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구멍 유적은 문화유산 가운데 옛날이나 지금이나 의식주(衣食住) 해결을 위한 일상생활 근거지와 가장 가깝게 있고, 무의식 속에서 함께 해온 친밀한 유적이지만 유산(遺産)으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바위에 그림이 있거나 모양이 특별하다면 시각적으로 잘 나타나 주목을 받을 수 있으나 바위 표면에 홈을 여러 개 조성해 놓았을 뿐 바위 또는 홈 자체가 예술성을 갖지 못하거나 조성의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경우 사람들에게 흥미를 주거나 유산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 유적은 선사시대부터 근대 일상생활까지 인간의 잠재의식으로 전승되어 온 의식행위로서 가장 오래된 인간의 풍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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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 조성 형태에 따라 별자리형(星穴), 별자리 중에서도 가장 많이 나타나는 삼태성형(三台星形), 윷판형(柶圖形), 별자리와 다른 형태의 혼합형(混合形), 남녀 성기의 모방형(性穴)로 분류하고, 기타는 구멍(穴)으로 분류하였다. 또한 입지 여건에 따라 산의 정상과 능선, 계곡, 평지 등 입지별로 분류했으며, 구멍이 조성된 바위를 암반, 독립 바위, 원석, 파손 바위로 구분하고, 조성면과 분포 형태, 문자나 그림이 함께 조성되었는지를 분석했다. 이러한 구멍 조성행위는 1924년까지는 확인되나 그 이후부터는 흔적을 발견할 수 없는데 이는 근대화에 따른 대중매체 발달로 인해 전통 의식 변화를 가져오면서 사라진 것으로 추측된다.
유적의 현상은 바위 상단부에 조성되는 특수성에 의해 직사광이나 눈비 등 자연 풍화 조건에 완전히 노출되어 구멍에 눈비가 항상 고여 있는 상태로서 동해(凍害)에 의한 훼손이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다. 훼손의 진행은 사암 계통의 바위에서 풍화작용에 의한 알갱이 입자 탈락이 더욱 빠르게 진행되고 있으며, 퇴적층의 분리에 의한 박락 현상도 일어나고 있다. 바위 글과 그림 등 다른 유산과 같이 국가 보호제도의 사각지대에 남아 있는 마지막 유적으로서 제도적인 조사와 보호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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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각 문화의 일종으로서 바위에 홈을 파고 주술적인 행위의 흔적으로 나타난 바위구멍을 성혈(性穴) 또는 성혈(星穴)로 부르고, 지석묘에 많이 나타나고 있어 선사 유적으로 분류해 왔다. 그러나 지석묘의 성혈 존재 관계에 있어서 ‘성혈이 있으면 지석묘이고, 성혈이 없으면 지석묘가 아니다’라는 절대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상주지역에서 조사된 지석묘는 성혈이 있는 것보다 없는 지석묘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또한 바위구멍 조성행위는 선사시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근대까지도 이어져 오는 암각 문화의 일종으로서 바위에 구멍이 있는 근대의 암각 문화까지 선사 유적으로 보는 것은 암각 문화연구가 그만큼 빈약하였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성혈 조성의 목적에 대한 선행의 연구를 보면, 바위에 새긴 오목 구멍은 여성의 성기(性器)로 여기고 이는 여성의 생산성에 비유한 의례 행위로 만들어진 형상이라 했다. 또한 바위에 오목한 구멍을 만들고 다른 도구로 구멍 속을 비비면서 주술행위를 한 것은 남녀의 성적(性的) 교합과 비슷한 행위를 통해 생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민간신앙(祈子信仰)의 한 형태로서 모방주술(模倣呪術)이며, 이는 성(性) 신앙의 남근숭배로부터 기자 신앙으로 발전하면서 풍요와 생산을 그 목적으로 한다. 또 다른 목적은 장수를 기원하는 칠성 신앙, 풍요와 기자, 장수, 재복을 기원하는 거북 신앙 등 다양한 민속신앙을 생성한다. 즉, 조성자의 목적을 기원하는 민속신앙이고, 그 결과에 따라 생긴 것이 ‘바위구멍’이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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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구멍을 조성한 시기는 선사시대부터로, 기원 등을 위한 행위 표시가 이어져 온 결과물이라는 막연한 추정만 할 뿐 구체적인 편년을 설정할 수는 없다. 즉, 지석묘에 조성된 구멍은 지석묘와 같은 시기에 조성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일 뿐이다. 그렇다고 모든 지석묘에 반드시 바위구멍이 있는 것은 아니다. 상주지역에서 조사된 지석묘는 30기로서 그중 10기에만 바위구멍이 있고, 나머지에는 없다. 조사된 10기에도 바위에 구멍이 있어 지석묘로 확정하였는지 바위가 지석묘이기 때문에 확정하였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바위에 구멍이 있다고 해서 지석묘로 확정하는 것은 오인의 가능성이 크다. 그 이후 삼국시대 고분 개석(蓋石)에 있는 바위구멍을 고분과 같이 삼국시대에 조성한 것으로도 볼 수 없는 것이다. 삼국시대 이전의 유적지에 있는 바위구멍 유적은 46개소(915개)로 전체 유적의 36.2%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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