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이 안창호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활동을 통해서였다. 안창호는 만민공동회의 토론에 참가하고, 독립협회 평양지회 설립을 주도하면서 그 이름을 간간이 드러내더니, 평양 쾌재정(快哉亭)에서 있었던 강연으로 관서뿐만 아니라 해서 사람들까지도 쉽게 잊을 수 없는 이름이 되었다. 그날 스물한 살의 청년 안창호는 쾌재정의 이름을 빌려 유쾌하게 여길 일〔快哉〕 열여덟 가지와 유쾌하지 아니한 일〔不快〕 열여덟 가지를 대며 조정과 탐관오리의 부정부패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나라와 백성을 위한 개혁을 조리 있게 주창함으로써 듣는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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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동에서의 인연 때문인지 한때 안중근은 김창수 시절의 김구를 한 동도(同道)로서 무겁게 의식하였다. 특히 김구가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일본인 스치다를 죽여 세상을 놀라게 한 뒤로는 묘한 열패감까지 느끼며 그 후문에 귀 기울여 왔다. 거기다가 그때 김구는 기독교계의 신진이요, 교육 구국의 지사로서 그 보폭(步幅)을 서울로까지 넓힌 뒤였다. 을사보호조약 파기를 청원하는 상소와 공개 연설 같은 구국 활동으로 전국에 알려진 지사가 되었으며, 특히 그해 안창호를 중심으로 은밀하게 조직되고 있던 신민회에도 가입하여 안중근과는 손만 뻗치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 p.49~50
안중근이 김동억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는 온 나라가 해아(海牙, 헤이그)밀사사건으로 들끓고 있을 때였다. 그해 7월 초순 《대한매일신보》가 먼저 외국 신문을 인용하여 광무 황제가 화란(和蘭, 네덜란드)의 수도 해아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세 사람을 보냈다는 기사를 내보냈고, 뒤이어 이등박문(伊藤博文)이 광무 황제를 찾아가 무엄한 언사로 그 책임을 따졌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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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러면서 안중근이 얻은 것도 많았다. 그동안 다동 김달하의 집에 머물면서, 그리고 안창호와 박은식, 신채호가 있는 대한매일신보사를 드나들면서 그는 당시의 가장 치열하고 진보적인 의식으로 자신을 새롭게 가다듬었고, 헤이그밀사사건과 고종 퇴위, 정미칠조약과 군대해산 같은 역사의 거센 소용돌이를 바로 그 현장에서 목도하고 체험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 거기서 간도에 이르기까지의 험하고 힘든 여정도 그의 몸과 마음을 한 번 더 담금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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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들이여! 동포들이여! 내 말을 자세히 들어 보십시오. 지금 우리 한국이 겪고 있는 참상을 여러분은 알고 계시는 것입니까, 모르시는 것입니까? 몇 해 전 일본이 러시아와 개전할 때 전쟁을 선언한 글에는 ‘동양 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굳건히 한다.’는 말을 앞세웠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일본은 그와 같이 중대한 의리를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도리어 한국을 침략하여 을사조약과 정미칠조약을 강제로 맺은 다음, 국권을 손아귀에 넣고 황제를 폐위시켰으며 군대마저 해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철도·광산·산림·천택(川澤) 어느 것 한 가지 빼앗지 않은 게 없으며, 관청으로 쓰던 집과 민간의 큰 저택들은 병참(兵站)이라는 핑계로 모조리 빼앗아 저희가 살고, 기름진 전답과 오랜 분묘까지도 군용지라는 푯말을 꽂고 무덤을 파헤쳐 화가 조상의 백골에까지 미쳤습니다. 대한의 국민 된 사람으로서, 또 단군 성조(聖祖)의 자손 된 사람으로서, 어느 누가 그 분함을 참고 욕됨을 견뎌 낼 수 있겠습니까?…”
--- p.169
“내가 이등박문을 죽인 이유는 그가 살아 있으면 동양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한국과 일본 사이는 더욱 멀어지기 때문에 대한의군부의 참모중장 자격으로 적장(敵將)을 처단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일 양국이 더 친밀해지고 또 평화롭게 다스려지며, 나아가서는 오대양 육대주에서도 모범이 돼 줄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나는 결코 오해로 이등박문을 죽인 게 아니라, 그와 같은 나의 목적을 달성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이제라도 이등박문이 한국에서의 시정방침을 그르치고 있었다는 것을 일본 천황이 듣는다면 반드시 나를 가상하게 여길 것이라 믿는다. 오늘 이후 일본 천황의 뜻에 따라 한국에 대한 시정방침이 개선된다면 한일 간의 평화는 만세에 유지될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
--- p.388
그러자 안중근이 목소리를 가다듬어 아우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은 뒤에는 내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가 회복되도록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일러 다오. 모두가 각각 나랏일에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대한 독립의 공을 세우고 위대한 조국 건설의 대업을 이루도록 하라고.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 p.414~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