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돛을 올리고 키를 잡고 방향을 가늠하며 어딘가로 데려가는 것은 ‘나’가 아니라 ‘나’를 구속하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나’라고 믿는 아상은 진실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본디 그것이 헛것, 백일몽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다만 찰나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그림자와 같은 것일 뿐.
--- p.21
‘'아무의 모과’는 이름이 없습니다. 그것은 특별할 것이 없는 모과라는 뜻과 누군가의 모과라는 이중의 뜻을 품습니다. 누군가의 창가에 모과 몇 개가 놓여 있습니다. 그 모과는 아주 평범한 것입니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 “아무의 모과”는 창가에서 저 혼자 향기를 뿜어내며 썩어갑니다.
--- p.27
세상은 곧은 것을 유용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굽은 것은 쓸모가 없다고 여깁니다. 곧고 쓸모 있는 게 오래가고 굽어서 쓸모없는 것은 수명이 짧은 것 같지만, 곧은 나무는 그 쓸모 때문에 빨리 베어지고 굽은 나무는 쓸모가 없어 오래 살아남습니다. 지나치게 곧은 것은 그 강직함을 굽히지 않으려고 하기에 꺾이기가 쉽습니다. 대나무같이 휘어지고 굽히는 성질을 가진 나무는 태풍 속에서도 쉬이 꺾이지 않습니다.
--- p.43
그게 짐승이든 인간이든 돌팔매질 당하면서도 살아남은 것은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바닥을 쳐본 자의 고통과 내성이 마침내 세계를 다 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p.45
악인들을 교도소에 보내는 대신 산중에 모아 두고 아무 일 시키지 말고 초여름 산에서 우는 뻐꾸기 소리나 경청하게 할까요. 한 석 달 밤낮을 뻐꾸기 소리나 귀 기울이게 할까요. 혹시 그의 마음이 미적 황홀경에 들어 작은 물결이 일고, 그가 손톱만큼씩 착하게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 p.46
과연 비어 있음은 열등한가요? 옹기그릇, 방, 반지 따위가 다 비어 있음을 씁니다. 비어 있는 부분은 쓸모가 없다고 여기지만 옹기그릇, 방, 반지 따위는 그 쓸모없는 비어 있음을 쓸모의 바탕으로 삼습니다. 만약 비어 있음이 없다면 그것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
--- p.52
물은 약하고 부드럽지만 단단한 바위를 깎고 꿰뚫습니다. 굳세기로 치자면 바위는 물과 견줄 수 없습니다. 천하에 물보다 더 부드럽고 약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도는 물과 같다고 했습니다. 물은 단단하거나 뻣뻣하지 않고 약하지만 기어코 단단하고 굳센 것을 이깁니다. 그게 물이 도의 표상이 될 수 있는 사정입니다.
--- p.64
그 도는 움츠리게 하려면 잠시 벌리도록 하고, 약하게 하려면 잠시 강하게 해주어야 하는 도입니다. 장차 없애버릴 생각이면 잠시 흥하도록 하는 게 도입니다. 노자는 이것을 일러 “미명”이라고 합니다. 미명은 새벽 동틀 무렵 천지간을 물들이는 희미한 빛입니다. 이것은 밝음도 아니요, 어둠도 아닌 그 중간 영역, 즉 미묘한 데서 밝음입니다.
--- p.88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그것과 견주어지는 추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 p.97
잘 사는 것은 얼마나 균형이 잡히고 의로운 밥을 먹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먹는 밥이 의롭다면 우리의 삶도 의로울 것입니다.
--- p.99
작은 생선을 불로 익혀 손님에게 내놓을 때는 조심스럽게 다룰 수밖에 없습니다. 큰 나라를 다스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생선을 찌거나 삶은 행위는 대단한 게 아니라 소박한 나날의 일들 중 하나입니다. 노자는 작은 생선 찌는 일과 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한 줄에 놓았습니다. 둘이 크게 다르지 않으며 등가라는 암시입니다. 큰 나라를 다스릴 때도 소박하고 단순해야 백성이 불안하지 않습니다.
--- p.100
뿌리로 돌아감이 맑고 고요해지는 것입니다. 만물은 작게 시작해서 크게 무성해진 뒤 결국 뿌리로 돌아갑니다. 뿌리로 돌아가는 삶이야말로 하늘의 섭리에 따르는 것입니다. 사람이 능히 도를 구하여 넓히나요? 아닙니다.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지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게 아닙니다.
--- p.115
노자는 왜 슬퍼하는 자가 이긴다고 했을까요? 슬픔이란 연약한 것이 강한 세상에 저항하는 방식입니다. 연약한 것일수록 슬픔이 많습니다. 자신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한 슬픔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사람은 고난을 견디는 힘이 자라납니다. 슬픔은 연약해 보이나 실은 강한 것입니다. 슬픔에 끝끝내 지지 않고 넘어서가는 사람은 강합니다. 아니, 슬픔으로 사람은 단련되고, 그렇게 단련되면 세상의 겁박에 짓눌리지 않습니다. 슬픔은 우리를 슬픔 아닌 다른 세계로 안내합니다.
--- p.119
도는 고요함 속에서 뒤집어집니다. 뒤집어짐은 그 성질이 반전한다는 뜻입니다. 온전하면 무너지고, 극에 달하면 되돌아오며, 가득 차면 기우는 것이 반전입니다. 만물과 인생의 이치가 다 그런 반전 속에 있습니다.
--- p.126~127
큰 것은 늦고 작은 것은 빠릅니다. 큰 그릇은 가장 늦게 만들어지고, 가장 좋은 일은 늦게 오는 법입니다.
--- p.129
이는 발꿈치를 들고는 오래 서 있을 수 없고, 가랑이를 벌리고는 오래 걸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발꿈치를 드는 것은 남보다 더 커 보이기 위함이고, 가랑이를 넓게 벌리고 걷는 것은 남보다 빨리 가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무위가 아니라 유위의 행위, 자연의 도를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행위는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으며, 혼자 우쭐거리는 자기 과시의 의도를 드러냅니다.
--- p.140
무위의 정치는 백성이 임금의 어짐을 알고 칭송하는 정치가 아니라 백성이 다만 임금이 있음을 알 뿐인 정치, 덕의 두터움을 바탕으로 하는 정치입니다.
--- p.185
수레바퀴 흔적과 말 발자국은 군사의 이동을 짐작게 하는 증거입니다. 군사가 이동한 자취는 적에게 제 위치를 들킬 수 있는 단서가 됩니다. 뛰어난 전략가는 군사를 소리 없이 움직이고, 자취를 남기지 않고 이동합니다. 그 용의주도함은 말 잘하는 사람에게 흠잡을 게 없고, 셈 잘하는 사람이 수리에 통달하여 산가지를 쓰지 않고 셈하는 것과 같습니다.
--- p.192~193
겸손함은 자신을 낮추고 남을 드높이는 일입니다. 자신을 낮추면 도리어 남이 높여줍니다. 젊은 시절 나는 겸손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아직 젊었고, 여러모로 미숙한 인격이었습니다. 하지만 의욕은 세상을 집어삼킬 듯 넘쳤습니다. 그런 탓에 겸손을 알 만큼 덕이 두텁지 못했습니다. 덕이 두텁지 못했으므로 발을 헛디뎌도 헛디딤에 인식이 없었고, 실패를 겪고도 실패에 대한 각성이 없었습니다. 젊음을 다 쓰고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 진실을 깨달았습니다. 아마 조금이라도 더 젊었을 때 노자를 만났더라면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마흔 넘어 “모든 골짜기의 물들이 강과 바다로 흘러드는 것은 강과 바다가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라는 노자와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강과 바다는 골짜기들의 왕이 될 수 있습니다.
--- p.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