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여남(女男), 테이블을 마주하다
제1절 근대 “처녀’의 섹슈얼리티
-한일 초기 여성소설을 중심으로-
한일 근대초기(1910∼1920년 초반)에 발표된 여성소설의 주인공은 대부분 근대교육을 받은 여학생이다. “두문불출’을 유교의 행동강령쯤으로 여기며 지켜왔던 구시대를 지나 이미 그녀들은 교육하는 장소, 즉 학교나 기숙사라는 자유공간으로 진출해 있다. 이러한 변화는 당시대를 풍미했던 자유연애를 실행하기에 더 없이 좋은 환경이었을 것이다.
소설 속의 히로인들은 사춘기소녀로서의 섹슈얼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자유연애에 한껏 심취해 있다. 그녀들은 이상적 남성들을 스스로 선택하여 러브레터를 주고받거나 하숙방을 찾으며 마음껏 청춘을 구가한다. 이러한 자유롭고 섹슈얼리티한 분위기를 뒷받침하듯 소설에서 그려지는 계절 또한 만물이 생동하는 희망의 봄과 정열의 여름이다. 또한 주인공 사춘기소녀들의 섹슈얼리티는 “처녀’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형상화 되어 앙양?통제되기에 이른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처녀’들의 섹슈얼리티에 초점을 맞추어, 소설에서 묘사되는 언설의 메타포를 풀어가는 과정을 통해 한일 초기 여성소설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처녀’들을 표상화한 한일 초기 여성소설 중에서 히구치 이치요(?口一葉)의 『보랏빛(裏紫)』(1896, 『新文壇』 제2권 제2호), 노가미 야에코(野上?生子) 『직녀님(七夕さま)』(1907, 『ホトトギス』), 다무라 도시코(田村俊子) 『유체이탈(離魂)』(1912, 『中央公論』), 김명순의 「處女의 가는 길」(1920. 3, 『新女子』 창간호), 나혜석의 「四年前 日記 中에서」(1920. 4, 『新女子』), 백합화(필명) 「愛의 追懷」(1920. 4, 『新女子』2호) 등의 6 작품을 대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를 살펴보면, 한일 초기 여성소설에 대한 연구는 1990년대 이후 여성주의 비평(젠더이론)에 의해 활기를 띠었다. 이에 따른 성과 역시 괄목할만하나 본고에서는 신중간층 출신 처녀들의 섹슈얼리티와 이에 따른 〈性的 자기결정〉에 초점을 맞추어 논하고자 한다.
1. 소녀에서 처녀로
- 『유체이탈(離魂)』과 「四年前 日記 中에서」
오츠카 에이지(大塚英志)는 “근대사회가 초경을 맞아 사용가능하게 된 여성의 신체를, 미래의 남자에게 실제로 사용될 때까지 상처입지 않은 채로 보존하기 위해, 그녀들에 관련해 이런저런 언설들을 만들어내다 ‘실수로’ 생겨난 이물(異物)이 ‘소녀’라는 존재”라고 정의하였다. 이런 근대의 처녀라는 개념에는 ‘순결’ ‘청순’ ‘정조’ ‘정숙’ 등의 정신적 가치와 도덕적 가치가 암묵적으로 전제되어있다. 즉 처녀라는 단어가 단순히 미혼여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처녀성’이라는 정신성이 함유된 ‘인격’ 그 자체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
1.1 엄지공주의 불안
다무라 도시코의 『유체이탈(離魂)』(1912)에서는 초경을 맞아 보이게 되는 사춘기소녀의 복잡한 심경변화와 관능적 시선, 미래에 대한 불안을 세밀한 터치로 풀어내고 있다. 주인공 오차(お久)는 어느 날 몸이 나른하고 기운이 없다는 이유로 무용학원을 쉰다. 오차는 전날 “왠지 몸이 무거워” 학원을 결석하고, 다음날도 잠에서 깨자 “눈이 빨갛게 부어” 있다. 늦잠을 자버린 오차가 현기증에 비틀거리며 부엌으로 나오자, “얼굴에 핏기가 없다”며 가사도우미 오우매(おうめ)가 걱정한다. 사춘기소녀의 몸에서 신체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어머니는 이러한 사춘기 딸의 증상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의사를 불러 진찰받도록 한다.
어머니와 젊은 의사가 오차의 병상 옆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의사의 차가운 손이 왼쪽 손목을 가볍게 쥐고 진맥 중 이었다. (중략) 의사는 “아가씨 정도의 나이라면 흔히 있을 수 있는, 생리 전에 느끼는 현기증 같은 증상입니다.”라고 말하며 오차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씩 웃었다. (중략) 의사는 어머니에게 오차가 언제부터 몸에 변화가 나타났는지를 물었다. (『유체이탈』, p.234)
젊은 남자의사는 오차의 병명을 “아가씨 정도의 나이”의 사춘기소녀들이 “생리 전에 느끼는 현기증”이라고 진단한다. 그리고는 마치 이제야 여자로써 사용가치가 있는, 즉 낳는성을 수행할 수 있는 쓸모 있는 몸으로 성장하게 되었음을 축하라도 하듯 누워있는 오차를 내려다보며 “씩”하고 미소 짓는다. 이어서 젊은 의사(=근대과학의 수행자)는 어머니에게 딸의 “신체적 변화”에 대해 물으며, 딸을 관리하는 어머니로서의 책무를 점검한다. 그 순간 어머니는 “얼굴을 붉히며” 딸에게 되묻는 등 무력한 모습을 보인다. 오차의 어머니 역시 소녀시절 초경을 경험했으므로 딸의 증상에 둔감하지만은 않을 것이나 비과학적인 어머니의 경험 따윈 철저히 무시된다. 곧 초경이 시작될 것이라는 의사의 진단에 따라 어머니는 “천을 잘라” 딸의 생리대를 준비한다.
이렇듯 초경이 시작된 〈소녀〉의 몸은 근대과학(의학)의 논리에 의해 철저히 분석?관리되다가, 정신적 수양과 도덕적 덕목이 덧씌워져 〈처녀〉의 몸으로 재탄생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차는 이러한 신체적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우선 작품의 전체적 흐름을 두 갈레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초경을 맞이하게 되는 사춘기소녀의 희망에 찬 ‘性에 대한 동경’과 이에 따라 나타나는 ‘관능적인 모습’이며, 다른 하나는 어른의 세계, 즉 ‘남성 중심적인 섹슈얼리티의 구조’에 대한 두려움이다.
하세가와 게이(長谷川啓)는, 『유체이탈』이 어스름한 저녁 시간대에 소년, 청년, 장년 등 세 명의 남자가 등장하여 여자 주인공과 관계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이성과의 접촉이나 혹은 섹슈얼리티 자체를 작자는 불행한 일이 일어날 징조로 보고 있다는 논을 펼쳤다.
그러나 『유체이탈』에서는 서두에서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 “빛, 햇살” 등의 생명력 넘치는 단어가 수시로 사용되고 있어, 작자가 섹슈얼리티를 단지 불행한, 부정적 시각으로 보고 있다는 견해는 다소 성급한 결론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오차가 의사에게 초경을 치르게 될 것이라는 진단을 받은 다음의 문장에서는 “햇살”이 네 번이나 반복되어 나타난다. 따라서 소녀가 맞이한 ‘초경’은 무한한 생명력을 지닌 희망적인 그 무엇이다. 또한 “빛”은 소녀의 꿈속에까지 파고들어 소녀의 ‘관능’을 흔들어 깨운다. 그리고 이러한 여성의 性은 이내 세 명의 남자와 결부되어 전개된다. 첫 번째 남자는 소설의 절반을 차지하여 묘사되는 모키치이며, 두 번째는 젊은 의사, 세 번째로 등장하는 인물은 꿈속에서 만난 장년의 남자이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모키치에 대해 살펴보자.
소설의 서두는 오차가 어느 날 갑자기 몸이 아파 무용학원을 결석하자 이를 걱정한 학원장이 학원 남학생 모키치(茂吉)를 병문안 보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모키치의 아버지는 유랑극단의 삼류배우이며 그 역시 유랑극단의 배우지망생으로서 극에 필요한 무용을 배우고 있다. 모키치는 학원에서 가난한 삼류배우의 아들에다 몸에서 쉰내가 난다며 모두에게 따돌림 당한다. 그러나 사춘기소녀 오차만은 그의 용모와 체취에 이상하리만치 흥미를 느낀다. 오차가 느낀 모키치는 “희고” “아름다운” 미소년으로, 그녀가 “못창(茂ちゃん)”이라는 호칭을 쓰는 걸로 봐서, 초경을 시작한 그녀와는 두세 살 정도의 차이가 나는 ‘연하의 남성’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러한 모키치에게 오차는 이미 “마음의 균형을 잃게 하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은 그녀 혼자만의 것으로 모키치는 어린 탓인지 그다지 이성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아 오차를 안절부절못하게 만든다. 이날 모키치가 귀가 한 후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일찍 잠자리에 든 오차는 꿈속에서 장년의 남성을 만나게 된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