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졸업하고 학점에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지면, 무엇보다 외워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지 않게 되면 비로소 호기심이라는 말을 앞에 세울 수 있게 된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보면서 연도를 외우고 르네상스의 삼각형 구도를 떠올리는 대신 ‘아들이 서른이 넘었는데 성모 마리아는 왜 20대로 보일까?’ 하는 호기심을 앞세울 수 있고, 중세 성당을 그린 그림을 보면서 로마네스크 양식인지 고딕 양식인지 구분하기 전에 ‘성당에 왜 의자가 없을까?’를 궁금해할 수 있다.우리가 학교에서 따랐던 커리큘럼도 결국 누군가가 자신의 궁금증을 해결하려고 찾아낸 것을 모은 것이니까. 그리고 그렇게 자신만의 호기심, 자신만의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떠난 여행에서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은 무척 즐겁고 만족스럽다.
---「프롤로그」 중에서
초상화에 웃는 얼굴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7세기에 네덜란드에서 활동했던 프란스 할스의 작품에서였다. 하지만 그가 그린 초상화 중에서도 중상류층 사람들은 거의 웃지 않거나, 웃어도 희미한 미소만을 지을 뿐인 반면, 술 취한 혼혈인, 집시, 어린 소년들은 이를 내보이며 웃고 있다.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조선 후기 화가 강세황이 그린 자화상에는 엄격한 표정을 한 양반 얼굴이 있지만, 비슷한 시기에 화가 김홍도가 그린 풍속화 속 평민들 얼굴에는 간간이 웃음이 보인다.
---「사람들은 언제부터 카메라 앞에서 웃었을까」 중에서
지금이야 (가령 김경민 조각가의 작품 같은) 공공예술 등에서 채색된 인물상을 보는 일이 드물지 않지만, 조금만 오래된 조각상들을 생각해보면 대부분 채색을 꺼렸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서울의 대표적 공공미술이라고 할 수 있는 광화문의 이순신상(1968)이나 비교적 근래에 세워진 세종대왕상(2009)에 페인트로 사실적인 채색을 한다고 생각해보라. 멀쩡한 동상을 왜 천박하게 만드느냐고 항의가 빗발칠 게 분명하다. 그 두 동상은 추상조각이 아니고 실존인물을 사실적인 방법으로 묘사한 것이다. 그런데 그걸 더욱 사실적으로 보이도록 피부색과 곤룡포의 황금색과 붉은색을 칠하는 것이 왜 이상하게 느껴질까?
---「고대 그리스 · 로마 조각은 흰색이었을까」 중에서
큐브릭 영화에서 여주인공이 화장실에서 휴지를 사용하는 장면은 그냥 일상의 모습일 뿐 특별한 성적 암시나 의미가 들어 있지 않다. 여성이 손을 그곳에 가져간다는 것만으로 성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것은 쿠르베 작품이 성직자와 조문객이 참석한 하관식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작품에서 삶과 죽음, 특별한 종교적 의미를 찾으려는 태도와 전혀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쿠르베가 이 그림을 그린 의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드가의 사실주의가 관습적 시각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면, 쿠르베의 사실주의는 관습적 사고에서 탈피하는 것이었다.
---「이 작품은 왜 사실주의라고 할까」 중에서
그런데 이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한 번쯤 이런 의문을 품어봤을 것이다. ‘죽은 아들은 30대인데 어머니가 너무 젊지 않나?’ 사실이다. 예수가 33세에 죽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걸 절대 모를 리 없는 미켈란젤로가 묘사한 성모 마리아의 모습은 잘해야 20대 초반 정도로 보인다. 그렇다면 미켈란젤로는 나이 든 여성의 모습을 묘사할 줄 몰라서 젊게 그렸을까? 그렇지 않다. 그의 다른 작품인 시스틴 채플의 천장화에는 나이든 여성의 모습이 등장한다. 그는 마리아를 충분히 중노년의 여성으로 묘사할 수 있었다.
---「성모 마리아의 영원한 젊음」 중에서
자기감정과 상관없이 계속 웃는 얼굴로 있어야 하는 상황으로 슬픔을 오히려 극대화하는 것은 조커라는 악당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지만, 그런 대비가 이번 영화에서 처음 시도된 것은 아니다. 100년도 훨씬 전인 1905년에 파블로 피카소가 그걸 했다. (…) 대표적인 것이 그의 1905년 작품 〈곡예사 가족〉이다. 당시 서커스에서 일하던 단원들이 그랬듯 이들은 위험한 육체노동을 하면서 돈을 버는 사회의 하층계급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다른 노동자 계급 사람들과 다른 게 있었다면, 손님들에게 웃음을 선사해야 하는 일종의 감정 노동자들이었다는 것이다.
---「조커의 가면, 우리의 가면」 중에서
뉴욕시 맨해튼에 있는 센트럴파크 남쪽에는 흥미로운 빌딩들이 들어서 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연필처럼 가늘고 긴 빌딩들이다. 맨해튼이 너무 높아서 하늘을 긁는다는 뜻의 마천루로 유명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것처럼 좁고 높은 빌딩은 과거에는 본 적이 없다. 어느 건축 평론가는 이 현상을 두고 로마제국이 시멘트로 돔을 만든 것이나, 19세기 말 미국에서 처음 등장한 마천루처럼 한 시대의 건축을 상징할 만한 사건이라고까지 말했다. 왜 뉴욕에서는 21세기에 이런 새로운 형태의 건물을 지을까? 이걸 이해하려면 현대 건축사의 흥미로운 한 부분을 들여다봐야 한다. 바로 근현대 미국을 대표하는 두 도시 뉴욕과 시카고의 마천루 건축사 이야기다.
---「두 도시 이야기 : 마천루의 시작」 중에서
정말로 고대 그리스인은 파란색을 구분하지 못했을까? 학자들에 따르면 답은 놀랍게도 ‘그렇다’에 가깝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김춘수 시인의 표현처럼, 사람들이 자연에서 특정 색을 볼 수 있는 능력은 그 색을 가리키는 어휘가 등장한 뒤 생긴다고 한다. 아프리카 나미비아공화국에 사는 힘바족을 대상으로 했던 유명한 실험이 이를 잘 보여준다. 학자들은 이 족속의 어휘에 ‘파란색’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부족민에게 컴퓨터 화면 위에 12개 색이 들어간 사각형을 보여주면서 그중에서 다른 것 하나를 찾아내라고 했다. 우리 눈에는 11개 녹색 사각형과 하늘색 사각형 하나가 분명하게 보이지만, 힘바족은 그 하늘색 사각형을 구분하기 힘들어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색, 블루」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