪽으로 제네바 호수 제방을 타고 뻗어간 계곡에서 포도를 수확한다. 포도 향이 공중에 가득하다. 포도로 가득한 바구니와 커다란 통과 기다란 통을 어스름한 마을 주택 입구마다 세워서 가파르고 좁은 길을 하나같이 틀어막은 채, 큰길마다 골목길마다 온종일 바쁘게 운반한다. 포도가 바닥 곳곳에 떨어져서 짓밟힌다. 농부 여인네가 아기를 등에 업고 포도를 집으로 힘겹게 나르다 포도알을 건네면 아기는 순식간에 울음을 그치고, 어떤 멍청이는 폭포로 가는 길가 통나무 오두막 처마 밑에 앉아서 큼지막한 종기에 햇볕을 쬐며 포도를 우적우적 씹는다. 젖소와 염소가 내쉬는 숨결마다 포도 잎사귀와 줄기 냄새가 진하게 깃들고, 조그만 선술집마다 포도를 먹고 마시며 포도 얘기로 꽃을 피운다.

제너럴 부인은 의견이 없었다. 마음을 다지는 방식은 의견이 생기는 자체를 차단하는 거였다. 머릿속에 홈을 동그랗게 파거나 레일을 동그랗게 깔아서 다른 사람의 다양한 의견이 열차처럼 지나가게 하니, 각 열차는 다른 열차와 부닥친 적도, 특정 목적지에 도달한 적도 없었다. 제너럴 부인의 예의범절은 세상에 부당한 게 있어도 따지질 않았다. 부당한 걸 없애는 방법은 눈에 안 보이는 데로 치워놓고 아예 없는 척하는 것이었다. 마음을 다지는 또 다른 방법……골치 아픈 품목은 찬장에 쑤셔 넣고 자물쇠를 채워서 아예 없다고 여기는 방식. 가장 쉬운 방식이며 비할 데 없이 탁월한 예의범절이었다.

그런데도, 일행이 울퉁불퉁한 길을 굽이치며 내려오느라 수도원이 여전히 보이는 동안 작은 도릿은 고개를 여러 번 돌려, 황금빛 햇살에 휘감긴 굴뚝에서 직선으로 높이 올라가는 수도원 연기를 배경으로 블랑두아가 툭 튀어나온 지점에 올라서서 계속 내려다보는 걸 확인했다. 블랑두아가 흰 눈에 박힌 까만 막대기처럼 보인 게 오랜 뒤에도, 작은 도릿은 사악하게 웃는 얼굴과 툭 튀어나온 매부리코와 코에 바싹 달라붙은 두 눈동자가 보이는 것 같았다. 수도원은 완전히 사라지고 맑은 아침 구름이 고갯길을 가린 다음에도, 길가에 골격만 섬뜩한 나뭇가지 하나하나가 블랑두아를 가리키는 것 같았다.

마침내 그날이 다가왔다. 제우스 신전에 있는 암늑대는 섬나라 야만인들이 작당하는 광경을 보고서 질투심이 치솟아 으르렁댈 것 같고, 군부 통치 시대의 사악한 황제 조각상들은 비열하고 섬뜩한 흔적을 지울 수 없어서 조각가가 사실대로 표현한 형상 그대로 좌대를 섬뜩하게 내려와서 신부를 데리고 도망칠 것 같고, 오래전 검투사들은 얼굴을 닦던 분수대에서 끊어진 숨을 되살리며 뛰어올라 예식을 축하할 것 같고, 베스타 신전은 폐허를 딛고 일어나서 후원할 것 같았다. 하나같이 그럴 것 같지만 실제로 그러지는 않았다. 지각 있는 존재는 물론 만물의 영장조차 많은 변화를 일으킬 것 같지만, 실제로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결혼식은 감탄할 정도로 화려했다. 복장이 까만 수도승, 하얀 수도승, 황갈색 수도승 모두 가던 길을 멈춘 채 마차 행렬을 구경하고, 양털을 걸친 농부는 건물 창문 밑에서 피리를 불며 구걸하고, 초대를 못 받은 영국인은 마냥 질시하고, 해는 넘어가고, 잔치는 사그라들고, 수많은 교회는 결혼식과 상관없는 종소리를 울려대고, 성 베드로는 “무슨 소린지 나는 모르겠다”며 부인했다.

가을날, 황금빛 들판은 수확을 마치고서 다시 쟁기질하고, 여름 과일은 농익다 못해 시들기 시작하고, 녹색 물결이 출렁이던 밀밭은 바삐 움직이는 손길에 바닥으로 눕고, 과수원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사과는 빨갛게 익고, 산딸기는 노란 잎사귀 사이마다 새빨갛게 반짝였다. 숲속에는 기묘한 나뭇가지 사이로 벌써 매섭게 다가오는 겨울이 살포시 어리고, 주변 경치는 나무에 잔뜩 매달린 자두처럼 나른하던 여름 날씨를 내던진 채 맑고 또렷하게 빛났다. 그러니, 해변에서 바라본 바다는 열기에 축 늘어진 모습을 완전히 떨쳐내고 눈 수천 개를 크게 떠서 반짝이니, 해변에 시원하게 펼쳐진 모래사장도 그렇고, 나무에서 떨어진 가을 단풍처럼 수평선에 걸친 채 둥둥 떠가는 조그만 돛단배도 그렇고, 바다 전역에 활력이 넘쳤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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