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화학을 인문학적으로 이해하는 방법
-미술, 음악, 문학, 건축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종횡무진 화학 잡담
서양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화가 렘브란트의 여러 작품 중 〈야경〉은 특별한 일화를 지닌 것으로 유명하다. 바로 이 작품에 X선 형광 분석을 시도한 결과, 어둡게만 보이던 공간에 빼곡히 그려져 있던 밑그림이 나타났던 것이다. 렘브란트는 스케치를 할 때 골탄(bone black)을 사용하곤 했는데, 동물의 뼈를 산소가 없는 상태에서 고온으로 가열해 탄화시켜 만드는 골탄에는 인산 칼슘(CaPO4)이 함유되어 있었다. 그래서 렘브란트의 〈야경〉을 대상으로 칼슘(calcium, Ca)과 인(phosphorus, P)에 대해 X선 형광 분석을 행했을 때, 비로소 숨어 있던 밑그림이 드러날 수 있었던 것이다. 강한 에너지의 X선으로 특정한 전자를 떼어내면 빈 공간이 생기고, 다른 전자가 이 공간을 차지하며 형광의 형태로 빛이 발생하는 원리에 대한 기술을 이 책은 렘브란트의 작품에서 시작한다.
화학을 음악과 함께 생각해본 경험을 누구나 갖고 있지는 않겠지만 화학자는 음악사 속에서도 화학의 자취를 찾아낸다. 저자는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죽음에서는 공통적으로 중금속 중독이라는 원인이 발견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당시 흔히 약으로 쓰였던 독성 물질에 대해 알려준다. 모차르트가 안티모니에 중독되어 사망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게 된 이유, 싱크로트론 입자가속기의 분석을 통해 밝혀진 베토벤의 납 중독 등을 이야기하며, 역사가 품었던 비밀이 풀리는 과정에서 화학이 의미 있는 역할을 한 예를 흥미롭게 제시하는 것이다.
화학이 문학이나 건축과 만나지 말라는 법도 없다. 금을 만들어내기 위한 노력, 그리고 연금술을 법적으로 금지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룬 장에서 저자는 연금술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수많은 문학 작품과 게임 속에 드러나 있는 예를 함께 소개한다. 그런가 하면 아름다운 색깔과 문양의 스테인드글라스와 건축에 대해 살펴보다가 광학적 현상이나 고체의 결정성, 냉각, 유리 제조 기술 등에 대한 설명으로 자연스레 넘어가기도 한다.
장미창에 장식된 스테인드글라스를 건물 외부에서 바라보면 사뭇 다릅니다. 전체적으로 짙은 회색이나 어두운 무채색으로만 보일 뿐 내부에서 보이는 색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태양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백색광의 흡수와 반사, 투과에 의해 나타나는 광학적 현상이 차이를 보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특징은 이색성(dichroism)이라는 방식으로 빨간색과 노란색 유리에서 더 확실히 관찰됩니다.
─ 179p. ‘투명한 유리가 색을 입으려면’ 중에서
이처럼 다양한 분야의 경계를 넘나드는 화학자의 지극히 인문학적이면서도 과학적인 글쓰기 방식은 이제껏 화학을 어렵게만 여겨왔던 이들에게도 신선하게 어필한다. 역사에 대해 알아가다가 화학에 대한 흥미가 생기는 새로운 경험이 이 책을 통해 가능해진다.
세상의 변화에서 화학을 발견하고, 화학사를 통해 세상을 읽다
-전쟁, 무기, 처형, 암살, 그리고 연금술에 관한 새로운 관점
물론 책에서 저자가 펼쳐놓는 ‘화학 잡담’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역사의 뒷이야기와 화학의 발전에 대해 여기저기 단편적으로 훑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변화에서 화학을 발견하고 또 화학사를 통해 세상을 읽어보기를 권하고 있는 말들이기 때문이다. 《역사가 묻고 화학이 답하다》에는 예술사나 문화사뿐만 아니라 전쟁의 역사와 관련된 글도 풍부하게 실려 있다. 특히 전술이나 무기의 변화를 화학의 발전상과 함께 살펴보는 저자의 관점은 과학과 사회, 그리고 과학과 윤리의 관계에 대해 보다 깊이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한다.
화약은 산업 분야에서 높은 잠재성을 갖습니다. 하지만 노벨의 다이너마이트가 그러했듯 전쟁과 폭력, 테러에 사용되는 등의 부정적인 측면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중략) 수많은 발명품이 문명과 역사를 바꿔왔지만, 그중에서도 화약은 역사상 큰 전환점을 만들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전쟁에서 마을을 파괴하고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화약은 막힌 길을 열고 불꽃으로 하늘을 수놓으며 새로운 창조를 위한 파괴에 사용됩니다. 화약은 인간이 다룰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에너지의 한 형태로서 추진체, 연료, 폭발물, 도구가 되어 심해로, 지구 속으로, 우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 161p. ‘매우 현대적인 화약 제조법’ 중에서
저자는 ‘폭탄마 장홍제’라는 채널을 개설해 사제 폭발물을 만드는 방법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위법을 행하는 대신 폭발물, 최루탄, 화약에 대한 글을 남겨봤다고 머리말에서 슬쩍 고백하기도 한다. 덕분에 독자들은 어찌 보면 ‘쓸데없이 고 퀄리티’인 흑색 화약 제조법을 책으로 안전하게 접할 수 있고, 나아가 오늘날의 화약 사용에 대해서까지 고찰해볼 기회를 가지게 된 셈이다.
처형이나 암살에 이용되었던 독을 다룬 글 역시 다른 시대, 다른 사회에 관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사극을 보다 보면 심심찮게 등장하는 사약이 과연 어떤 성분으로 만들어진 약이었을지 한 번쯤 궁금해해본 독자라면 부자와 비상의 독성을 상세히 알려주는 저자의 분석적이고도 유머러스한 글에서 특별한 만족을 경험할 것이다. 한편 비상의 핵심 구성요소인 원소를 칭하는 비소는 현대 사회에서 반도체 제조에 사용되기도 하는데, 유럽에서 17세기에는 남편을 죽이고 싶어 했던 여성들에 의해 이용되었는가 하면 19세기에는 보험금 상속을 노린 이들에 의해 쓰이기도 했다. 이와 같이 역사 속에서 독성 물질의 쓰인 사례를 들여다보는 저자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독성 물질이 다른 시대, 다른 사회에서는 어떤 식으로 이용되었는지도 들여다보게 된다.
저자는 증식 금지법((The Act Against Multipliers)과 연금술의 쇠락에 대해 서술하는 데에도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다. 1404년 영국 의회에서 통과된 증식 금지법은 연금술사들이 금이나 은을 만드는 행위를 금지하는 법령이었다. 그 당시 흑사병, 수차례의 전쟁 등으로 인해 금의 가치는 더욱 높아졌고 금이나 은의 증식을 법을 동원해서라도 막으려 했던 분위기는 더욱 강해졌다. 탄압과 제약을 거치며 연금술사 혹은 초기 화학자들은 금이 아닌 의약품의 화학과 물질의 반응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러한 그들의 관심이 화학 시대의 개막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연금술의 쇠락 및 화학의 발전을 매끄럽게 이어 설명하는 저자의 글은 인간이 물질과 원리를 이성적으로 들여다보게 된 또 하나의 과정을 압축적으로 전달해준다.
조금 어렵지만 사실은 흥미로운
전방위 화학 이야기
-화학을 더 깊이 알고 싶은 독자들도 충족시키는 구성
《역사가 묻고 화학이 답하다》는 뼛속까지 문과 체질임을 자처하는 이들의 흥미도 자극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학이 어렵다는 독자만을 위한 책은 아니다. 역사, 문학, 음악, 게임 등에 잡학다식한 저자는 결국 화학자라는 ‘본캐’의 특성 또한 책에서 충실하게 드러낸다. 그래서 렘브란트, 르누아르, 고갱에 대해 이야기하다가도 어느새 물감 안료의 성분에 대해 잡담을 펼치고 베토벤의 사인을 다룬 장에서는 수소원자의 선 스펙트럼이 갖는 음높이에 대한 과학적 설명도 자세하게 풀어놓는다.
물감의 경우에도 원리는 같습니다. 물감마다 흡수하는 특유의 빛 파장(wavelength)이 있을 것이고, 흡수되지 못해 반사된 보색의 빛은 우리에게 색채로 인식됩니다. 가시광선의 반사와 직진을 통한 기본적인 물리적 규칙이 형태와 색을 보이게 만든다면, 물감마다 다른 색상은 구성하는 화학물질의 특징에 따라 결정됩니다. 공액계(conjugated system)와 결정장 이론(crystal field theory)이라는 화학 이론으로 물감 색의 모든 것이 설명됩니다. 공액계는 동식물에게서 추출되는 천연 안료나 석유를 원료로 만들어지는 합성 안료의 색상 원리와 관계가 있습니다. 이들 모두는 탄소 원자들의 연결로 만들어지는 유기 화합물이라는 공통점을 갖습니다.
─ 128p. ‘물감 색을 결정하는 것들’ 중에서
역사보다 화학이 더 궁금한 독자들은 특히 각 장의 마무리 부분에 구성한 ‘종횡무진 화학 잡담’이라는 별면을 통해 더 깊이 있는 화학 지식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연금술에 대한 챕터에서 저자는 주기율표에서 금과 같은 족에 있는 금속을 금으로 바꾸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길 권하며 11족에 속한 금, 은, 구리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고 이후 ‘종횡무진 화학 잡담’ 코너에서 이 원소들을 다시 소환해 11족 원소 금속들의 색상, 전도성 등에 대해 더욱 상세하게 정리한다. 또한 한니발의 알프스산맥 행군에서 식초가 쓰였을 가능성을 다루는 본문에서는 아세트산의 구성 요소와 옥텟 규칙에 대해 다루고 넘어간 후 다시 ‘종횡무진 화학 잡담’을 통해 최외각 전자와 양이온, 음이온의 탄생을 심층적으로 살펴본다.
이 책은 과학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인간은 과학을 어떻게 이용해왔고 어떻게 이용해 나가야 할지에 대한 이야기를 부지런히 건넨다. 그래서 과학적인 관점과 논리적인 사고력을 갖추고 싶어 하는 청소년 독자들, 화학으로 둘러싸인 세상을 조금은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해보고 싶다는 성인 독자들 모두에게 유용한 길잡이 역할을 해줄 만하다. 물론 그다지 뚜렷한 목적이 없이 이 책을 펼쳐도 좋다. 매운맛을 즐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캡사이신이 입안에 들어가면 왜 타는 듯한 느낌을 받는지 알고 싶다는 이들, 루이스 캐럴의 앨리스 시리즈 속 세계에서 앨리스의 체내에서는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그냥 궁금하다는 이들이야말로, 어쩌면 《역사가 묻고 화학이 답하다》에 가득한 화학적이고 인문학적인 잡담을 더 흥미롭게 받아들일 독자들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