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담
지도를 태운다
묻혀 있던 지진은
모두,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태어나고 나서야
다시 꾸게 되는 태몽이 있다
그 잠을 이식한 화술은
내 무덤이 될까?
방에 앉아 이상한 줄을 토하는 인형(人形)을 본다
지상으로 흘러와
자신의 태몽으로 천천히 떠가는
인간에겐 자신의 태내로 기어 들어가서야
다시 흘릴 수 있는 피가 있다
--- p.13
풍선의 장례
하늘에 포르말린 흩어진다
구름이 하늘에서 풍선 속을 통과한다
그건 구름이 풍선의 장례를 치르는 일
저녁은 공중이 지상으로 내려오는 일
내려온 공중에 가득 찬 수면을 바라보는 일
다른 선으로 빛이 떠내려가는 일
떠내려가는 빛이 기어이 새가 되고 마는 일이 있다
그 빛을 문장으로 이장하는 일 그건 내가 이 세상에서 바꾸어
부르기로 한 일, 문장의 일
구름이 허적허적 게워내고 있는 풍선
혁명. 다른 피를 밴 구름
연필이 마신 등고선들
떠오르는 순간 장례를 치르는 문장
음울한 한 짐승의 물방울
죽은 다음에야 풍선을 비울 수 있는 육체,
그건 내 나비의 실내에 부검이 못 들어오는 일
나는 배다른 구름의 일
표본실엔 물방울 짐승
--- p.18
프리지어를 안고 있는 프랑켄슈타인
J, 밤이면 내가 쓰는 언어는 짐승의 빛깔이고 새벽이면 내 언어는 식물의 빛깔이 됩니다. 인간의 돌멩이를 피해 달아나 꽃을 안고 당신에게 달려가다가 나는 풀숲에 엎드려 있습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서 치러야 할 목젖의 일이 입을 벌리고 내 미라를 꺼내주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꽃들의 붉은 똥을 마시고 뼈에 연보라색 불이 들어오도록 음악을 종일 들었습니다. J, 인간의 곁으로 가기 위해 나는 경(經)을 버렸습니다. 사물로부터 불어오는 만물의 경계를 오래 바라보며 사물과 맹목을 지나 나는 내 눈의 수액이 구름 속으로 스미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구름이 흰 뼈를 드러내는 시간은 내 얼굴이 노란 화상을 입는 시간이고 구름이 흰 손가락들을 내 얼굴에 집어넣는 시간은 당신을 향한 내 몸의 뼈들이 붉게 부어오르는 면입니다. J, 오래전 나는 헛간에 앉아 한 새장을 기르다가 죽은 새를 보았습니다. 맞아요 J, 새는 새장을 기르지 못합니다. 새장은 깃털을 모아두고 ‘날개’로 자신의 ‘혀’를 놀리다가 가는 또 다른 새일 것입니다. 구름 속에서 달이 허우적거립니다. 자기 허공에 색을 모으다 가는 달의 체내로 구름을 견디느라 지금 이 시간으로는 그대를 부르지 못합니다. 구름 속에서 달은 미천한 눈을 천둥의 수분에 맡기고 구름은 망각을 다른 수면으로 이동시키는 중입니다. 그렇지만 구름의 세계에서 보자면 달도 자신의 배색에 불과합니다. 둥둥 떠 있다가 허우적거리는 일에 불과한, 허우적거린다는 것은 의식이 생활에 더 밀착해 있다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허우적거린다는 것은 사물을 더 이상 이런 방식으로는 표현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평면 위에서 점점 착오가 되어간다는 겁니다. J, 나는 내내 이 착오를 완성하고 그 미개로 죽겠습니다. J, 제물은 언제나 같은 이유로 제단에 바쳐지곤 했습니다. 제물은 언제나 우울이 아닌 공포로 세계를 견디고 있어야 했습니다. 수많은 척후병들의 도움을 받아 그 공포는 더욱 단단해지고 모든 운동은 음표를 잃어가고 참혹해지고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의 은유는 얼마나 적대적인 것이 되어버렸습니까? 제물은 헛소리를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미혹에 붙들려 제물은 자신의 형신(形神)이 어디로 바쳐지는지 모를 때 가장 연연한 춤을 춥니다. 혼효한 나의 필체는 공포의 대상 앞에서 더욱 활기를 가졌습니다. 구름과 달은 서로의 수면에 누워 있듯 서로의 상(像)에 스미는 헛소리입니다. J, 경마용 말과 짐 끄는 말 사이에 지금 나는 숨어 있습니다. J, 사랑하는 나의 J여, 혼란의 형신을 수용할 수 있는 형식을 나는 찾고 있습니다. 나는 내 생애 가장 유사한 교란이거나, 나의 편의를 돌보는 이 (피부의) 왜곡으로 저의를 갖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우리가 모르는 생태계로부터 불어오는 이 꽃의 따귀를 때리신다고 하더라도. 내내 참혹엔 친필이 없습니다. 이 꽃을 받아주시겠습니까. 당신의 미라로만 나는 사랑입니다.
--- p.54
무릎의 문양
1
저녁에 무릎, 하고
부르면 좋아진다
당신의 무릎, 나무의 무릎, 시간의 무릎,
무릎은 몸의 파문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살을 맴도는 자리 같은 것이어서
저녁에 무릎을 내려놓으면
천근의 희미한 소용돌이가 몸을 돌고 돌아온다
누군가 내 무릎 위에 잠시 누워 있다가
해골이 된 한 마리 소를 끌어안고 잠든 적도 있다
누군가의 무릎 한쪽을 잊기 위해서도
나는 저녁의 모든 무릎을 향해 눈먼 뼈처럼 바짝 엎드려 있어야 했다
“내가 당신에게서 무릎 하나를 얻어오는 동안 이 생을 가고 있습니다 무릎에 대해서 당신과 내가 하나의 문명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내 몸에서 잊혀질 뻔한 희미함을 살 밖으로 몇 번이고 떠오르게 했다가 이제 그 무릎의 이름을 당신의 무릎 속에서 흐르는 대기로 불러야 하는 것을 압니다 요컨대 무름이 닮아서 사랑을 하려는 새들은 서로의 몸을 침으로 적셔주며 헝겊 속에서 인간이 됩니다 무릎이 닮아서 안 된다면 이 시간과는 근친 아닙니다”
2
그의 무릎을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은 잊혀진 문명의 반도 같았다
구절역 계단 사이,
검은 멍으로 한 마리의 무릎이 들어와 있었다
바지를 벌리고 삐져나온 무릎은 살 속에서 솟은 섬처럼 보였다
그는 자신의 무릎을 안고 잠들면서
몸이 시간 위에 펼쳐놓은 공간 중 가장 섬세한 파문의 문양을
지상에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의 무릎으로 내려오던 그 저녁들은 당신이 무릎 속에 숨긴 마을이라는 것을 압니다 혼자 앉아 모과를 주무르듯 그 마을을 주물러주는 동안 새들은 제 눈을 찌르고 당신의 몸속 무수한 적도(赤道)들을 날아다닙니다 당신의 무릎에 물이 차오르는 동안만 들려옵니다 당신의 무릎을 베고 누운 바람의 귀가 물을 흘리고 있는 소리가”
3
무릎이 멀미를 하며 말을 걸어오는 시간이 되면
사람은 시간의 관절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한다
햇빛 좋은 날
늙은 노모와 무릎을 걷어올리고 마당에 앉아 있어본다
노모는 내 무릎을 주물러주면서
전화 좀 자주하라며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한다
그 무렵 새들은 자주 가지에 앉아 무릎을 핥고 있었다
그 무릎 속으로 가라앉는 모든 연약함에 대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음절을 답사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당신과 내가 이 세상에서 나눈 무릎의 문명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생은 시간과의 혈연에 다름 아닐진대 그것은 당신이 무릎을 안고 잠들던 그 위에 내리는 눈 같은 것은 아닐는지 지금은 제 무릎 속에도 눈이 펑펑 내리고 있습니다 나는 무릎의 근친입니다”
--- p.59~62