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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진한의 정치와 사회

마한·진한의 정치와 사회

[ 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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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5월 20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512쪽 | 165*230*35mm
ISBN13 9788933708033
ISBN10 8933708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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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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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 생산 감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 요소로 기술의 단절, 원료 부족, 철기 보급으로 인한 수요 감소, 관념상의 변화 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청동기 제작 기술을 가진 집단이 어떠한 이유에 의해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 버리거나 장기간 청동기 제작을 중단하면 기술 단절이 일어날 수 있다. 또는 철기 보급에 밀려 청동기의 실용성이 떨어져 수요가 줄고 생산 활동이 쇠퇴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대로 충청·전라 지역에서 청동 무기 출토량이 줄어드는 것을 주조철기 보급의 영향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무엇인가 청동기 생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제작 환경상의 변화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중략)

기술 단절과 수요 감소 이외에 청동기 생산 감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원료 수급이다. 어떤 사정으로 원료의 일부라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할 경우, 기존의 청동기를 녹여 재활용하거나 이것도 여의치 않으면 청동기 제작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부적으로 전통적인 청동기 수요가 강하게 남아 있다면 교역을 통해 문제 해결을 시도하거나 제한적이나마 철로 청동을 대체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졌을 법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충청·전라 지역의 기원전 2세기 말 이후의 청동기 출토 양상을 볼 때 다른 지역의청동기가 적극적으로 유입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충청·전라 지역에서의 청동기 유물의 감소 현상은 수요 감소나 기술상의 문제라기보다 다른 데서 원인을 찾아야 할 것 같다. 그 하나는 청동기 공급 핵심 집단의 이주이고 다른 하나는 원료 부족으로 인한 생산 활동의 위축이다. ---「I부 한반도 초기철기시대의 사회와 문화」중에서

삼한 중에서 소국연맹체가 가장 먼저 등장한 곳은 마한 지역이었다. 마한 지역에는 소국의 숫자도 많고 분포 영역도 넓어 시기나 지역에 따라 소국연맹체의 대두 시기나 크기 등이 달랐다. 일반적으로 소국연맹체 등장과 변화의 중요 분기점으로 한군현漢郡縣 설치, 대방군帶方郡 설치, 위魏나라의 동방 경략, 백제국의 성장 등을 꼽을 수 있다. 지역적으로는 크게 한강유역권(경기 북부 지역 포함), 금강유역권(아산만 지역 포함), 영산강유역권으로 나눌 수 있다. 이는 문헌기록에 나타나는 3세기 대 각 지역별 유력 소국의 존재를 토대로 한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백제국, 『삼국지』 동이전 한조의 목지국目支國, 『진서晉書』 장화張華열전의 신미국新彌國이 이에 해당한다. 마한 지역 안에서도 소국연맹체 형성이 가장 이른 지역은 금강유역권이며, 이 지역은 3세기 전반까지 마한의 실질적인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문헌상으로 마한 지역에서 소국연맹체로 추정되는 정치체의 존재가 확인되는 것은 기원전 1세기경이다. “옛 망명인이 진역을 피하여 한국에 왔을 때 마한이 동쪽 경계지의 땅을 나누어 주었다”는 『삼국지』 동이전 진한조의 기록이 그것이다. 당시 유이민 집단들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정치체의 실체는 한두 개의 소국이 아니라 소국연맹체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소국연맹체가 처음부터 마한이라고 불린 것은 아니겠지만 마한 지역에 형성되어 있었던 소국연맹체의 존재를 알려 주는 것은 사실이다. 아마 서북 지방에서 내려온 유이민들이 중서부 지방에 자리 잡지 못하고 인구밀도나 정치체 분포 밀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소백산맥 이동 지역으로 내려와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한 것도 이들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공동으로 대응하고 서북 지방에서 유이민들이 내려올 때 통제를 가하고 그들에게 지속적인 관계를 요구하는 등 기득권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당시 소국연맹체의 범위나 성격은 불확실하다.
---「Ⅱ부 마한에서 백제로의 발전」중에서

이와 같이 경기 북부 지역을 한강권 이남과는 별개의 세력권으로 파악하고 초기 백제국의 중심지를 이곳에 비정할 경우 백제국과 목지국은 처음부터 활동 무대와 정치·문화적 입지가 서로 다른 세력으로 이해된다. 목지국소국연맹체는 중국 군현과 직접 경계를 접하고 있지 않으므로 군현과 충돌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삼국지』 동이전에 진왕과 목지국에 대해 부정적인 설명이 나타나지 않는 것도 중국 군현과 목지국 사이에 우호적인 교섭 관계가 유지되었던 증거이다. 이와 달리 경기 북부 지역은 중국 군현과 인접해 있기 때문에 선진문화를 빨리 받아들일 수 있는 유리한 점도 있으나 군현의 통제를 쉽게 받을 수 있다는 불리한 점도 있었다. 그리하여 군현의 세력이 강하게 작용할 때는 통합 세력의 형성이 용이하지 않을 것이나 반대로 군현 세력이 약화되면 빠른 시일에 군현에 도전하는 강한 힘을 결집시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백제국은 한강 남쪽, 즉 목지국소국연맹체의 세력권에 가까운 곳으로 중심지를 옮겼고 점차 목지국소국연맹체 세력권 내의 소국들을 잠식해 나갔다. 그러므로 양 세력의 대립이 본격화한 것은 백제국의 활동 기반이 경기 북부 지역에 있을 때가 아니라 한강 남쪽으로 이주한 다음부터이다.
---「Ⅱ부 마한에서 백제로의 발전」중에서

온조왕 대 기록의 마한-백제 관계 인식은 백제 왕실의 부여계 고구려 출자설과 연계되어 있다. 다 알다시피 백제 왕실이 자신들의 출자를 부여계, 혹은 고구려계로 천명한 것이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것이냐 아니면 후대의 정치·외교적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냐를 두고 많은 논란이 있다. 서울 지역에서 확인된 고구려식 적석총의 등장 연대가 문헌기록의 진위를 검증하는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고 있는데 고고학자료상으로는 4세기설이 설득력이 높아 후자 쪽 주장에 무게가 실리는 추세이다. 이렇게 본다면 백제와 마한을 대립, 경쟁하면서 병존하는 관계로 인식한 것도 백제국 건국 초기부터의 일로 보기 어렵고 빨라야 3세기 중엽에서 4세기 중엽 사이 어느 시기일 가능성이 높다. 두 가지 상황을 가정할 수 있는데 하나는 3세기 후반 마한 지역에 복수의 소국연맹체가 병존하는 상태에서 맹주국 간에 야기된 적대감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다. 다른 하나는 근초고왕近肖古王 대에 활발하게 전개된 정복 과정에서 일어난 대립 상황이다.
---「Ⅱ부 마한에서 백제로의 발전」중에서

3세기 후반 고이왕 대를 ‘연맹왕국’ 단계로 설정하는 문헌적 근거는 고이왕=시조 구태仇台설, 대방군 기리영 공격 사건, 고이왕 대의 통치 체제 정비 기사이다. 이러한 문헌기록은 신뢰성에 많은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실제 이상으로 과대 해석하고 있다. 3세기 후반 서진 견사 기록이 입증하듯이 마한 소국들은 290년대까지도 대외 교섭에서 소국으로서의 독자성을 상실하지 않았고, 백제국 역시 가장 유력한 맹주국일 뿐 다른 소국들을 복속시켜 대외 교섭권을 독점할 정도로 지배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중략)
고고학자들이 주목하는 국가 성립의 고고학적 지표는 성곽의 출현, 대형 분묘군의 출현, 특정 토기 양식의 성립이다. 이를 백제사에 적용하여 백제는 3세기 중후반 일정 영역을 확보한 국가 단계에 도달하였다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백제 국가 성립의 고고학적 지표 그 자체뿐만 아니라 지표로 삼은 성곽, 대형 무덤의 출현 시기 등에 대한 편년이 3세기 후반~4세기 중후반 등으로 편차가 크고 유동적이어서 고고학계의 3세기 후반 백제 국가 성립설 역시 설득력이 떨어진다. 고이왕 대 ‘연맹왕국설’이 성립하려면 3세기 후반 백제국이 마한 소국을 정복하여 간접 통치를 실시하던 상황을 설정하고 이를 물질 자료를 통해 검증해야 한다. 그러나 아직도 고이왕 대 백제국의 통치 영역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 다만 3세기 후반~4세기 중반에 걸쳐 중서부 지방에서는 묘제, 철제 무기, 토기, 마구 등 물질 자료상의 점진적 변화가 나타나는데 이를 백제의 영역 확대와 간접 통치를 실현해 나가는 과도기적 현상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어 주목된다.
---「Ⅱ부 마한에서 백제로의 발전」중에서

근초고왕 대의 백제 영역에 대해서는 2000년대 이후에는 문헌기록보다 고고학자료를 통한 연구들이 더 많다. 고고학자들은 한성 백제 양식 토기의 확산 과정과 묘제의 변천, 그리고 각종 위세품을 중요 자료로 삼아 백제의 영역 확장 과정을 설명하였다. 그 결과 근초고왕 대 백제의 남계에 대해종래 『일본서기』 신공기의 기록을 토대로 근초고왕 대에 이미 전남 지역까지 영역화하였다는 문헌사가들의 견해와는 상당히 다른 견해들이 제시되기에 이르렀다. 물론 세부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연구자 간에 해석이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4세기 중후반~5세기 전반경에는 익산 등 노령산맥 이북 전북 북부 지역까지 백제 영역에 포함되었던 것으로 본다. 그리고 영산강 유역의 백제 영역화 시기에 대해서도 6세기 중엽 이후라는 견해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이 가운데서 근초고왕 대의 직접 통치 영역과 관련하여 경기 남부 화성이나 오산 지역의 경우, 이미 직접 통치 지역으로 편입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일부 있었다. 그리고 2014년 사창리에서 100m 정도 떨어진 화성 향남읍 요리에서 대형 분구묘와 함께 4세기 말 5세기 초로 편년되는 금동관모(그림 Ⅱ-5-2)와 금동신발 등 최상급 위세품을 부장한 목곽묘가 조사되었다. 금동관모의 외형은 공주 수촌리 Ⅱ-1호분 토광묘(그림 Ⅱ-5-3 참조)와 고흥 길두리 안동고분(그림 Ⅱ-5-4 참조) 출토품과 유사하며 환두대도, 각종 마구류 등 부장품의 구성도 사창리유적 출토품과 매우 유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간접 통치의 상징물로 간주되던 최상급의 금동제 위세품이 천안 용원리보다 더 북쪽인 경기도 화성 요리에서 출토된 것이다. 요리 금동관모 출토로 인해 4세기 후반까지도 천안, 아산 지역과 마찬가지로 화성, 오산 등 경기 남부 지역도 여전히 간접 지배 아래 있었다는 견해가 훨씬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Ⅱ부 마한에서 백제로의 발전」중에서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신촌리 9호분 출토 위세품들은 백제로부터 사여받았을 것이라는 견해가 다수다. 이와 관련하여 특히 주목받는 것은 신촌리 9호분에서 나온 단봉單鳳환두대도이다(그림 Ⅱ-6-3).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용봉문환두대도는 중국 등지에서 제작된 것으로 견사, 책봉 등 외교 활동을 뒷받침하는 유물로 해석되기도 하고 중국의 영향을 받아 백제에서 제작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어느 경우이거나 신촌리 9호분 출토 환두대도가 반남 세력이 중국과 직접 외교 교섭을 통해 획득한 것이 아니라면 중국과 통교하던 다른 세력을 통해 사여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백제, 왜, 가야 모두 5세기에 중국과의 교섭이 기록으로 확인된다. 이 가운데 백제가 중국과의 교섭 빈도가 가장 높다는 점에서 백제를 신촌리 9호분 환두대도의 사여 주체로 지목하는 견해가 가장 설득력이 높다.

금동관 제작 주체에 대해서는 한성 시기의 백제 지배계급의 유물이 거의 알려지지 않아 이를 백제와 관련시킬 직접적인 자료는 아직 없다. 백제의 경우 묘제상의 이유로 위세품의 잔존 가능성이 낮은 데다 한성 함락 시 고분이 훼손되고 많은 왕족과 귀족들이 고구려에 포로로 잡혀가거나 죽임을 당하였기 때문에 앞으로도 서울 지역에서 경주처럼 직접 대비가 가능한 자료의 획득 빈도는 높지 않을 것이다. 다만 신촌리 9호분 금동관을 고령 지산동 32호고분 출토 대가야의 금동관과 비교해 보면 그 정교함과 세련미가 단연 돋보인다(그림 Ⅱ-6-4, 그림 Ⅱ-6-5). 이는 이 제품이 선진 기술 집단의 제품을 모방한 아류가 아님을 뜻한다. 당시 이 같은 수준급의 제품을 제작할 수 있는 집단은 아주 제한되어 있음을 감안할 때 가장 유력한 후보로 백제를 꼽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신촌리 9호분 금동관의 입식立飾은 석실분에서 나오는 백제 은제관식과 궤를 같이하며 은제관식에 영향을 주었다는 견해가 있어 신촌리 9호분 금동관 제작 주체를 백제로 추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Ⅱ부 마한에서 백제로의 발전」중에서

지금까지 경주 일원에서 조사된 목관묘·목곽묘 유적은 탑동유적을 제외하고 경주 시내 중심지에서 벗어난 외곽 지역에 분포한다(그림 Ⅲ-1-3 참조). 북쪽의 황성동유적과 서쪽의 사라리유적, 서남쪽의 덕천리유적, 동남쪽의 조양동유적, 구정동유적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월성 기준 직선거리로 가장 가까운 것이 3km가량 떨어진 황성동유적이고 그 나머지는 6~8km(조양동유적, 구정동유적), 9km(덕천리유적), 15km(사라리유적) 등 상당한 거리를 두고 분포한다. 그런데 연구자에 따라 이러한 유적을 남긴 집단을 칭하는 용어나 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차가 적지 않다. 사라리유적을 예로 들어 보면, 첫 번째 견해는 이 유적들을 6촌과 연계시켜 사라리유적을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에, 조양동·구정동·죽동리유적들을 자산?山 진지촌珍支村에, 황성동유적을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에 비정한다. 두 번째 견해는 이들을 사로국과 관련된 정치체로 파악하되, 예를 들면 사라리 130호분 피장자를 사로국을 구성하는 하나의 ‘지역집단’을 대표하는 수장이라고만 칭하고 ‘촌’이나 ‘부’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세 번째 견해는 6촌을 허구로 보는 입장에서 사라리 130호분의 피장자를 1세기 무렵 모량부를 대표하는 최고지배자로 간주한다. 두 번째와 세 번째 견해는 사라리유적을 남긴 집단을 ○○촌이라 하지 않고 ‘지역정치체’라는 용어로 부르거나 6부의 하나인 모량부로 칭한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사라리유적을 사로국을 구성한 정치체로 보지 않고 영천과 연결지어 사라리와 영천을 묶는 별개의 정치체를 상정하고 사라리집단과 같은 정치체를 지구地區 ‘국國’으로 부르기도 한다. ---「Ⅲ부 진한에서 신라로의 발전」중에서

진한 소국들이 언제부터 어떠한 연유로 소국연맹체를 형성하였는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아마도 중국 군현과의 교섭이 본격화된 이후일 것이다. 기원전 108년 한사군 설치와 유이민 파동을 계기로 경상도 지역에서는 철기라는 새로운 금속기가 급속히 확산되고, 철제 생산도구의 보급으로 농업생산력이 증대되면서 물자 교역이 아주 활발해졌다. 이전 시기에 비해 교역 대상과 교역품도 훨씬 다양해지고 교역 반경도 크게 확대되었다. 목관묘와 같은 묘제를 비롯하여 와질토기, 철기와 같은 물질 자료들이 서로 비슷비슷한 양상을 보이며 경상도 각지에 널리 확산된 것은 소국들을 서로 엮어 주는 연결망이 작동한 결과이다.

여기에다 낙랑 지역을 통해 들어오는 중국제 청동거울이나 수정제·유리제 장신구들은 토착 집단의 교역 욕구를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변화에 대응하여 진·변한 지역의 소국들도 효율적인 원거리 교역을 위해 공동 조직을 만들었으며 이것이 소국연맹체 형성의 토대가 되었다. (중략)
이처럼 소국연맹체의 구성원들은 원거리 교역에 필요한 교통로와 각종 정보를 공유하였고, 기술과 물자를 서로 교류하였다. 특히 철과 같은 중요한 소재의 교역은 시장 논리만으로는 성사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철은 무기를 만들고, 생산도구를 만드는 전략 물자이므로 정치·군사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약속한 집단들이 아니라면 교역에 제약을 받을 수 있다. 이처럼 경제적 대외 교섭 활동을 주목적으로 형성된 소국연체 조직이 시간이 지나면서 필요에 따라 군사적인 협력 관계로 발전하였다. 경남 해안 지역에 있던 포상浦上 8국이 연합하여 김해 구야국과 사로국을 공격한 사건이라든가, 245~246년경 마한 지역의 소국들이 중국 군현의 조치에 반발하여 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하여 대방군 태수 궁준을 전사시킨 사건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군사 활동의 성패는 맹주국의 권위를 높이기도 하고 몰락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Ⅲ부 진한에서 신라로의 발전」중에서

기원전 3~기원전 2세기 단계의 부조, 즉 ‘옥저’의 실체는 세형동검문화권 안에 형성되어 있던 정치체의 하나였고, 이러한 앞 단계의 문화를 계승하면서 기원전 1세기~기원후 1세기 단계는 한의 군현으로서 낙랑문화의 직접적인 영향권 안에 있었다. 기원전 1세기 후반 부조현 읍군邑君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부조예군묘夫租?君墓(정백동 1호분)의 부장품을 보면 전통 무기인 세형동검, 동모도 있지만 철극鐵戟, 철모鐵?, 쇠뇌 등 낙랑 시기의 전형적인 철제 무기가 주류를 이룬다. 묘제는 말할 것도 없고 토기도 서북한 지방 목관묘·목곽묘의 전형적인 부장품인 화분형토기와 호형토기 세트가 부장되어 있다. 부조현의 주민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한 토기가 어떠한 종류였는지, 주거지가 어떠한 형태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배계급의 문화 내지는 선진문화 요소를 해당 집단의 문화 성격을 나타내는 지표로 삼는 것이 일반적이다. 적어도 ‘옥저’ 지배계급의 문화가 세형동검문화에 이어 낙랑문화로 계승되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것은 ‘옥저’ 문화의 정체성을 규정할 때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부록 2 옥저의 기원과 문화 성격」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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