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세이》속, 이름을 묻는 행위를 통해 한 인간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던지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오디세우스는 누구냐고 묻는 괴물 폴리페무스에게 “아무도 아니야”라고 대답하는 꾀를 부림으로써 목숨을 구한다. 인간의 정체성은 ‘이름’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이름만으로 그 사람이 누군지 다 알 수 있을까?
--- 「1. 나는 누구? 너는 누구? 그들은 누구?」 중에서
오디세우스의 정체는 자신의 재치에 득의양양해진 오디세우스가 폴리페무스에게 자신이 “이타카 출신의 라에르테스의 아들이며 도시의 파괴자인 오디세우스”라고 자랑하면서 탄로가 난다. 이렇듯, 내가 누군지 증명하는 신분증에 담긴 정보는 유한하다. 따라서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시간에 따라 바뀌는 속성이 아닌, 나라는 존재의 핵심이어야 한다.
--- 「2. 신분증 좀 보여주시겠어요?」 중에서
그렇다면 그런 핵심적인 나를 규정하는 ‘나라는 것’, ‘자기’ 또는 ‘자아’란 대체 뭘까? 이 질문에 대해 철학적인 답(나의 본성은 무엇인가?)보다는 심리학적인 답(내를 타인과 다른 존재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을 찾아야 한다. 이는 자아 성찰을 통해 가능하지만, 내가 나를 똑바로 규정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
--- 「3. 무엇이 내가 누군지 말해줄까?」 중에서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데카르트는 어떻게 나를 ‘~것(사물)’에 비교했을까?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은 실존하는 것이고, 사물(것)은 존속하는 것이다. 실존이란 현재와 과거, 미래가 지속해서 관련되는 것이다. 반면, 사물의 정체성은 고유한 본성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동일하다. 예를 들면, 밀랍이 열에 의해 녹아 액체가 되어, 고체 상태에서 가지는 단단한 속성을 잃어버려도 여전히 같은 밀랍이다. 이처럼 사물의 정체성은 최종적이고 고정된 것이다.
--- 「4. 우리는 존속할까, 존재할까? 」 중에서
하지만 인간의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해선 다른 접근방식이 필요하다. 인간은 사물과 달리, 언제나 미래를 향하는 속성을 가진다. 과거에 물건을 훔쳤던 나와 마음을 고쳐먹은 현재의 나는 다르다. 나는 더는 과거의 내가 아니지만, 과거의 나는 남아있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에는 연속성이 존재한다. 미래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하려면 주체의 시간적 속성에 대한 불확실성과 주체의 내재적 연속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 「5. 인간의 정체성은 역설적일까?」 중에서
약속을 하면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가 주어진다. 약속을 지키는 것은 순전히 나, 그리고 나의 자유에 달려있다. 이 말은 즉, ‘나라는 것’은 내가 되기로 결정하는 것에 달려있다는 말이다. 과거에 물건을 훔쳤다는 사실로 누군가는 나를 도둑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그 후로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찍힌 도둑이라는 낙인은 부당하지 않은가? 결국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는 나의 결정과 선택에 달렸다.
--- 「6.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 중에서
성 정체성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앞서 살펴본 인간의 정체성과 같은 방법으로 성 정체성을 이해해야 할까? 동성애자거나 이성애자인 것은 나의 선택인가, 타고 태어나는 것일까? 저자는 이 부분에 대해서 조심스러운 태도로 ‘열린’ 자세를 취하고 있다. 아직은 설명하기 어려운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속단하거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 없이 나 자신의 고유한 성격 중 하나로 이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 「7. 나는 이성애자일까?」 중에서
사람은 자신의 정확한 정체성을 알지 못해 괴로워하며, 늘 무언가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근본적으로 가지게 된다. 우리는 정체성을 찾기 위해 노력하다가, 고정된 정체성이라는 환상에 유혹된다.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의 카페 웨이터를 예로 들어 이를 설명한다. 그와 동시에, 현재 프랑스가 겪고 있는 사회적 문제, 이슬람 또는 ‘난민 위기’에 대해 ‘진정한 프랑스인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던지며, 이러한 정체성의 환상이 가져오는 위험성을 강조한다. 또한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통합주의론을 경계할 것도 강조한다.
--- 「8. 카페 웨이터, 통합주의자, 진정한 프랑스인이 된다는 것은?」 중에서
이처럼 인간의 정체성이란 집행 유예된 것처럼 늘 일시적이다. 나는 자유롭고, 내 정체성도 그렇다. 그렇다고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처럼 내 선택에 달렸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내 출생일, 장소, 내 몸을 선택할 수 없고, 이것들은 모든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성 정체성에서 본 것처럼, 내재적이라고 불리는 어떤 성향들은 내 자유와 무관하다. 그렇기에 우리가 무엇인지, 우리로부터 기인하지 않은 것 - 사회적 환경, 노동 조건, 제도 -을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집행이 유예되고, 존재 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정체성을 가진 자유가 아닐까?
--- 「9. 집행 유예 또는 위험에 빠진 정체성?」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